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 탄신일과 어린이날에 떠나는 아주 특별한 봄 걷기 학교 4박 5일.
석가 탄신일과 어린이날에 떠나는 아주 특별한 봄 걷기 학교 4박 5일.
-봉암사와 청암사, 그리고 통영과 남해 바다-
1박 2일과 4박 5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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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3일 석가탄신일에 떠나는 삼사三寺기행이 석가탄신일에만 산문이 열리는 절인 문경의 봉암사와 나라 안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비구니 사찰 김천의 청암사와 도선국사가 이 절터를 발견하고 사흘 동안 춤을 추었다는 수도암을 찾아갑니다.
삼사三寺기행을 마치고 바로 남해의 보석 같은 섬, 통영의 미륵도와 남해를 답사하는 4박 5일 간의 여정으로 펼쳐집니다.
문학과 역사, 그리고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을 ‘문학文學’ 역사歷史. 철학哲學, 즉 문.사.철, 인문학 답사로 진행될 이번 여정은 아주 특별한 기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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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미륵섬 용화사에서 도솔암을 거쳐 미래사로 이어지는 그림 같은 길을 걷고 달아공원, 장군봉과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답사한 뒤 통영의 동피랑 서피랑을 답사할 것입니다. 박경리, 유치환, 이중섭, 윤이상을 배출한 통영과 서포 김만중, 충무공 이순신, 그리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자취가 남은 섬 남해로 건너가 남해의 아름다운 정경들을 걷고 마지막에는 사천의 다솔사를 걷고 마무리 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5월 2일(화)에 출발하여 6일(토요일)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은 2일과 3일, 즉 1박 2일 삼사기행만 참여하셔도 되고, 연결하여 통영과 남해 사천까지 이어지는 4박 5일간의 여정이 있으니, 참고하셔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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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을 굳게 닫아놓고 일반인의 접근을 스님들이 몽둥이를 들고 지켜낸 이 땅의 마지막 청정도량이자 가장 폐쇄성을 지닌 절이 문경 희양산 봉암사이다. 봉암사는 1982년 조계종 종립선원(특별 수도원)으로 지정되어 참배하러오는 봉암사 신도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사찰 소유림과 법당 4km이내의 경내 지는 어떤 위락시설도 들어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등산로도 이용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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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일반사찰에서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를 각각 3개월을 수행하고 나머지 기간은 해제를 한다. 그러나 봉암사는 해제 기간 없이 계속 참선과 수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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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으로 문경 찻사발 축제 때 산문을 열기도 하지만 봉암사는 사월 초파일, 일 년에 단 하루 산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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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기 전에 나는 수도산의 청암사靑巖寺 와 수도암修道巖을 만나기 위해 여정을 꾸렸지만 그것 역시 사람의 일이라 예정과는 다르다. 단풍이 고운 수도산에서 가야산 자락을 보리라 마음먹었었는데 이미 단풍은 지고 만 뒤라 단풍의 잔해만을 보고 올 듯싶지만 어쩌겠는가. 그 역시 우리 생의 단 한번뿐인 만남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무주 설천리 나제통문을 넘어 경상북도 땅에 접어들었다.
대덕 지나 가리재를 넘어 평촌리에 도착한 것은 10시쯤이었다. 평촌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청암사가는 길과 수도암 가는 길 우리들은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청암사 가는 길을 택한다.
곧바로 절 입구까지 가고자 했던 우리들의 생각은 입산통제라고 쓰여 진 표지판에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날은 차다. 배낭을 꾸리고 입고 온 옷들을 모두 다 껴입는데 그런데 내가 가자고 해서 함께 온 권은정씨는 가을 옷차림새에 신까지 불편한 신발이다.
어쩔 수 없지 내 신발을 빌려줄 수도 없으니..... 청암사 가는 길은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참나무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떨어진 나뭇잎들은 저희들끼리 외롭다.
불영산 청암사라고 쓰여진 일주문을 지닌다. 1686년 가을 청암사에 왔던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 1635~1707)은 이 절에서 한 편의 일기를 썼다.
“저녁을 들고 나서 혜원․승헌 노스님 그리고 효선스님과 함께 쌍계사로 걸어 내려오노라니 양쪽 골짜기 사이로 계곡을 따라 붉게 물든 나뭇잎과 푸른 소나무가 길을 에워싸고 물은 쟁쟁거리며 음악을 들려준다. 고승 두어 분과 소매를 나란히 해 천천히 걸으며 걸음마다 (경치를)즐기니 사뭇 흥취가 깊다”
정시한의 일기 속에서 나오는 쌍계사는 그 당시 청암사를 거느렸던 본사였으나 지금은 증산 면사무소 뒤편에 주춧돌 몇 개와 연꽃 두어 송이를 조각한 비례석만 남은 폐사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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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밟는 발자국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천왕문이 보이고 그 우측에 회당비각과 대운당大雲堂 비각 및 청암사 사적비가 서있다. 화엄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회암 정혜스님의 비각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귀록歸鹿조현명趙顯命이 지었으며 대운당 비각은 청암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직자사의 말사인 청암사는 858년(헌양왕 2)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혜철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조선중기에 의룡율사가 중창하였고 1647년에 화재로 불타버리자 벽암스님이 허정을 내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에 다시 불타자 환우와 대운스님이 20여 년이 지난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년 중에 폐사가 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과 화재를 거듭한 후에 1912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남아있는 절 건물은 대웅전, 육화전, 진영각, 전법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개울 건너에 극락암과 부속암자로는 수도암이 있다.
천왕상이 곱게 그려진 천왕문을 지나면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에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떨어져 흘러간다.
물은 저리도 맑고 그 흐르는 소리 또한 옥구슬을 굴리는 듯 청아한데 문득 고개를 들면 바위벽마다 새겨진 이름들 속에 최송설당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 절 청암사와 관련이 많은 사람이자 최송설당은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다. 그는 영친왕의 생모였던 엄비와 고종의 비호 아래 수많은 재산을 모았고 대운스님과의 인연으로 두 번에 걸쳐 절을 크게 중수할 수 있었다.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서 100여 명의 스님이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는 청암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제를 올리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대웅전 앞마당까지 서있었다.
우물가에는 한 스님이 무말랭이를 널고 있었고 극락암 쪽에서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두 스님이 부지런히 대웅전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삼층석탑 뒤편에 서있는 이 청암사 대웅전에는 협시보살도 없이 부처님 한분이 앉아있는데 이 불상은 1912년 불사를 끝낸 대운스님이 중국 강소성 창주에서 만들어 온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스님들의 소맷자락 스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수도암 가는 길로 접어드는데 아뿔싸 이 길 역시 ‘입산금지入山禁止’라고 쓰여 져 있다. 어떻게 산 아랫길로 해서 돌아갈 수도 없고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입산금지란 표지판을 거꾸로 읽으면 지금 산에 들어가라는 말일 테지 그리고 그 먼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가 수도산의 비경들이 숨어있는 이 골짜기를 오르지 않는다면 수도산에 깃들여 있는 신령들이 얼마나 서운해 할까.? 물론 수도암 가는 길이 이 산길로 가는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가 장뜰 마을에서부터 20여리를 오르고 또 오르면 수도암이 나타날 것이고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지 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수도산 자락의 품안에 안겨서 사람들의 자취가 사라진 길을 걷는 즐거움 또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아닐까?(...)
<신정일의 암자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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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미륵산의 용화사에서 관음암을 지나면 한국전쟁당시 가야총림의 피난처였던 도솔암에 이른다. 이곳에서 근대의 고승인 효봉대선사의 제자인 법정과 일초스님이 머리를 깎은 절이다.
그곳에서 미륵산 정상이 지척이다.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들이 꿈길처럼 보인다. 정상에서 내려가면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이 구도를 했던 미래사에 이르고 삼덕리의 장군봉에서 사량도 일대의 한려수도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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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동쪽에 자리 잡은 남해는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에 “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중략)
이 고을은 하늘 남쪽에 있는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海産의 풍족함과 토산土産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필수必須되는 것이야.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또한 기대할 수 있다.“ 고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도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모든 물산이 풍부해서, 왜구의 침략만만 없다면 사람들이 살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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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로 건너가는 노량바다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진 것은 1598년이었다. 11월 19일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 나아가 손수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려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날 그가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함대 150여 척은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바다 밑에 잠기게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구의 유탄에 맞아 쓰러져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이순신의 나이 쉰 넷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며칠 동안 모셔졌다가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갈 때까지 석 달가량 노량나루(지금의 충렬사)에 가매장되었다. 그때부터 관음포는 “이충무공의 목숨이 이곳에서 떨어졌다” 하여 이락포(李落浦)라고 불렀고 그 뒷산도 이락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이 묻혔던 자리에 빈 봉분을 짓고 충렬사(忠烈祠)를 지었으며, 1973년 사적 233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이곳 남해(南海)는 고려 때부터 유배지로 알려져 왔다. 조선 전기에 안평대군, 한석봉, 양사언과 함께 4대 서예가로 알려진 자암(自菴) 김구(金絿)는 기묘사화로 유배를 와서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남해의 옛이름>을 남겼고 조선 영조때 사람인 유의양(柳義養)은 1년 남짓한 유배기간에 한글로 남해풍물을 묘사한 <남해견문록(南海見聞錄)>을 남겼다 그리고 남해에서 1킬로미터쯤 배를 타고 건너면 닿는 자그마한 섬 노도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사람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상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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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아름다운 시 <남해금산>의 무대인 남해금산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새로운 꿈을 꿀지도 모를 이번 여정에 함께 하실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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