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또 가고, 가는 부석사의 항상 다른 모습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살기는 살아봤는데,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인데 생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죽어봐야 알기 때문이다.
그 푸르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대지 위를 뒹굴기도 하고, 이미 부스러져 흙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때가 바로 11월 이 때쯤, 바로 옛 사람의 글을 읽을 때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만 국한 되는 것일까?
조선 후기에 이 나라를 오랫동안 방랑한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부석사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때 승려 의상대사義湘가 도를 깨닫고 장차 서역의 천축국으로 떠나기 전에, 거처하던 방문 앞 처마 밑에다 지팡이를 꽂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살아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은 줄 알아라.”의상이 떠난 뒤에 절 스님은 그가 살던 곳으로 가서 의상을 초상肖像을 만들어서 안치하였다.
창 밖에 있던 지팡이에서 곧 가지와 잎이 나왔는데, 햇빛과 달빛은 이것을 비치지만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았으며. 항상 지붕 밑에 있으면서도 지붕을 뚫지 않았다. 겨우 한 길 남짓한 채로 천년을 하루같이 살아 있다.
광해군 때 경상감사였던 정조鄭造가 이 절에 이르러 이 나무를 보고서 “선인이 지팡이 삼던 나무로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하고 명령을 내려 톱으로 잘라서 갔다. 그러자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전과 같이 자랐다. 그 때 나무를 베어갔던 정조는 인조 계해년(1623)에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지만 나무는 지금까지 사시사철에 푸르며, 또 잎이 피거나 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스님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부른다. 옛날에 퇴계선생이 이 나무를 두고 읊은 시가 있다.
옥과 같이 아름다운 이 가람의 문에 기대어,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지팡이가 변하여 신령스러운 나무가 되었다 한다.
지팡이 꼭지에 스스로 조계수가 있는가,
하늘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빌지 않는구나.
절 뒤편에 있는 취원루聚遠樓는 크고 넓어서, 높은 것이 하늘과 땅 가운데 우뚝 솟은 듯 하고, 기세와 정신이 경상도 전체를 위압하는 것 같다. 벽 위에는 퇴계의 시를 새긴 현판이 있다.
내가 계묘년(1723) 가을에 승지承旨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태백산을 놀러갔다가 이 절에 들어가, 드디어 퇴계의 시에 차운次韻하였다.
까마득하게 높은 누각 열두 난간 위에,
동남쪽 천 리 지역이 눈앞에 보이도다.
인간 세상은 까마득한 신라국인데,
하늘 아래는 깊고 깊은 태백산이로다.
가을 골짜기에 어두운 연기는 나는 새 너머에 일고,
바다에 남은 노을은 흩어진 구름 끝에 비친다.
가도 가도 위쪽의 절에는 닿지 못하니,
예부터 행로行路의 어려움을 어찌 알소냐.
다시 또한 수를 더 지었다.
태백산은 아득히 하늘과 통하고,
옛 절은 웅대하게 왼쪽의 바다 동쪽에 열렸구나..
강과 산들이 멀리 천 리 밖에서 만나고,
불전과 누각은 날아갈 듯이 천지 사이에 솟았네.
고승이 거처를 떠났는데 꽃이 나무에 피고,
옛 나라야 흥했거나 망했거나 새는 빈 하늘을 지나가네.
누가 알랴. 머뭇거리는 주남周南 나그네의,
뜬구름, 지는 해에 하염없는 뜻을.
“취원루 위 깊숙한 한쪽 구석에 방을 만들고서, 그 안에는 신라 때부터 이 절에서 사리가 나온 이름난 스님의 화상畵像 10여 폭이 걸려 있다. 모두 얼굴 모습이 고아하고 괴이하게 생겼으며 풍채가 맑고 깨끗하여 엄연히 당시의 다락집 위에서 서로 대좌하여 선정에 들어간 것 같다. 지세가 꾸불꾸불하게 뻗어 내려간, 그 곳에 있는 작은 암자들은 불경을 강론하고 선정에 들어가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한다.“
신라 때 고승 의상대사가 세운 부석사를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퇴계 이황 선생이 찾아와 글을 남겼고, 다시 2백 오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이중환 선생이 찾아와 퇴계가 남긴 시에 차운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방랑 시인 김삿갓이 찾아와 안양루에 한 편의 글을 남겼고, 황동규 시인도 이곳에 와서 ‘가본 부석사와 못 가본 부석사가 만나 자리를 바꾸는 광경이 나타난다.’ 하는 시를 남겼다.
그래, 가고 오는 것이 그와 같음이 얼마나 신기하고 허망한가,
한 오리 안개가 피어오르다가 어느 사이 사라지듯 나고 죽는 우리들의 생애, 겨울의 초입, 다시 찾아가 천천히 오를 부석사는 나에게 어떤 풍경을 보여주고, 어떤 회상에 잠기게 할 것인지,
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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