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그 첫 번 째 태백 황지에서 봉화군 분천까지

산중산담 2018. 4. 26. 20:33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그 첫 번 째 태백 황지에서 봉화군 분천까지.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2018년의 정기기행 그 첫 번째 일정이 20182월 넷째 주인 223()일에서 25()일까지 23일간에 걸쳐 실시됩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천의봉 너덜샘과 나라 안에서 제일 높은 역인 추전 역을 답사하고, 역사 속에서 상징적인 발원지인 태백의 황지에서부터 봉화, 석포역을 지나, 하늘 아래 가장 오지라고 일컬어지는 승부역,을 지나 분천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지나는 길목마다 수많은 역사유산과 문화유적들이 즐비한 낙동강을 한 발 한 발 걸으며 사람의 일생과 비슷한 강길을 걸으며 인생을 되돌아 볼 낙동강의 여정에 도반이 되어 주십시오.

흔들리며 홀로 떠난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를 지은 사무엘 헬링턴의 말처럼 문명의 충돌인가 아니면 그냥 테러일 뿐인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911일 발생한 미국의 자살테러사건 때문인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어째서 혹은 왜? 라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사라져 간 그 사건이 나를 이토록 서성거리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적은 어디에나 있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적과 보이지 않는 동지의 틈바구니에서 내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허둥대고만 있는 내가 이렇듯 홀로 떠나도 되는가? 흔들리는 내 마음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열차는 정시에 떠난다.

서울의 불빛들이 내 눈을 스쳐지나가고 덕소 지나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능내에 이른다. 양평, 양동을 지난 열차가 원주에 도착한 시간은 12, 밤 기차는 내 어린 날의 기억에서처럼 아직도 춥다. 나는 배낭에서 윗옷을 꺼내 입고 그 사이 내 옆에 자리잡았던 젊은이는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춥다 이때쯤이면 에어컨을 껐으면 좋으련만 아무도 꺼달라말하지 않은 채 움츠리고만 있다. 혹시라도 에어컨을 껐을 때 누군가가 왜 이렇게 더워하고 소리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일 것이다.

승무원들이 가끔씩 통로를 지나가고 홍익회 사람들이 손수레에다 계란과 캔맥주 그리고 몇가지의 과자들과 주간지를 꽃은 채 이따금 오고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30여년 전 저편의 세월 속에서 몸을 실었던 서울행 완행열차를 떠올려본다. 임실에서 서울까지 예닐곱시간이 걸리던 시절 세 개 씩 망에 씌워 팔던 계란이며 감귤들 그리고 한 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소주병을 든채 서성이던 모습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로 스며드는 것은 새벽 두세시 넘어 천안, 수원을 지날 때였을 것이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열차는 곧이어 고한 역에 도착하겠습니다 고한역에 내리실 손님께서는 잊어버린 물건 없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문득 안내방송이 들리고 기차는 고한 역에 도착한다. 그래 이제 멀지 않았다.

우리 열차는 6분 후에 태백역에 도착하겠습니다. 태백역에 도착하실 분은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문을 열고 나서자 비를 몰아오는 새벽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마중을 나온 사람 속에 혹시나 하고 두리번거리지만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서둘러 돌아가고 아무도 내게 아는척 하지 않았다. 금세 나만 남는다. 나는 한참을 헤매다 불켜진 여관을 찾았고 따스한 이불 속에 들어간 시간은 345분이었다.

눈을 뜬다. 550분 어둠이 가시지 않은 태백의 여관방 창문을 연다.

(...)

아침 일을 마치고 들어온 택시기사에게 아침을 먹으며 태백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장성 일대가 광산촌이 시작된 건 1933년부터라고 해요 그 전만 해도 이곳은 손바닥만한 밭에다 콩이나 옥수수를 심고서 살았던 화전민 촌이었지요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이곳 태백은 숯검댕이로 변했지요. 이 근처에 크고 작은 광산이 마흔다섯개가 있었고 황지, 장성을 합해 시로 만든 81년에 태백인구가 13만명쯤이 되었다고 해요. 유흥업소가 5백여 곳이 넘었을 정도로 흥청거렸는데 그 좋았던 시절이 한 10년이나 갔는가. 지금 남아있는 광업소가 장성광업소, 태백광업소, 통보광업소 세곳 뿐이고 인구도 전체 통틀어 6만명이나 되는가. 하여간 옛날은 좋았지요 공무원들 넉달 월급 합쳐야 광산 근로자 한달 월급도 안되었어요. 길 가던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어요.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그 좋았던 탄광이 석유를 많이 쓰게 되면서 막을 내리고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태백경기가 한동안 힘들었지요 그래서 만든 게 정선 카지노 아녜요석탄을 많이 캐내던 그 시절에는 황지천 물이 온통 새카맣게 흘렀지만 지금 황지천 물 괜찮아요. 고기도 얼마나 많이 사는데 그리고 태백은 여름에 모기가 없어요 아무리 한 여름이라도 모기 한 마리 구경을 할 수가 없어요. 특히 이곳은 고랭지 채소가 전국의 60%가 나와요. 그러나 물이 예전보다 좋아졌다는 말이 사실이지만 태백사람들이 마시는 물이 황지의 물은 아니다. 백두대간 너머 한강의 발원지에서 흘러내린 광동댐 물을 끌어다 먹고 있는 실정이다. 태백의 어제와 오늘을 듣는 순간에도 비는 그침이 없이 내리고 나는 지금 태백의 황지로 가고 있다.

태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黃池<신증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 ’산천 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부 서쪽 110리에 있다. 그 물이 남쪽으로 30리를 흘러,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천천穿川이라 한다. 곧 경상도 낙동강의 원류이다. 관에서 제전祭田을 두어서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의 유래가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옛날에 이곳에 황씨라는 인색하기로 소문난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이었다. 마굿간을 쳐내고 있는 황씨 집에 중이 와서 시주를 청하자 황부자가 곡식은 주지 않고 쇠똥을 던져 주었다. 그러한 처사를 민망하게 여긴 황씨의 며느리가 시아버지 모르게 쌀 한 되를 중에게 주면서 사과를 하자 그 중이 시아버지 모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집이 곧 망할 서이니 그대는 나를 따라 오라.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자 마라.”

그 말을 들은 며느리가 아이를 업은 채 중을 따라서 구사리 산 정상 무렵까지 왔는데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면서 천지가 진동하였다. 놀란 며느리가 중의 당부를 잊은 채 뒤를 돌아보니 그가 살았던 집이 못으로 변해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중의 당부를 어긴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아기를 업은 채 돌부처가 되고 말았다.

그 여인은 슬픔에 젖어 돌이 되었다.” 오비디우스의 글이 사실로 화한 것이다.

(...)

구무소는 동점 남서쪽 굴 밑에 있는 소로서 황지(黃池)에서 나오는 낙동강(洛東江) 상류에서 흐르는 물이 폭포가 되어 흐르면서 조그마한 산을 뚫고 흐르는데, 이 뚫어진 구멍 밑에 연못이 있으므로 구무소, 또는 뚜루내 천천(穿川)이라고 부른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옛날 경북(慶北) 안동(安東)의 영호정(映湖亭)을 지을 때, 그 대들보 감을 화전리(禾田里)에서 베어 황지의 냇물에 띄워 나르는 데, 홍수가 일어서 대들보 감이 산의 벼랑에 부딪혀 큰 벼락소리가 나면서 벼랑이 뚫어지고 물이 그 아래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무소는 석회동굴로 315000만 년전 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랜 시간 동안 주변의 물이 석회암을 녹여 마침내 산을 뚫는 희귀 지형이 된 것이다.

(...)

‘1995년도 범죄없는 마을 봉화군 승부리그래 사람이 많은 곳에서 범죄도 일어나지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무슨 범죄가 일어나랴. 지도를 보면 아무래도 앞길이 순탄하지는 않을 듯 싶다. 쓸데 없는 걱정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라고 어니 젤린스키가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얘기한 것처럼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날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실로 나타날 지도 모른다. 길가의 집에 들어가 심규현(62)씨를 만나 승부역을 지나서 강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묻자 가능하지 않을 것이란다. 돌아가는 것이 좋고 그렇잖으면 산길 18km를 몇시간이고 넘어가야 한다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며 또 하나 방법은 밤 8시 넘어 열차가 남아있으니 그 열차를 타고 가란다. 막막하다.

(...)

드디어 터널 앞에 다다랐다.

한발 한발 천천히 걸어가자 그러나 웬 걸 50m쯤 들어갔을까. 코앞도 보이지 않는다. 땀이 비오 듯 흐르고 불현 듯 무서움이 밀려온다. 갈 수 있을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캄캄한 어둠 오직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는 막막한 확신 하나로 나는 한발 한발 내딛을 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움직임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정지된 세계로 나는 들어온 것이다.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철커덕 소리 들리고 나는 화들짝 놀랜다. 알고 보니 자동카메라가 닫히는 소리다. 정신 바짝 차리자 한발 한발 떼어놓는데 그 넓은 좌우측의 철길이 왜 그렇듯 양쪽 발에 차이는지, 이러다가 넘어지거나 쓰러져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끝장이다.

(...)날이 어두워지며 길이 나타나고 그 길 위로 바람이 분다. “달이 지자 강변길에 어둠이 갈리고 언덕 따라 가다보니 삼경이 다 되었네, 인가가 가까운지 숲속 저만치에 개 짖는 소리 들리네” ‘주밀밤길이라는 시를 떠올리며 어둠 속에 희미한 길을 한 시간 반 남짓 걸었을까 멀리 불빛이 보이고 분천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50분이었다. “한밤에도 소리 내며 개울은 제 혼자 /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가, 역사가 발을 멈추고 네 걸음걸이가 춤이 될 때까지

그렇다. 김춘수 시인이8번 비가悲歌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세상이 끝나거나 내 걸음걸음이 사뿐사뿐 신선처럼 걸어가는 그 날까지나 아니면 내가 지치고 지쳐 걷지도 못하면서 지난날들을 회상할 때 까지도 강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천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동해 여인숙에 여장을 풀었다. 그래 나그네가 묵어가는 곳여인숙에서 나는 하룻밤을 지 샐 것이다. 요금 만원 우리나라 어딘들 이보다 값이 싼 여인숙이 있으랴, 나는 불을 꼭 넣어달라는 말을 건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도 없는 다리를 이끌며 겨우 씻고서 자리에 누운 시간은 밤 830분 발바닥에서부터 목까지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다.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아픔에 시달렸던가... 새벽녘에야 보일러가 들어오고 방이 따뜻해지면서 나는 겨우 한숨을 잘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