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이 아름다운 거창의 수승대와 금원산 자락을 걷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017년 5월 셋째 주 토요일인 20일 산 좋고 물 맑은 고을 경남 거창으로 갑니다. 조선시대 안의 고을이었다가 1914년에 거창군에 편입된 거창군 위천면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문화유산들이 즐비합니다.
동계정온 선생의 고택이 있는 강천리와 아름답기로 소문난 수승대, 그리고 거청신씨의 집성촌인 황산마을과 아름다운 나무숲과 금원산 자락에 잘 잡은 가섭암터등이 우리가 가야 할 곳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위천면에 있는 동계 정온의 옛집
덕유산 동남쪽에 있는 안음현(安陰縣)은 지금의 거창과 함양지방에 있었던 현이나 영조 4년인 1728년에 정희량(鄭希亮)이 변란을 일으키자 그 땅을 갈라서 함양과 거창에 편입시켰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고향으로, 지금의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강동마을에 정온 고택이 있고 종부가 그 집을 지키고 있다.
정온은 벼슬이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10여 년 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정온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는데, 인조가 항복하려고 성에서 내려가자 스스로 칼로 배를 찔러 죽으려 했다. 정온의 아들이 창자를 배에 넣고 꿰매었더니 오랜 후에 깨어났다고 한다. 정온은 전쟁이 끝나고 청나라 군사가 돌아가자 곧 시골로 돌아가서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의 4대 후손이 바로 정희량이다. 안음에 거주하다 순흥으로 이사를 간 그는 1728년 이인좌․박필현(朴弼顯) 등과 함께 공모하였다. 영조가 임금에 오른 뒤 벼슬에서 물러난 소론일파의 호응을 받아 이인좌를 원수로 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 청주를 습격하였는데, 한때 안음․거창․합천․삼가 등의 고을을 제압하였으나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패배하였다. 그 뒤 정희량은 거창에서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이로 인해 안음현은 폐현되었고 이 지역 사람들의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 ?동국여지승람? ‘안음현’조에는 “억세고 사나우며 다투고 싸움하기를 좋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함양군 사람들이 흔히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산 사람 열을 당 한다”라는 말이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 말은 그만큼 이곳의 사람들이 기질이 세다는 말이다.
이중환이 “안음 동쪽은 거창이고 남쪽은 함양이며 안음은 지리산 북쪽에 있는데, 네 고을은 모두 땅이 기름지다. 함양은 더구나 산수굴(山水窟)이라 부르며, 거창․안음과 함께 이름난 고을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안음만은 음침하여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당시는 안의현이었다가 현재는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로 행정구역이 바뀐 강동마을에 정온의 고택이 있고 팔십이 넘은 종부가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종부에게 들은 바로 정희량의 난 이후 정국에서 소외받은 그들은 같은 파벌끼리 혼사를 맺어 그 맥을 이어갔는데, 현재 정온의 종부는 경주에서 13대 만석꾼으로 이름난 최부자집의 큰 딸이고, 하회 유성룡의 종부는 둘째 딸이며 정온댁 종부의 시고모는 해남 윤선도 집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요즘 재벌이나 정관계의 고위 인사들이 서로 얽히고 얽힌 혼맥을 보는 듯 했지만 혼맥을 통해서 파벌의 끈을 그렇게 이어갔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옛 시절 안음현이었던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수승대(搜勝臺)가 있다.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조촐한 정자와 누대가 있으며 듬직한 바위들이 들어서 있는 수승대는 거창 사람들의 소풍이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는 곳으로, 이곳에 서린 이야기들이 많다.
거창군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백제와 맞붙은 신라의 변방이었기 때문에 항상 영토 다툼의 전초기지였다. 그래서 백제가 세력을 확장했을 때는 백제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는데, 거창이 백제의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는 달리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 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이 자주 오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에 약소국이 느끼는 설움은 깊고도 깊어 신라로 간 백제의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은 예사요,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으로, 근심[愁]으로 사신을 떠나보냈다.[送]하여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넓게 생각해 본다면 절의 뒷간이 ‘해우소(解憂所)’, 즉 근심을 푼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수송대가 지니고 있는 본디 뜻이었을 것이고,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백제의 옛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민중들이 안타깝고 한스러운 백제의 역사를 각색해 입에서 입으로 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송대에서 지금처럼 수승대로 바뀐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이다.
거창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 중에 거창 신씨(居昌愼氏)가 있으며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사람이 요수(樂水) 신권(愼權)이다. 그는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하고 이곳에 은거한 채 학문에만 힘을 썼다. 수송대 앞의 냇가에 있는 거북을 닮은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 짓고 그 위에 단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암구대 옆 물가에는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이곳을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냇물 건너편 언덕에는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지금 남은 요수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80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어느 날 자연 속에 살던 그에게 반가운 기별이 왔는데, 아랫마을인 영송마을(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에서 이튿날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인 이황이 찾아오겠다는 전갈이었다. 1543년 아직 이른 봄날, 정갈히 치운 요수정에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고 마냥 기다리던 요수를 찾은 것은 퇴계가 아니라 그가 보낸 시 한 통이었다. 급한 왕명으로 서둘러 서울로 가게 된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고 떠났다.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 시를 받아든 신권은 다음과 같은 화답을 보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는 만남보다도 더 정에 겨웠다. 이황은 수송대라는 이름의 연원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수승대’라는 새 이름을 지은 것이며, 그때부터 이곳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위천 일대의 문화유산과 금원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자 하는 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창으로 가서 봄날을 노래하며 고창의 문화유산에 취하다. (0) | 2017.07.24 |
---|---|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 - 포항 구룡포에서 포항 청하까지 (0) | 2017.07.24 |
옛 사람을 찾아서 부안에 가며 (0) | 2017.07.24 |
완연한 봄날에 울진 십이령 1,3구간을 걷는다. (0) | 2017.07.24 |
그 아름다운 거창 위천 변의 수승대와 안의 고을의 역사 (0) | 2017.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