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로> 다섯 번째 문재에서 전재 너머 원주까지,
울진군 평해읍에서 시작되어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관동대로 다서 번째 여정이 8월 24일(금)에서 26(일요일)일까지 실시됩니다. 평창의 끝자락인 문재에서 횡성으로 접어들면 안흥역에 도착합니다. 지금은 안흥찐빵의 고장인 안흥에서 전재를 넘으면 우천면에 이를 것입니다.
횡성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한우의 생산지입니다.
횡성을 지나면 치악산 자락에 자리 잡은 옛 절 구룡사에 이르고, 그 곳에서는 계속 치악산 자락을 따라갑니다.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의 길목, 원주까지 이르는 관동대로 다섯 번째 여정에는 태종(이방원)의 스승인 원천석과 그를 찾아왔던 이방원의 자취가 서려 있고 소초면둔둔리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가을의 문턱 그 아름다운 관동대로를 따라가는 여정에 참여바랍니다.
“조금만 더 가면 문재터널이다. 터널을 통과할 사람들과 터널 위 문재정상으로 갈 특공대로 나누는데 대학 산악부 출신인 김선희씨와 나만 특공대로 선출되어 문재 정상으로 향했다. 특공대가 있다면 적도 있어야 하는데 적은 원래 ‘보이지 않는 적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나 <예기>에 나오는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視而不見.視而不視).”는 말처럼 적은 지금 상태에선 자기 스스로가 적일 따름이다.
힘겹게 힘겹게 오르는 산길, 길도 없는 산길을 악전고투로 헤집고 올라서자 문재 정상 800미터라고 쓰여진 나무 팻말하나가 있다.,이렇게 이번 답사의 종착지인 문제 정상에 섰다. “진짜 최고의 길이예요. 다음 답사 시작을 이곳에서 하면 어때요.” 김선희씨는 지금도 기운이 팔팔하다. 예전에 큰 길이 뚫리기 전 버스가 다녔던 길인지 평창 23키로 방림 17키로라고 쓰인 표지판이 지금도 남아 있는 길, 아래로 임도가 이어지고 그 길을 한참 따라갔는데 길은 자꾸 딴 데로 가고 다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내려가자 일행들은 모두다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 횡성군에 딸린 조그마한 안흥이 온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안흥 찐빵 때문이었다. 어느 집이나 어느 지방에서나 흔 하디 흔한 안흥 찐빵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고 메스컴을 탄 뒤부터 어딜 가나 안흥 찐빵집이 들어서고 이곳 안흥에서는 서로 원조를 내세우는 찐빵집들이 들어서서 전국으로 배달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도 때는 아니지만 안흥에서 찐빵을 안 먹고 가면 서운 할 것 같아 찐빵 한 상자를 사서 나누어 먹고 출발했다. <안흥 찐빵 대축제>가 열리기 직전이라선지 평창강에 섶다리와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어린이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이 다리 저 다리를 건넌 뒤 다시 길 위에 나선다.
웃거리라고 부르는 안흥 4리에 있는 안흥초등학교를 지나 방지둔교를 건너며 상안리에 이른다. 안흥 위쪽이 되므로 웃안흥이라고 부르다가 상안리로 이름이 바뀐 상안리의 배나무거리는 관터 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관터 마을은 상안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역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이곳 관동대로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사연들을 안고서 걸어갔을까? 유배를 가던 사람, 과거에 급제해서 기쁜 마음을 가지고 가던 사람, 벼슬길을 가던 사람 그리고 수많은 장사꾼들이 이 길을 갓을 것이다. 그들의 땀방울이 면면히 이어져 이 길에서 뒤따라오는 길손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해 줄 법도 한데, 길상 항상 새로운 것이라서 그런지 어디 하나 그 흔적들을 찾을 수가 없다.“
“그 길도 잠시 작은 오솔길이 나타나고 멀리서 중장비 소리, 길이 사라진다. 새로 낸 길을 따라 오르자 42번 국도와 만나게 되고 조금 오르자 전재 정상이다. <여기는 전재 정상입니다> 해발 540미터 전재 정상에서 바라본 산들은 찬연하다. 횡성군 우천면과 안흥면의 경계인 전재에 햇살이 듬뿍 내려 쬐고 고혜경, 민경권. 이수아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간재 정상에서 좌측에 있는 산이 바람부리산이라고 부르는 풍차산風車山(699미터) 서북쪽에 틔어서 늘 바람이 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산길에서는 누가 가장 길의 선두에 서는가가 중요하다. 길이 있을 것이라고 앞 서 간 민경권씨를 뒤따라 간 일행들이 아직 고개 마루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 구룡사龜龍寺는 강원 원주시 소초면(所草面)의 치악산(雉岳山) 비로봉 북쪽 구룡소(九龍沼)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月精寺)의 말사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이 668년(문무왕 8)에 세운 절로,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이다. 이름에 얽힌 9마리 용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창건 이후 계속하여 도선(道詵) ·자초(自超) ·휴정(休靜) 등이 거쳐 가면서 영서(嶺西) 수찰(首刹)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절 입구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때문에 절 이름도 ‘아홉구’자를 ‘거북구’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절 입구에 있는 ‘황장금표(黃腸禁標)’는 조선시대 이 일대에서의 무단벌목(無斷伐木)을 금한다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한 역사적 자료이다. 현존 당우는 대웅전 ·보광루(普光樓) ·삼성각(三聖閣) ·심검당(尋劍堂) ·설선당(說禪堂) 등이 있는데, 수차례 대웅전을 중수하였음에도 그 안에 있는 닫집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구룡사 근처에 있는 영말은 이흥, 이흥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역驛이 있었다고 하며 구룡소는 구룡사 위에 있는 소로 옛 날 용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
“본관이 원주(原州)로 원주시 개운동에서 태어난 원호는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관란(觀瀾).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내고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단종 초에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고향인 원주에 내려가 은거하다가 1457년(세조 3) 단종이 죽자 영월(寧越)에서 3년상을 치렀다.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의 ‘인사문‘에서 원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그를 높게 평가하였다.
“내가 일찍이 김시습. 남효온 등은 그의 지를 굽히지 않고 자취를 드러내어 숨기지 않았으니 중용이 될 수 없고, 오직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은 기회를 살펴 눈멀고 귀먹었다고 청탁하고 물러갔으며, 직학사直學士 원호는 움막에 거처하면서 단종端宗을 위하여 복제를 입었으니, 참으로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원주시 소초면 둔둔리에 살면서 그의 제자인 권탑과 함께 달을 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는 월계도를 만들었다. 원호와 그의 제자가 40 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서 만든 월계도는 둔둔리의 덕고산 주봉에서 짚신봉까지의 2킬로미터쯤 되는 능선을 폭 60센티미터, 길이 40센티미터의 종이에 옮겨서 그려놓고 이것을 육십갑자로 나누어 금을 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정월 대보름날에 떠오르는 달의 위치에 따라서 그해의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는 것이다. 갑자지간에서 달이 떠오르면 콩 농사가 잘 되고, 을측지간에서 달이 뜨면 가뭄이 들고, 병신지간에서 달이 뜨면 장마가 진다는 것으로 표현했다. 요즈음에도 이 지방에서는 월계도에 맞추어 보고 거기에 따라서 그 해에 심을 곡식의 종류를 정하거나 씨를 뿌릴 날짜를 잡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게 월계도에 따라서 농사를 지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969년에는 월계도가 가리킨 대로 콩 농사가 아주 흉년이었다고 한다. 그 뒤 원호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이에 불응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앉고, 누울 때에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머리를 두었다. 그 이유는 단종의 장릉莊陵이 자기가 거처 하고 있는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는데 손자인 숙강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直筆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우고는, 여러 아들들에게는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名利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
“치악산에서 흘러내린 흥양천을 건너자 황골. 입석대계곡 6키로.. 15키로. 정선 91키로 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보인다. 입석골은 황골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입석대立石臺와 입석암立石庵이 있는 곳이다. 정선이 여기에서 제법 멀구나.
점심 먹고 이때부터가 문제다. 배는 아직 꺼지지 않고 조금은 쉬면서 졸기도 해야 하는데, 갈 길은 멀고 흐느적거리며 가다가 보면, 얼마쯤 왔는지 자꾸만 지도 보는 게 일이다. 우리 속담에 ‘게으른 년이 삼가래 세고, 게으른 놈이 책 장 수 센다.’는 말이 있다. 게으른 여자가 삼(麻)을 찢어 베를 놓다가 얼마나 했나 헤아려 보고, 또 게으른 사람이 책을 읽다가 얼마나 많이 읽었나, 얼마나 남았나. 장 수 헤아려 본다는 말이다. 아직 얼마 걷지도 않고서 얼마를 걸었나, 얼마나 남았나, 자꾸 지도를 보자는 하는 것은 내가 이미 충분히 지친 탓이리라.“
“보부상들의 출입이 잦았던 원주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이 이 지방을 두고 “산골짜기가 가깝기 때문에 난을 피하여 숨기가 쉽고 서울이 멀지 않아서 태평스러울 적에는 나아가기가 쉬운 곳” 이라고 하였는데, 그런 연유 탓에 이 지방에 특히 보부상들의 출입이 잦았다. 이 원주 땅을 거쳐 갔던 사람들 중에 장터에 목숨을 걸고 돌아다녔던 보부상들의 애환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신정일의 <관동대로> 중에서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그리운 제주, (0) | 2012.07.28 |
---|---|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0) | 2012.07.28 |
한여름 괴산 산막이 길을 가다 (0) | 2012.07.14 |
아침가리와 생태문화의 보고 곰배령을 가다. (0) | 2012.07.14 |
백령도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 (0) | 2012.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