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그 열 한 번째 속초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2017년의 정기기행 그 열 한 번째 마지막 기행이12월 셋째 주인 12월 15(금)일에서 17(일)일까지 2박 3일간에 걸쳐 실시됩니다.
속초에서 관동팔경의 한 곳인 간성의 청간정을 지나 거진과 화진포를 거쳐 통일전망대까지 걷게 될 이번 여정은 해파랑길의 마지막 여정이자 2018년에 정기기행으로 걷게 될 낙동강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된 해파랑길의 마지막 여정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지난 일 년의 일정을 회고하며 새롭게 출발할 낙동강의 여정에 도반이 되어 주십시오.
“속초시 청호변에 자리 잡은 청호동이다. 청초호는 둘레가 5km에 이르는 규모에 술 단지모양을 하고 있는 큰 호수이다. 호수 어귀가 동해 바다에 잇대어 있어 조선시대 수군 만호영을 두었던 곳으로 병선을 정박하기도 하였다. 이중환은 낙산사 대신 경치가 빼어난 이곳을 관동팔경으로 꼽기도 하였다. 겨울이 되면 호수가 얼어붙는데, 얼음이 마치 갈아 놓은 논두렁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을 용갈이 또는 ?陸ㅐ繭? 부르며 얼음이 어는 형상을 보고 다음 해 길흉까지 예측해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초호는 500톤 급 선박들이 자유롭게 입출항 할 수 있는 내항으로 태풍 혹은 해일이 닥칠 때면 어선들이 대피하는 정박지로도 이용되고 있다.
속초에는 청초호 이외에도 36만평 면적에 둘레가 7.8킬로미터, 수심 8.5미터에 이르는 석호, 영랑호가 있다. ‘영랑호는 군 남쪽 55리에 있다. 주위가 30여리인데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암석이 기괴하다.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절반쯤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옛 정자 터가 있으니 영랑 신선 무리의 구경하던 곳이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 조에 실려 있다.
속초는 풍광이 아름다운 작은 포구였다. 그랬던 마을이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라는 노랫가락에서 언급되는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군사작전, 일명 ‘흥남 철수 작전’으로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인 함경도와 인접한 이곳 속초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속초는 실향민들이 만들어낸 모습이 많은 지역이다. 특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바이마을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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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가들이 앞 다투어 시로 칭송하며 풍류객의 면모를 드러내던 이곳 풍광을 『연려실기술』 ‘지리전고’ 편 기록을 읽어 옛 모습을 상상해본다.
‘간성 청간정(淸間亭)은 군에서 남쪽 40리에 있다. 수십 길이 높이로 우뚝 솟은 석봉은 층층이 대와 같다. 위로 용트림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 동쪽으로 만경루가 있으며, 대 아래로 돌들이 어지럽게 불쑥불쑥 바다에 꽂혀 있다. 놀란 파도가 함부로 물을 때리니 물방울이 눈처럼 날아 사방에 흩어진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있어 강원도 유형문화재32호로 지정된 청간정. 남한에 있는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설악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청간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하구 언저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누각형식의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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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름이 고탄진이던 거진
거진해수욕장을 따라 바닷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 통일 전망대 아래 가장 큰 도시 거진읍에 이른다. 거진, 지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조선시대 어느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길에 초가집 몇 채가 올망졸망 모여 있는 이곳 바닷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선비는 해안선이 활처럼 육지 쪽으로 휘어져 들어가 있는 이곳 형상을 살피더니 “이 곳 지형이 클 거巨자와 닮았으니 앞으로 이곳이 큰 나루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 이곳은 큰 나루라고 불렸는데 그 예언이 틀리지 않아 지금과 같은 규모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다.
동해안 여느 작은 어촌마을처럼 한적하던 거진이 번창한 항구도시를 이루기는 일제 시대 많은 정어리들이 수확되면서부터이다. 정어리는 맛이 좋은 생선이었으나 수확이 너무 많다보니 기름을 짜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해방 즈음 그렇게 흔하던 정어리가 동해에서 자취를 감췄고 그에 따라서 번성하던 거진항도 활기를 잃어갔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폐허처럼 변하더니, 그 뒤 한동안은 불과 2.3 백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한적한 어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던 거진이 다시 큰 어항으로 활기를 되찾게 된 데는 순전히 명태 때문이었다. “거진항은 명태가 다시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수확이 없던 명태가 한국전쟁이후 이곳 거진과 대진항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게 되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고깃배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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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湖水)는 육지가 오목하게 패이고 물이 괴어 있는 곳으로 못이나 늪보다 훨씬 크고 깊다. 많은 시가에 등장하여 낭만적 어감을 주는 호수가 지각변동과 화산활동이 적고 대륙이 빙하에 덮인 일이 별로 없던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지 않다. 동해안에도 몇몇 석호(潟湖)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인공호수인데,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포리에 자리 잡은 화진호는 그 옛날 열산현裂山縣이었던 곳이 홍수로 인하여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바람이 자고 물결이 일지 않을 때에는 수면에 가라앉은 집과 담이 보인다고 한다. 또한 이 호수는 땅 밑으로 동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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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 앞 바다에 거무섬이라는 검은 빛깔의 바우가 있다. 툭 튀어나온 바닷가 난간에 세워진 대진등대를 바라보며 도착한 마차진麻次津, 그곳 북서쪽에 봉화봉은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어 북쪽으로 정양산, 남쪽으로 죽도에 응했다고 한다.
명파리를 통과하다
조선시대 명파역明坡驛이 있었던 명파리에 이른다. 명파 남서쪽에 잔재이라고 부르는 반전半田마을은 1945년에 38선 이북 지역이었다가 1950년 정전협정에 따라 완충지대가 되었다.
마차진리에 이르기 전 통일 안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교육을 받은 뒤에 7번 국도를 따라 제진리, 사천리, 송현리를 지난다. 그곳에서 통일전망대가 멀지 않다. 통일전망대를 가만가만 오른다. 그 아래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는, 우리의 발길이 허용되지 않는 북녘 땅이다.
“온갖 것 보러 태어났건만 온갖 것 보아서는 안 된다 하더라.” 괴테의 문장처럼,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곳, 한반도 북쪽 땅이다. 그러나 “발은 땅 위에 있어도 뜻은 구름 위에 있다.”는 옛말처럼 자유로운 영혼이야 어디인들 갈 수 없겠는가?
통일 전망대에서 북으로 펼쳐진 해금강을 바라보는데, 문득 구름이 걷히며 금강산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금강산의 모습에 그리움은 더욱 커지고……, 기쁨만큼이나 큰 아쉬움을 안고 전망대를 내려와 다시 7 번 국도를 따라 해변 길로 내려간다. 갑자기 길이 끊긴다. 끊어진 7번 국도는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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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산길도 많은 사람이 다니면 큰 길이 된다.” 고 했는데, 길이 막히다가 보니 사람의 통행마저 끊어진 지 오래다. 사람의 발길을 기다릴 휴전선 155마일 최북단 동해 바닷가 길, 언제 쯤 우리의 발길을 자유롭게 허용할 수 있을까? 저 길을 마음껏 걸어 두만강에 갈 수 있는 그 날을 염원하며, 내 영혼의 자유로운 통행로를 만들어 북녘 땅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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