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그 네 번째 포항 구룡포에서 포항 청하까지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
-그 네 번째 포항 구룡포에서 포항 청하까지
2017년에 연중 계획으로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답사인 해파랑 길 그 세 번째 행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함께 그 길을 걸은 도반들께 감사드립니다. 네 번째 행사가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넷째 주말에 실시됩니다.
포항 구룡포에서부터 호미곶을 지나고 포항 포스코를 지나 청하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구룡포 전설
구룡포 읍내에서 찾은 산나물 밀수제비 집, 시장 한복판 초라한 건물 안에서 28년 동안 장사를 해왔다는 68세의 이미자 할머니를 만난다. 열두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만 문을 연다는 그 가게 안에 들어서자 바로 눈길을 끄는 것은 신들린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국수를 써는 할머니의 칼질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신기해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몇 십년동안 이 나라 곳곳을 걸어서 답사를 해온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정도 걸었으면 철로 만든 다리처럼 단련이 되어 걷기 때문에 아프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도 매일 다리가 아프다. 그래서 휴식 시간마다 여기 저기서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일행들에게 나도 옷을 걷어 보이며 ’나도 다리가 아프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아프다.
경북 동해안의 큰 포구로 자리 잡은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구룡포라는 지명에는 전설이 있다. 신라 진흥왕 시절 어느 늦은 봄 각 마을을 순시하던 장기현령이 지금의 용주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며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하늘을 향해 올랐다. 그런데 승천하던 10마리 가운데 한 마리 용이 그만 바다로 추락하면서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폭풍우가 그쳤다. 그 때부터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한 그 포구를 구룡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전설은 용두산 아래에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안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바다로 빠져 나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고, 또 이 소의 지형이 아홉 마리의 용을 닮았다고 해서 구룡포리라고도 한다.
구룡포항은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쌓아 만들어졌다. 정어리. 오징어. 도미가 주요 어종인 이곳에는 일제 시대에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던 일본식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구룡포에서 가장 큰 마을 창주리滄主里는 조선시대에 소금을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다. 중앙리 동쪽으로 사리끝 마을이 있는데, 그 지명은 동쪽 바닷가 벼랑의 바위 끝이 숨어 있다하여 붙여진 것인데, 일본인들은 사리끝 바위를 용의 구슬에 비유하여 용주龍珠리라고 하였다.
구룡포리와 눌태리. 삼정리에 걸쳐 높이 159미터인 매암산이 있는데, 이 산에 높이 약 30미터쯤 되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한 모습 큰 바위가 있다. 옛날에 이곳까지 바다를 이루었기에 바위에 미역 줄기가 붙어 있었다고 하여 미역바우, 박바우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이 미역 바위 아래에 만인萬人이 살 만한 공간이 있다고 전해져,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많은 사람들이 남자는 등짐을 짊어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男負女戴) 이곳으로 찾아들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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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곶등대, 일본인들이 토끼 꼬리라고 명명하기도 했던, 일명 호미곶이다.
우리나라 형세에 대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지세를 노인형(老人形)이고, 해좌 사향(亥坐巳向)이어서 서쪽으로 향한 얼굴이 중국에게 절을 하는 형상이므로 예로부터 중국과 친하고 가까이 지냈다.”
이러한 조선시대 사대부에 팽배했던 생각을 읽었음인지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는 조선의 형세를 두고 ‘토끼꼬리 형국론(形局論)‘을 펼치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이태리는 외형이 장화(長靴와 같고 조선은 토끼가 서 있는 것과 같다. 전라도는 뒷다리에, 충청도는 앞다리에, 황해도에서 평안도는 머리에, 함경도는 어울리지 않게 큰 귀에, 강원도에서 경상도는 어깨와 등에 각각 해당된다. 조선인들은 자기나라의 외형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支那)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 게 마땅한 일이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 같은 생각은 지식인 계급인 사대부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러한 고토 분지로의 설명을 한민족의 열등성을 강변하기 위한 일본인의 술수라고 파악한 최남선은 우리나라의 모양을 ‘호랑이’라고 표현하며, 잡지〈소년少年〉 창간호「봉길이 지리공부」라는 난에 글을 실었다.
“한반도는 마치 맹호가 발을 들고 동아 대륙을 향하여 나는 듯 뛰는 듯 생기 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는데, 더욱이 그 모양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또한 심장하여 한반도의 진취적이면서도 무한한 팽창 발전과 아울러 생생하고 왕성한 원기의 무량한 것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 소년들은 굳고 단단하게 마음을 가지라” 라는 글을 실어 우리나라 지세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는데 이곳을 ‘범의 꼬리‘ 즉 호미등이라고 맨 처음으로 불렀던 사람은 조선시대의 이인이라고 불리는 남사고였다.
조선 중엽에 그려진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 :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품)를 보면 우리 국토가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가 대륙을 향해 뛰어나갈 듯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호랑이의 꼬리 부분이 경북 영일군 구룡포읍 대보리로, 예로부터 호미등(虎尾嶝) 또는 호미곶으로 알려진 곳이다.
일명 동외곶冬外串 또는 장기갑長기甲이라고도 부르는 경북 포항시 대보면 대보리에 있는 장기곶은 서쪽은 영일만에 동쪽은 동해에 접하고 있는, 포항시 남동부에서 북동방향으로 돌출한 반도이다. 해안은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서 구룡포에 이르는 해안으로 해안단구가 발달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고, 대보리 구만리 등으로 포구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 등대를 장기곶 또는 장기갑 등대라고 부르는데,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일찍 해가 뜨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 등대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02년이었다. 고종 광무 5년인 1901년에 일본장기 상선학교 실습반 30여명이 응웅환鷹雄丸을 타고 동해 연안의 어족과 수심을 조사하던 중에 이곳암초에 걸려서 전원이 익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이 조선정부에 요청하여 그 이듬해인 1902년 3월에 일본인 기술자를 통해 착공하였고 1903년 12월에 준공하였다. 그러자 당시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호미등虎尾嶝에 불이 켜지면 범이 꼬리를 흔들어 등대를 넘어뜨릴 것이고, 그러면 주변이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여 이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곳 호미등에 일본인 등대수가 배치되고 두어 달 만에 밤중에 괴한이 침입하여 등대수와 가족을 몰살시킨 사건도 발생하였다.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호미등에 불을 켠 것에 대한 천벌이 내린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연이 있는 장기곶은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 그리고 한말 개혁사상가였던 김옥균도 그 자취를 남겼다. 김정호는 동해로 뻗친 장기곶과 울진군에 있던 죽변곶을 두고 어느 곳이 더 많이 돌출되어 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죽변과 장기를 일곱 차례나 오고갔다고 한다. 그렇게 조사하여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면 장기곶이 더 많이 돌출되어 있다. (...)
영일만 친구, 노래의 고장
포항제철과 망망하게 펼쳐진 영일만을 바라보며 걷는 발길은 맑은 햇살만큼이나 가볍다. 송이와 물개, 방어, 연어, 전복, 넙치, 대구, 홍합, 도루묵(銀口魚). 청어, 김, 미역, 일명 부채 조개라고 불리는 가리비가 지역특산물로 산출되고, 운제산에서 좋은 숫돌이 생산되었던 지역, 영일에 들어서니 최백호가 부른 대중가요 <영일만 친구>가 입안에서 저절로 흘러 나온다
바닷가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 이란다
갈매기 나래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 까지 달려 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
포항제철 : 1970년대 중공업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
포항 지역사에서 크게 획을 그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형산강을 끼고 포항 남쪽으로 자리 잡아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장장 11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공된 포항종합제철 건설이다. 이제는 포스코로 개명되어 세계 제일의 철강회사로 명성을 누리며 기계. 금속. 선박. 자동차. 건설 같은 굵직한 산업의 기초 소재를 공급하는 기간산업을 이루고 있다. 1968년 당시 정부가 포항종합제철을 백만 톤 이상의 생산력을 갖춘 제철소로 건설하겠다고 했을 때, 나라밖 돈줄들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며 외면했었다. 기술, 자본, 경험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악조건을 딛고 세계적인 제철소를 이룬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포스코에 근무하는 유재훈선생의 죽마고우인 김승현 기장 덕택에 우리 일행은 건물 2층 VIP룸에서 포스코 견학이라는 예정에 없던 선물 같은 시간을 누렸다. 물과 불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철근이 되는, 빨간 두부가 식으며 철이 되는, 그러나 그곳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즐비한 생산라인만이 질서 있게 가동되어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공정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곳에서 점심 대접까지 누리고 송도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포항제철이 들어서며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도 크지만, 지역 형산강은 범람도 함께 일어나 송도해수욕장은 그 빛을 잃어가고, 그 맛이 뛰어나 일본으로 수출까지 되었던 영일만 방어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포항제철 건설로 사라진 것들
현재 포스코가 자리 잡은 곳에 대송정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역, 대송역大松驛이 있었다. “대송정大松亭은 현의 동쪽으로 7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동에 큰 바다를 베개로 하고 백사장이 있는데, 푸른 소나무 수백그루가 그 사장을 덮는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동쪽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소나무를 많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그 숲 앞에 흰 모래밭이 있으니 경관 좋은 해수욕장을 이루었으리라. 하지만 공업단지 조성으로 그 풍광은 사라졌고, 동촌 남쪽으로 부련사浮蓮寺라는 절집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리고 포스코가 들어서 있는 포항시 남구 송내동 주진注津리. 그곳에 조선시대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주진원注津院이 있었으나, 그 역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칠포리, 그곳 노변에 칠포 바위그림이 있다.
포항시 흥해읍 칠포리 암각화(바위그림. 岩刻畵), 1989년 11월에 해발 176m의 곤륜산 동북쪽 골짜기에서 발견되었다. 지역에서 고대문화연구활동을 하는 포철고문화연구회에서 바위그림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사활동을 통해 더 많은 암각화를 발견해 나갔다. 그 결과 행정구역상 칠포 1리와 2리를 가로지르는 소동천 남쪽으로 쌍두들, 농발재, 신흥리(新興里) 오줌바위 일대와 곤륜산 일대에 걸쳐 전체 5개소에 총 11종의 바위그림이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곤륜산은 바다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주위와는 독립되어 있는 별봉이고, 산 남쪽은 바다로 유입되는 곡강천이 흐르고 있다. 바다로 트여 있는 큰 골짜기와 연결된 작은 골짜기 곳곳에 주변 산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그림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그 바위그림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추상화된 가면 혹은 사람 얼굴이라는 설’도 있고 철기 시대의 방패를 상징하는 ’방패문 암각화‘라는 견해가 있는가하면 돌칼의 손잡이에서 유래한 ’검파형 암각화‘라는 설 등 다양한 이론이 있으나 정작 칠포 그림을 발견한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보인다. 그들은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풍요, 재생, 다산의 이미지를 여성에게서 보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 여성상을 간직한 땅 ‘대지의 어머니에 대한 신앙과 숭배의 관념을 가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많은 가설들 가운데 그래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내용은 칠포 바위그림이 고인돌에서 발견된다는 점에 비추어보아 이 일대에 고인돌을 조성한 주민과 바위그림을 제작한 집단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신정일의 <동해바닷가 길을 걷다.> 에서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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