<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세 번째로 걷는다.
영동 양산면에서 옥천읍 지나 금강 휴게소까지.
2016년 한국의 강 기행 ‘금강 따라 천리 길“이 세 번째로 7월 둘째 주인 8일부터 10일 까지 이어집니다.
멀리 옥천으로 가는 호탄교가 보이고 598번 지방도로 영동까지는 2.2km 학산까지는 8km밖에 되지 않는다 .
신라 때 이름이 길동군(吉同郡)이었고,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진 영동이 황간현과 합쳐서 영동군이 된 것은 1914년이었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조선 초기의 문신 윤상(尹祥)이 금유(琴柔)에게 보낸 글에서, “영동은 산수가 맑고 기이해서 시 짓는 것 도울 만한 것이 진실로 많다”고 하였던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편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이며 지금은 경북고속도로가 지나는 중요한 길목으로 추풍령 휴게소가 있다.
영동, 무주로 길은 갈리고 저 강물은 들썩들썩 일어나서 어서 가자고 소리를 지른다. 보청천, 갑천, 미호천을 만나고 공주 부여 지나 서해바다로 흘러가자고 가서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 한강이랑 만나 얼싸안고 흐드러 지자고 한바탕 얼쑤 놀아보자고 소리 지르는 소리 들린다.
강변에는 푸른 갈대 잎들이 하늘거리고 강물은 은빛 비늘을 자랑하듯이 소리치며 흐른다.
호탄교에 이르기 전 금강에서는 이곳이 아니면 찾아볼 수가 없는 습지를 만난다. 단풍잎 같이 푸르고 빠알간 마름이 수면 위에 가득 떠있고 몇 사람은 그 습지 언저리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여정은 호탄교를 지나며 강은 호탄천을 받아들인다.
양산면 누교리 북서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호탄리 작두골을 거쳐 금강으로 접어드는 호탄은 옛날에 호랑이가 건너 다녔던 곳이라 하여 범여울 또는 호탄리라고 부른다. 범 여울 밑에는 조개둠벙이란 연못이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물을 품자 도깨비가 심술을 부려 고기를 몽땅 잡아가고 조개만 남았다는 이야기가 남아있고, 골짜기를 따라가다 좌측으로 들어가면 천태산 자락에 영국사가 있다.
《정감록비결》의〈10승지지(十勝之地)〉와 비슷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는 영국사는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천태산(지륵산)의 중턱에 있다. 신라 문무왕 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창건 당시의 이름은 만월사였다. 그후 효소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면서 국청사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고종 때 감역 안종필이 왕명을 받아 탑과 부도 및 금당을 중건하고 산 이름을 천주산(天柱山)이라고 하였다.
영국사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제 31대 공민왕 때였다. 원나라 홍건적이 개성까지 들어오자 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이원면 마니산성으로 피난을 왔다. 그 당시 국청사였던 이곳에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기 위해 온 왕의 뜻을 알아차린 신하와 백성들은 천태산에서 걷어온 칡넝쿨로 구름다리를 만들었다. 구름다리를 지나 절로 간 공민왕은 국태민안을 위해 기도를 계속하였고 그 후 기원대로 나라와 백성이 편안해지자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절 이름을 영국사라고 바꿔 부르게 하였다. 또한 이때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은 누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절의 맞은편에는 팽이를 깎아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데 공민왕은 그 봉우리 위에 왕비를 기거하도록 하면서 옥쇄를 맡겨두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세조 때 세사국사가 산 이름을 지륵으로 바꾸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별로 없다.(...)
소나무 숲 안쪽의 소금실들은 옛날에 금강의 물길을 거슬러온 삼남 일대의 배들이 가지고 온 소금 집산지로서 명성이 자자했었다. 그러나 큰 홍수가 나며 강줄기가 변경되면서 일대가 들판이 되고 만 것이다. 또한 이 양산은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요 난들 가서 배 잡아타고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장끼가 논다 장끼가 논다 양산 수풀 속에 장끼가 논다”라는 양산가의 고장이다. 그리고 이곳 금강일대의 산천이 빗어낸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개를 일컬어 양산 8경이라 부른다. 영국사, 봉황대, 비봉산, 강선대, 함벽정, 여의정, 용암 자풍당이 그것 강선대(降仙臺)는 봉곡리 강가에 있다. 바위 절벽이 솟아올라 높직한 대를 이룬 곳에 노송 몇 그루가 서 있다. 꼭대기의 정자에 오르면 굵다란 소나무들 사이로 강물과 먼 산줄기가 상쾌한 풍경화를 그려낸다. 이곳 강물에 바위 위에 구름이 자욱하더니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옥퉁수를 불다가 구름을 타고 승선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며 놀았다는 전설과 함께 같은 봉곡리에 있는 함벽정(涵碧亭)은 이봉촌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며, 옛 시인들이 시를 읊고 학문을 강론하던 강당이다.
양산가의 여의정(如意亭)은 노송이 우거지고 사철 정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강
가운데는 용암(龍巖)이 우뚝 솟아 있다. 강선대로 내려와 목욕하는 선녀를 훔쳐보던 용이 격정을 참지 못하고 다가가자 선녀는 놀라서 도망을 가고 용은 그 자리에 굳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광해군때의 문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 이 곳의 절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 신선이 이 대에 내렸음을 들어나니/옥피리가 자주빛 구름을 몰아 오더라/아름다운 수레 이미 가 찾을 길 바이 없는데/오직 양쪽 강 언덕에 핀 복사꽃만 보노라/백척간두에 높은 대 하나 있고/비개인 모래 눈과 같고 물은 이끼 같구나/물가에 꽃은 지고 밤바람도 저무는데/멀리 신선을 찾아 달밤에 노래를 젖는다.”
옛날 양지산에서 봉황이 울었기 때문에 미랭이 또는 명양이라 부르는 마을 입구의 빨래터에는 마을 아낙네 두 분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큰 강이 곁에 흘러도 빨래터가 없으므로 논 가운데 샘을 파서 빨래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 집집마다 세탁기 없는 집이 없을 터인데, 이 샘가에서 빨래를 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물으니 “시골 빨래는요 너무나 찌들어 갔고 빨래가 잘 안돼요. 집집마다 세탁기는 다있는디,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나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옹개 다 여그 와서 빨래 혀요” “이곳은 명양인디 미랭이라고 혀야 더 잘 알아들어요. 여그요 몇 집 안되야요 많이 살았는디 다 떠나갔시요” 집집마다 처마 밑까지 참깨 다발이 쌓여 있고 주인이 떠나간 빈집에는 풀 섶만 무성하다.
포도밭을 지나며 포도향기에 취하고 구강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에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자그마한 논 다랭이마다 무르익어 가는 벼이삭들 속에 새카만 피들이 껑충하게 솟아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 저 피를 뽑아 끝에다 침을 발라 웅덩이의 개구리에게 내밀면 개구리들은 그 피를 냉큼 삼켰었지 놓칠세라 힘껏 당기면 따라 올라오던 그 개구리들을 잘도 잡았었지, 그러나 어느 때부터 농약 사용이 늘어나면서 그 개구리들도 예전처럼 흔하지 않으니.
산구만동 마을을 지나 구만동 마을에 접어든다.
옛날 이곳에 아홉 명의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구만동이라 불리는 탓인지 마을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구강교 아래에는 등산복 차림의 사내들이 갈쿠리를 들고 수석을 채취하고 있다. 저렇게 해서 수집해간 수석들을 집에다 놓고 보면 무엇이 다르고 또 떼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는가. 우리 국토를 돌아다니다 보면 도처에 수석이고 도처에 분재가 가득한데, 무슨 재미로 저렇게 금강변을 소요하고 있는가.
박연은 이곳 고당리에서 고려 우왕 4년(1378)에 나서 조선 세조 4년(1458)에 여든한 살의 나이로 죽었다. 서른 네 살이 되던 해 집현전 교리로 벼슬을 시작한 박연은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쳤다. 세종 즉위 후에는『관습도감』제조에 임명되어 음악 분야에 전념, 우리 나라 음악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향악과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 보법 및 악기의 그림을 실은 악서를 편찬하였으며 각종 아악기를 제작하고 ‘조회악’이나 ‘회례아악’을 창제하였으며 종묘악을 정돈하는 등 국악 전반에 미친 그의 업적은 지대하다.
특히 국산 편경을 만든 것은 그의 큰 공으로 꼽힌다. 편경은 두께가 각각 다른 기역자 모양이 경돌 16개를 아래 위 두 단으로 매달아 두드리는 가락 타악기이며,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으므로 모든 다른 악기 조율의 기준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에서 편경을 들여와 썼고 공민왕 때와 조선 태종 때도 명으로부터 편경을 들여와 썼고 공민왕 때와 조선 태종 때도 명으로부터 편경을 들여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올리는 종묘제례악을 바로잡는 일등 그는 우리 음악에서 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경부선 열차가 지나는 철교가 보이는 이곳에 옛 시절 적등진이라는 나루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우러지던 터의 나루란 말은 배로서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에서 나루라는 말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나루라고 하며 그 어원의 시작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웅진을 곰나루라고 한 것이 최초일 것이며 나루는 나라와 어원이 비슷한데 이는 고대 원시적 형태의 국가가 강가 등지에 자리를 잡고 인근 부족의 교역을 중개하는 한편 무역으로 상업적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한 나루가 금강에서는 금강의 입구에서부터 용당진, 남당진, 청포진, 강진, 웅진, 적등진, 닭실나루 등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실어날랐을 것이다. 이곳 적등원赤登院에 있던 적등진나루는 옥천과 영동의 중간에 위치한 나루터라 영남지방과 호서지방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추풍령을 넘고 금강을 건너 서울로 통하는 요충지였던 이곳 적등원 옆의 적등루를 서거정은 기문에서 이렇게 썼다. “옥천은 사무가 번잡한 고을로 남기의 주집이다. 서울로부터 충청도로 가고, 충청도로부터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사신과 여행자들의 오가는 물굽과 수레가 날마다 서로 잇다라 있다. 군의 동남쪽 30리쯤에 속읍이 있으니 이산이라 하고, 강이 있어 넓이 수 십리에 가로질렀으니 적등이라 한다. 그 위에 원이 있고 누각이 있으니 참으로 큰 길거리의 중요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큰 더위와 몹시 추울 때나, 모진 바람과 비오는 괴로운 날에 길가는 이들이 여기에 와서 머물게 되고, 혹은 물을 건너기 어려울 때나 길이 늦었을 때 마소가 모자라거나 도둑의 염려가 있을 적에는 여기서 쉬기도 하고, 누에 올라 구경하기도 하고, 자고 묵기도 한다.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해주고 더울 적에는 서늘하게 해 주니, 사람들에게 덕을 줌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그러나 건물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헐어서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강은 산굽이를 돌아가고 자동차들은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우리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 긴 다리 세 개를 놓을 만큼 최대의 난공사였던 금강 휴게소에 접어든다. 금강은 이곳을 지날 때에 뱀처럼 구부러지는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길은 예서부터 비포장도로에 접어든다.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700m 강물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진흙 빛으로 흐르고 좌측의 경부고속도로에 차들은 쌩쌩거리며 지나간다. 지금 이 금강은 위쪽으로 위쪽으로 구비쳐 올라가고 있다.
길은 어쩔 수 없이 금강 휴게소로 이어진다. 그래 이 금강 휴게소에서 관동팔경 기행을 마치고 오다가 서울의 강문숙씨와 헤어졌었지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지요. 잉~ 그러고 보면 오래 살아야 한 당개” 채성석씨의 말처럼 우리가 강 길을 따라 걷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뒷길로 해서 휴게소를 들르겠는가. 바람 부는 휴게소 벤치에서 막무가내로 흘러가는 금강 물을 내려다보고 정차해 있는 자동차들을 물끄러미 건네다 본다. 그렇다「소창청기」에서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고 / 시내는 흐르고 돌은 서있고 / 꽃은 새를 맞고 있고 / 골짜기는 초부의 노래에 메아리치니 / 온갖 자연 정경은 고요한데 /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소란하다”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의 팻말을 달고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한 치의 여미도 보이지 않고 자동차들은 서있고 오늘 우리가 도착해야 할 지점까지는 10km 너무 초과했구나 싶지만 가다가 여유 있으면 더 좋지, 휴게소 아래에는 ”우리 길을 돌려 달라. 그때까지 투쟁한다.“라는 프랭카드가 내어 걸리고 금강교 다리 아래에 긴급 시에 건너가기 위해 만들어진 나무판자로 만든 길을 강물을 아래로 보며 걷는다. 머리 위에는 수많은 차들이 지나가고 발아래에는 무섭게 흐르는 강물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끼면서 도스또예프스키가 그의 작품「악령」중 인간의 두려움 즉 공포에 대해 묘사했던 말을 기억해낸다. ”만약에 큰 바위를 천장 위에다 매달아 놓았다고 치자 그 바위는 견고하게 매어져 있기 때문에 떨어질 염려는 없다 그러나 그 아래 내가 서있다고 생각될 때 어쩌겠는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그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그 순간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분명 아래로 내가 떨어질 리는 만무하고 차들이 그 두꺼운 시멘트 바닥을 뚫고 떨어질 수도 없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끄트머리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오금이 저렸던가. 쇠가 많이 나서 쇳봉산 또는 철봉산이라 부르는 철봉산은 높이가 450m에 이르고 그 산자락에 이원면 우산리가 있다.
신정일의 <금강 역사 문화탐사> 중에서
금강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에 흠뻑 취하고 싶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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