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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의 여행이야기 : 이 준 열사묘 - 북한산 둘레길 걷기 중에 만나다

산중산담 2016. 9. 8. 00:00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이 준 열사묘 - 북한산 둘레길 걷기 중에 만나다

 

답사일 : 2016년 9월 3일 토요일

누구랑 : 광명로얄산악회 산우님들

 

 

이준 열사 묘 위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순국한

애국선열 18위의 합동묘소인 광복군합동묘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대동문 갈림길

 

 

애국선열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묘 지나면

 

 

바로 이준 열사 묘를 만날 수 있다. 위훈비와 홍살문을 지나고

 

 

위훈비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이준열사에 대한 자료가 있어 소개합니다.

이하 자료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2487

 

민영환, 이용익(1854~1907)의 영향으로 항일 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이준 열사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에 가서 일본의 만행을 열강에게 알리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이준은

고질병이었던 뺨 종기가 갑자기 악화되어 그만 헤이그에서 분사(憤死)하고 만 것이다

 

 

 

고종 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려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에 대해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준 열사가 할복했다고 알고 있다.

공공기관인 강북구에서 설치한 안내 표지판에도 이준 열사가 '할복'해서 죽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준 열사는 할복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여행과 망국의 한을 달래지 못하고 병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정표

 

일본 쪽의 검열로 헤이그행의 본말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국내에서는

이준이 만국 대표가 보는 앞에서 할복자살했다는 등의 '영웅 전설'들이 1960년대 초까지 거의 사실(史實)로 인정받았다.

물론 할복자살이 영웅적인 죽음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의 선비들의 명예로운 죽음의 방식이 아닌 일본 사무라이 방식의 자살이라는 사실이다.

 

홍살문으로 올라간다

 

할복자살을 해야만 열사이고 영웅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인간적인 이준 열사에 대해서 만날 수 있다.

이준 열사는 조국이 침략자들에 의해서 찬탈당하는 상황에 대해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랜 여행으로 몸이 쇠약해졌으며,

고질병이 악화되어 머나먼 타국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영웅시하는 역사의 왜곡된 표현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올라가는 길. 열사의 삶을 느끼게 해주는 곧은 길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준열사가 남긴 글들...

 

 

이준(李儁·1859~1907) 열사 묘에 닿는다.

이준 선생은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1907년 7월 14일 숙소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 서쪽 외곽에 있는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시립공동묘역에 묻혔다가 1963년 우리나라로 운구해 지금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자료: 월간 산지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29/2016022902115.html

 

 

 

 

자주평화수호의 상

 

 

 

 

 

 

공로비

 

 

이준 열사 묘

 

 

 

 

 

 

 

 

 

한쪽에 이준 열사를 바라보며 부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다시 내려오면서...

 

 

 

 

              초보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