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의 개심사와 서산 마애삼존불, 그리고 예산의 남연군묘를 가다.
여름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가는 8월 20(토요일)에 서산 아라메길을 갑니다. 나라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고 알려진 개심사와 백제의 미소인 서산 마애삼존불, 그리고 폐사지 보원사지에서 개심사로 넘어가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해미읍성과 해미향교의 아름다운 나무 숲, 그리고 우리나라 풍수지리상 가장 교과서적인 명당인 예산의 남연군묘와 보덕사를 답사하게 될 이번 여정은 가을의 초입에 느낄 수 있는 풍요로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새벽 네 시 바람 아직 찬 새벽길에서 나는 차창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별빛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어둠이 걷히며 뿌옇게 밝아오는 아침 해의 아름다움에 취하였고 그리고 한 평생의 삶이 동시에 활동사진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 삶이라는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렇듯 먼 곳으로의 그침이 없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길에 어느 날 억겁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한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람들로 인하여 사람들의 삶 자체가 완성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미읍성 바로 근처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는다. 따뜻한 국물이 내 가슴속으로 젖어들고 그 사이 아침햇살은 해미에 가득 내려앉았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 꺼내 마시고 백제의 미소라 일컬어지는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로 향했다. 마애삼존불로 가는 도중에 먼저 만나게 되는 미륵불 1기가 있다. 인근에 묻혀있던 것을 용현리 사람들이 돌탑을 쌓은 후 그 꼭대기에 앉혀 놓았는데 인근 아낙네들의 기원의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미륵불을 지나 길을 재촉하면 서산마애삼존불로 올라가는 들목에 닿는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가는 계절은 아무래도 구월 말이나 시월초가 으뜸이 아닐까 싶다. 온갖 나무들이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의 절정에 우수수 떨어지는 밤들과 도토리를 줍는 재미 역시 빠트릴 수 없는 가을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쓸쓸히 혼자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을 바라보며 조금 올라가면 서산마애삼존불이다. 지금은 비각으로 가려져 옛 모습을 잃었지만 아침 답사 길에 문을 활짝 열어 젖히면 삼존불이 고향집의 어머니처럼 웃음 지으며 반겨 맞는다.
○백제의 미소를 마나러 가는 길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벼랑새김 삼존불상은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거리낌 없이 표현한 작품으로 꼽힌다. 운산면 일대 사람들에겐 고란사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은 1959년에야 발견되어 국보 84호로 지정되었다. 세 부처는 법화경 교리에 의하면 본존인 석가여래입상이 서있고, 좌측에 제화 갈라보살과 우측에 미륵보살이 서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성행했던 신앙에 의하면 석가세존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석가여래불의 옷맵시에서 중국풍을 연상하기도 하지만 그 얼굴의 눈은 크게 뜬 옛날양식의 것이면서도 활짝 웃는 미소는 틀림없는 백제의 미소라 아니할 수 없고 그 미소가 신비한 미소라고 불리는 것은 부처의 표정이 햇빛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양옆의 협시보살들 또한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띤 여자다운 모습이라서 어떤 사람들의 말로는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진 첩 부처라는 장난스런 이야기도 전해 오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그 너그러운 웃음은 고구려의 미소를 백제 화 시킨 한국불상의 독특한 형태로 자리매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산마애 삼존불이나 태안 마애 삼존불 또는 보원사터 등의 불교 유적들이 이 서산일대에 산재해 있는 이유는 6세기 말엽의 백제의 정치사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무렵의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는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게 되고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겨 버린 뒤에는 백제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바다에서 밖에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때 당진과 태안 지역이 중국의 산동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 서산일대가 교역항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로 가는 길이 이곳이었고 또한 중국으로 가는 교역로였으므로 이 길목에다 그들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큰절, 즉 보원사나 개심사 같은 절들과 서산마애삼존불, 태안의 마애삼존불, 또는 화전리의 사면석불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쓸쓸한 폐사지에는 햇살 만 내리쬐고
떠나지 않는 발길을 옮겨 용현계곡으로 보원사(普願寺)터를 찾아간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온 답사 객들이 대체로 놓치고 가는 답사코스가 보원사터이다. 어느 때 세웠으며 누가 만들었고 어느 때 폐사가 되었는지 내력조차 전해오지 않는 보원사는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십찰 중 한곳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사적 361호로 지정된 보원사터에는 보물 103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절 앞에 인접하여 서있으며 감나무아래에는 보물 102호로 지정된 석조가 스님들의 목욕탕 구실을 했을 것이라느니 또는 물을 받아 두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등의 되지 않는 소리들을 귓전에 흘리며 몇 군데가 깨어진 채로 서 있다. 장성한 사람 예닐곱에서 열 명 정도가 들어앉을 것 같은 석조에 몸을 담근 채 가을 햇살에 몸과 마음을 씻은 후 개울을 건넜다.
눈길 지나는 곳곳마다 깨어진 기왓장이 오랜 역사 속의 그 옛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풍경 속에 통일신라시대양식을 가장 잘 이어받았으면서도 백제탑의 전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보원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다. 그 탑 너머로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건립된 법인국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서있다. 김정인이 글을 지었고 한윤이 글을 쓴 법인국사 부도비에는 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계증시, 법인삼존대사비라는 제액이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법인국사 한분의 생애와 화엄종이 강력한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사상적 배경으로서 법인국사가 고려왕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보원사는 찾아 볼 길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폐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들리는 말로는 보원사 주위에 아흔 아홉 개의 절이 있다가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모조리 불이 나서 없어지고 말았다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바람도 없는 가을이나 봄날에는 잘 다듬어진 부도비 옆에 몸을 누이고 한숨 자면서 그 옛날 번창했던 절 이야기를 들음직도 하지만 갈 길이 먼 나그네라서 아쉬움을 머금고 돌아 나왔다.
○임란 때에도 전화를 입지않은 개심사
개심사(開心寺)를 찾아가는 길에 만나는 풍경은 이국적이다. 김종필씨가 조성했던 거대한 삼화목장을 지나 저수지를 돌아가 잊어버리고 산길을 따라가면 개심사입구 주차장에 이fms다. 나라 안에서 소나무 숲이 가장 아름다운 절집 몇 개를 꼽으라면 청도 운문사와 합천 해인사 그 다음이 개심사일 것이다. 세심동이라 쓰여 진 표지 석을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지금의 것이 별로 없고 옛것이 고스란히 남은 듯한 개심사 올라가는 길은 아침이어서 더욱 청량하다. 휘어지고 늘어진 소나무 숲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 만나게 되는 연못의 나무다리를 건너가 돌계단을 오르면 안양루가 보이고 근대의 명필로 이름을 남겼던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예서체로 쓴 상왕산象王山 개심사라는 현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요 근래 들어 건축가들로부터 건물에 비해 글씨가 너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안양루를 돌아 서면 개심사 대웅보전에 눈이 멎는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내려 만들어진 상왕산(307M)의 남쪽 기슭에 세워진 전형적인 산지 가람으로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개원사였으며 고려 충정왕 2년(1350년)에 처능대사가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의 절집은 1941년에 해체 수리 시 발견된 북서명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6년(1475년)불에 탄 것을 중창하였으며 그 뒤 17세기와 18세기에 한차례씩 손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는 우리나라 절집 중에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 때 전화를 입지 않았다. 그러한 연유로 조선시대 고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들이 여러 채 남아 있다. 보물 142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수덕사의 대웅전을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지붕의 맛배지붕으로 우리나라의 건축이 천축식에서 다포집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건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보다 더욱 이 절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있는 건물은 심검당尋劍堂이라고 붙여진 요사 채일 것이다. 대웅보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지고 부엌채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은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마음껏 살린 건물 중 나라 안에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건물이다.
1962에 해체 수리랄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477에 3중창되었고 영조 때 까지 여섯 번이나 중창을 거쳤으며 시주 자들의 이름과 목수였던 박시동(朴時同)이라는 이름까지 들어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건물로 몇 채 안 되는 건물로써 송광사의 하사당, 경북 하양 환성사의 심검당과 함께 초기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안양루의 너른 창문사이로 내다보이는 범종루의 기둥들 또한 휘어 질대로 휘어져서 보는 사람의 눈길을 놀라움으로 가득 채운다. 크지 않으면서도 정신적으로 큰절인 개심사를 두고 “자연의 흐름을 한 치도 거스리지 않으면서 마음껏 멋을 부린 옛 선인들의 지혜로운 마음이 제대로 표현한 절”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는데 보면 볼 수록 아름다운 심검당에 마음을 두고서 소나무 우거진 비탈길을 내려섰다.
○이름이 아름다운 해미읍성
이름이 아름다운 해미(海美)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의 두 현을 태종 7년에 병합하면서 한자씩 따서 지었다고 한다. 당진 쪽에서나 예산 쪽에서 이곳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성이 해미읍성이다. 전라남도의 낙안읍성 전라북도의 고창읍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읍성 중에 제 모습을 거의 제대로 지니고 있는 이 해미읍성은 해미면의 한 가운데 땅 2만여 평에 자리 잡고 있다. 태종 14년에 병마절도사의 병영이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78년이 지난 성종 22년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효종 2년 청주로 병영이 옮기기 전까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이 해미읍성에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장군이 열 달 정도 근무를 했었고, 숙종 때에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을 이곳으로 옮겼었다. 이성을 서거정은 “백마가 힘차게 세류영細柳營에서 우는데 중요한 땅 웅장한 번진藩鎭의 저 절도사가 큰 성을 이루었네, 늦은 가을 하늘 높이 세워진 큰 기의 그림자가 한가롭게 보이고, 진종일 투호投壺하는 소리마저 자세히 들려온다. 아낙네 소라 같은 쪽(螺髺)처럼 떠오르는 산이 둘러싸고 있고, 고래 물결로 동하지 아니하고 바다는 맑고 깨끗하다. 서녘 바람이 얇은 솜옷을 한없이 불어 헤치니, 먼 길손 만리타향의 외로운 정을 견디기 어렵도다.”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해미읍성을 둘러싼 산세와 포만의 맑고 고요한 모습 그리고 규율이 엄격한 군대의 주둔지를 표현한 것이었을 것이다. 둘레가 6630척의 높이가 13척 옹성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었던, 이 성 밖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 싸여 있었다고 한다. 이 해미읍성 안에는 불과 십 몇 년 전만 해도 성안에 행정관서와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 채가 남아 있었다. 성을 수리할 때 성 밖으로 옮겨서 순천의 낙안읍성이 사람이 살고 있음으로 하여 살아있는 성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고창읍성처럼 죽은 성이 되고 말았다. 또한 해미읍성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 때 천주교인 천여 명이 처형되었던 곳이다. 토포사討捕使가 있던 이곳 해미영에 끌려온 천주교인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이 매달려 죽기도 했는데 김대건 신부도 이 나무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신정일의 <사찰기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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