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옛 사람을 찾아서 부안에 가며

산중산담 2017. 7. 24. 14:24

 

옛 사람을 찾아서 부안에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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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늦은 밤에 돌아와 이 아침에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오늘의 여정은 부안이다. 독서 기행으로 찾아가는 그곳, 내 젊은 날의 아픈 추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부안에 자취를 남긴 사람이 허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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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6월에 허균은 호남 지방의 전운 판관轉運 判官(삼창의 양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직책)이 되자 7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전라도 전주로 내려갔다.

이때 부안의 기생인 계생桂生(이매창)을 만났는데 그때의 상황이 <성소부부고>조관기행漕官紀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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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78일 정유丁酉에 벼슬을 내어놓고 아침 동작나루를 건너다.....비가 쏟아져서 그곳에서 머물렀다. 생원 고홍달이 찾아왔으며, 기생 계생과 만났는데, 그녀는 이옥녀李玉女의 정인情人이다. 계생이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시를 읊고 했는데 인물은 비록 뛰어나지 않았지만 재주가 있고 정이 많은 여인이어서 가히 종일토록 더불어 시와 노래를 주고받으며 즐길 수가 있었다. 저녁에는 그녀의 조카를 내 침소에 들게 하고 그녀는 슬쩍 나 피해버리더라고 기록하였다.

이매창이 허균과 함께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에게는 촌은 유희경劉希慶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균의 <설부>에 유희경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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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시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의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 임억령林億齡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 사람이 써 놓은 자 운에 하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라 하니, 양송천梁松川(양응정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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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창기 계생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 그 태수가 떠난 뒤에 읍인 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새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란 자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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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락 요금瑤琴은 자고새를 원망하나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현산峴山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佳人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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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고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과 함께 지냈던 까닭에 시를 할 줄 알았다. 다른 작품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 권필이 그를 칭찬하고 좋아하였다.“

<성소부부고> ‘설부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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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기유년己酉年 1월에 계랑 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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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는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타며 산자고山鷓鴣를 읊었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윤비尹碑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거사비去思碑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그것은 아가씨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은 참선參禪은 하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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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유년 9월에는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그 자신을 말함)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걸세.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되었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와서야 풍류객 진회해秦淮海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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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균은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 라는 시 한편을 지었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난느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그 수를 지어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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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 세상에 귀양 왔고,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

비취색 치마에 향내만 남았구려.

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

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

처절한 반첩호班婕好의 부채라,

비량한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로세.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

한 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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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부안 일대를 거닐며 나는 또 어떤 역사의 이야기들을 들추어 낼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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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10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