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동해 해파랑길> 그 세 번째 울산 정자동에서 포항 구룡포까지

산중산담 2017. 7. 24. 14:11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그 세 번째 울산 정자동에서 포항 구룡포까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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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연중 계획으로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답사인 해파랑 길 그 두 번째 행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함께 그 길을 걸은 도반들께 감사드립니다. 세 번째 행사가 421일부터 23일까지 넷째 주말에 실시됩니다.

울산을 지나 그 아름다운 읍천리 주상절리와 문무대왕 수중릉, 감은사, 그리고 감포를 지나 구룡포까지 이르게 될 이번 행사에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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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북쪽으로 북정자마일이, 북정자 서쪽으로 조선후기 첨사관의 주둔지는 빈터로 흔적만 남아 있다. 정자동에서 산하교를 지나자 산하리의 몽돌해안이다. 삼바위가 있는 삼음 동쪽으로 묘를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는 특이한 중묘마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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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花岩

산하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화암花岩은 마을 앞에 꽃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강동화암주장절리라고 부른다. 주상절리는 단면이 육각형 내지 삼각형으로 된 긴 기둥 모양의 바위가 겹쳐있는 특이 지질의 하나인데, 이곳 화암마을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2,000만 년 전)에 분출한 현무암 용암(Lava)이 냉각하면서 열수축 작용으로 생성된 냉각절리이다.

그 형상은 길이 7수십m에 이르는 다량의 목재더미가 수평 또는 수직 방향으로 세워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길이가 긴 주상체의 경우 횡단면 대각선 길이가 50정도에 이른다. 그리고 동해안 주상절리 가운데 용암 주상절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기도 하고, 다양한 각도로 형성되어 있어 경관적 가치도 커서 울산광역시 지방문화재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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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에 얽힌 이야기

이제 우리의 발길은 울산광역시의 마지막 마을인 북구 신명동에 이른다. 이 지역은 신라 시대 박제상朴堤上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신라 눌지왕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하나는 고구려에 하나는 일본에 볼모로 붙잡혀 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임금은 지모가 뛰어난 신하 박제상에게 볼모로 잡혀간 동생을 구해오도록 명령하였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로 건너가 고구려 임금과 담판을 지어 임금 동생을 귀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고구려와 달랐다. 일본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박제상은 아내와 두 딸에게 알리지 않고 율포 바닷가인 강동면 구류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그의 아내가 울며불며 율포 백사장으로 달려갔으나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와 딸들은 율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마루(치술령(765.4))에 올라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렸으나, 그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내린 그들은 전설의 새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아내는 치조라는 새가 되고 딸은 술조라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매일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렸다는 경북 경주시 외동읍 내남면과 경상남도의 경계지점에 있는 산마루가 치술령이다. 그리고 모녀가 서서 기다렸다고 알려져있는 망부석이 있다. 그리고 치술조, 새들이 날아가 숨은 바위가 은을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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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재상이 떠나갈 때에 그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좇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만덕사 대문 남쪽 모래밭 위에 이르자 나가 넘어져 목을 길게 놓고 울었으니, 이 때문에 이 모래밭을 장사(長沙. 긴 모래밭)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그의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퍼뜨리고 앉아 일어서지 않으므로 그 땅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부인이 못 견딜 만큼 그 남편을 사모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鴙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다보고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이래서 치술신모鴙述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이곳에는 당집이 있다.”(삼국유사)

뒷날 사람들은 박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라고 부르며, 치술령 기슭에 신모사라는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는데, 매우 영검하기에 장마가 심할 때에는 개이기를 빌고 가뭄이 심할 때에는 무제(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신모사도 <치술령곡>도 전해 오지 않는다.(...)

경상북도 경주에 접어들다

신명천과 지경교를 지나 경북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 지경地境마을에 이르자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지경마을은 경북과 울산시의 경계에 있다하여 붙은 지명이다. 망망한 비취 빛 바다를 바라보며 휘적휘적 걸어가니 관성해수욕장이 보인다.

그 아름다운 읍천리 주상절리가 있는 곳을 지나 월성원전을 지나면 문무대왕 수중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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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길리 문무왕 수중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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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로 어수선한 봉길리 하봉부근 소나무 숲 우거진 길로 들어서 한참을 걸으니 수제 마을이다. 봉길리 북쪽 수제水祭마을은 예부터 가뭄이 들면 경주 부윤이 마을 북쪽 해변에서 기우제를 지냈었다. 수제 동쪽으로 약 100미터 거리 바다에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문무왕 수증릉이 있다. 신라 시대 당시 동해구라고 불렀던 이 일대 바다는 왜구들의 출몰이 잦은 관계로 중요 방어 요새로 여겼었다.

빗속에 서서 거센 바람에 함께 일어나 부서지는 파도를 본다. 사납게 철썩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 빗속에 두 여인이 대왕암이 섬처럼 보이는 곳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릉文武王陵은 사적 제 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댕바우를 동서와 남북으로 깎아서 만든 십자로十字路 중앙에 4편 가량의 돌함이 있고, 그 위에 길이 3.59미터 두께 09센티미터의 거북등 모양의 뚜껑이 덮혀 있다. 그 돌함에 문무왕의 뼈를 묻은 것으로 추정하여 사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한 추정은 문무왕의 유언에 기인한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되어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民生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테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 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좆아라(삼국사기 문무왕 21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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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견은 많다. 조선 정조 때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이계집에 그가 1796년 문무왕릉 비의 파편을 습득하게 된 경위와 문무왕의 화장사실 및 문무왕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 내용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이야기는 후세의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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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정 복원을 발원하노니

만파식적萬波息笛(만파식적은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는 뜻)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나정리 상정上亭마을에 만파정萬波亭.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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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神文王 2(682) 5월 초에 해관海官이 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왕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신문왕이 곧 이견대에 도착하여 동해를 바라보고 산을 살펴보니, 그 모양이 거북머리 같으며, 산 위에 대나무()한 그루가 서 있는데, 낮에는 둘로 갈아졌다가 밤이면 합하므로, 배를 타고 들어가서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다. 그 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 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개며,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지므로, 그 이름을 만파식적이라고 하였다.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하였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만파식적이라고 명명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 뒤 나라에서 만파식적을 얻게 된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따서 만파정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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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나 나정교를 건너자 나정해수욕장과 전촌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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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감포항이다. 감포항은 정어리, 오징어, 미역이 주로 잡히는 경북 굴지의 항구이다. 이곳 감포에서는 3일과 8일이면 감포장이 선다.

바람 때문에 정박한 무수한 배들, 날아오르는 갈매기 떼,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이 그물손질을 하는데 그 머리 위로 갈매기들의 꺄륵 꺄륵 울음소리가 창공을 가른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부산한 손놀림 너머로 멀리에서 뱃고동 울리며 들어오는 배들, 부산스럽고 활기찬 풍경의 감포항을 벗어나 오류리로 넘어가는 길은 참으로 한적하다. 감포등대와 감포 북등대를 바라보며 오류리 송대끝마을로 접어든다. 이곳 오류리에 감포영甘浦營 터가 있었다. 조선 중종 7년인 1512년에 둘레 736자에 높이 13자인 석성을 쌓아 영을 설치하고 수군 만호 1명과 수군 628명을 두었다. 그 뒤에 영을 동래東來로 옮기며 성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지금은 감포영성 안에 있던 감포영터마저 밭으로 공동묘지로 변모되었고, 감포영성터의 해자가 있었다는 횆채 밭도 형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조숫골, 예전에 조숫물이 드나들었던 곳이었음을 알리는 지명이다. 그 동남쪽 척사리尺紗里 마을 뒤에 해망제(해망현)라는 산이 있다. 조선 시대에 산에 망대를 쌓고, 그 위에 올라 동해바다를 살펴 왜적의 침입여부를 망보았다고 한다.

?サ?동쪽으로 영검하다는 비리바위가 있어, 뱃사람들이 바다로 나가기 전 반드시 이곳에 와서 무사히 다녀올 수 있기를 빌었다고 한다.

연동 서남쪽으로 거대한 크기의 태바우, 마고할미가 아이를 낳다 손을 짚어 생겼다는 손자국이 있었는데 감포항 축항을 하며 그 바위를 깨뜨려 축대를 쌓았다고 한다. 이제는 흔적만 조금 남아 있다. 우리 땅을 걷다보면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애석함에 가슴 한 켠이 시리다. 그래도 우리 여정은 경주를 벗어나 포항으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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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현의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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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동헌이 바다를 누르고 산성山城에 의지해 있는데, 피곤한 나그네 난간에 기대서니, 눈앞이 문득 밝아지누나. 비 개자 맑은 아지랑이 북악北嶽에 비껴 있고, 구름 걷자 아침 해가 동해에 섰네.” 홍일동洪逸童이 시로 노래했던 장기의 일출 풍경, 오늘도 그 풍광에 많은 나그네들이 매혹된다. 길게 말갈기처럼 생긴 지형 때문에 붙은 지명, 장기현!

장기, 시대의 논객을 품어준 땅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장기에는 유배객들이 많았다. <조선왕조실록>3천 번 이상 거명되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다산 정약용 등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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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1674년 현종 사후, 효종 모후인 조대비의 복상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예송논쟁을 벌이다 덕원에 유배된다. 그리고 숙종 원년(1675)에 장기로 이배移配되는데, <송자대전>의 기록을 보면 을묘년 윤 610일 영일 형산강을 건너 장기에 들어와 그 때부터 1679년 거제로 이배되기까지 다섯 해 동안 오도전吳道全의 집에 거주하며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견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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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왔었던 장기를 답사할 이번 여정이 도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