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사 골짜기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다.
그새 오래 전 이야기다. 1998년 무렵이니 이십 오 년의 세월 저편이던가, <사람과 산>에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에 연재를 하던 때 이 고성의 도림사를 찾았고,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답사기를 남겼다.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금곡교를 지나 곡성읍 내에 도착한 시간이 열시 쯤 조금 늦은 편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김현준기자와 손동명씨를 태우고 동악산 주차장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 안에 가득 차는 암반계류. 배낭을 챙긴 우리 일행은 이곳 사람들이 흔히 ‘도림사 골짝’이라고 부르는 물가로 내려간다.
도림사 아랫자락의 청류동(淸流洞) 계곡을 “삼남 제일의 암반 계류”라고 부르며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계곡의 암반을 바라본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마치 두타산의 무릉반석을 보는 것처럼 폭이 20m에서 30m쯤 되고 길이만도 200여m에 이르는 반석에는 수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맑은 물줄기가 천년 세월을 두고 쉴 새 없이 타고 흐르면서 그 바윗면을 반질반질하게 만들어 놓았으며, 그 물위를 떨어진 나뭇잎들이 가는 세월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암반계류의 절경마다 일곡(一曲), 이곡(二曲)에서 구곡까지 새겨 놓았고, 청류동, 단심대(丹心臺), 낙락대(樂樂臺) 등의 지명 뿐만이 아니라 낙산완초 음풍농월(樂山玩草 吟風弄月), 또는 청류수석 동악풍경(淸流水石 動樂風景) 등 수많은 글씨들과 함께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벗 꽃 터널을 이루는 곳이지만 지금은 나뭇잎마저 져버려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을 밟으며 한참을 오르자 길 위쪽에 도림사(道林寺) 부도 밭이 보인다.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던 나말여초 때 만들어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나 지리산 연곡사의 동부도, 북부도 그리고 여주 고달사지의 부도들과는 거리가 먼 소박하기 짝이 없는 다섯 기의 부도를 바라보며 사람들의 운명이나 종교의 운명 역시 시대의 변천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볼 수 없지만 이 부도를 만들 때 쏟은 정성이나 불심은 얼마나 지극 했겠습니까?”라는 양병완 선생의 말을 들으며 소박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 또한 남다르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된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서
부도밭에서 200여m쯤 오르자 도림사에 이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도림사는 공사 중이었다. 보광전 앞에 진흙더미가 쌓여있었고 요사 채 툇마루 앞에 스님 한분이 서서 공사 중인 인부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은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기와조각이나 철근들이 널려있는 도림사 경내를 바라보며 도림사의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동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도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인 화엄사의 말사로서 660년 태종무열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창건설화로 582년경 신덕왕후가 절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신덕사라고 지었는데, 660년경에 원효가 사불산 화엄사로부터 이곳으로 와 이 절을 개창하고 도림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설에는 이절에 도인과 고승들이 숲같이 모여들어 도림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도림사는 그 뒤 876년(헌강왕 2년)에 도선국사가 중건하고 지환스님이 중창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아있는 절 건물은 중심 건물인 보광전을 비롯 나한전, 명부전, 약사전, 응진전, 무량수각,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이절 보광전에는 1739년(영조 6년)에 아미타 극락 회상도가 남아 있다. 삼베 바탕에 채색된 아미타 극락 회상도는 세로가 3m에 가로 278m이고 큰 화면 가운데의 아미타불 주위로 여덞 보살 및 두 사람의 비구승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그리고 팔부신중 둘이 둘러싸고 있는 구도이다.
키형 광배를 지닌 아미타불의 머리 가운데는 타원형을 반으로 자른 듯한 중앙계주가 장식되어 있고, 육계에 장엄한 둥근 경상계주에서 피어오르는 광명이 양옆으로 길게 와운문을 형성하고 있는 아미타불은 네모진 얼굴에 차분한 표정이고, 그 아래편에 있는 관음보살은 왼손을 내려 보병을 잡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자비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세지 보살은 경책을 얹은 연꽃을 들고 있다.
이 밖의 보살은 화려한 옷 무늬의 천의를 입고 연꽃을 든 자세이나 비구형의 지장보살은 석장과 보주를 들고 있다. 이들을 보호하는 사천왕은 보관을 쓰고 있고 이 가운데 검을 든 지국천왕은 털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가늘지만 유려한 필선으로 그린 이 그림은 밝은 홍색과 양록색이 주조색으로서 화기에 의하면 화원 채인과, 네 사람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보광전에 들어가 참배를 드리려 했지만 문이 잠긴 보광전에서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응진전으로 들어선다. 이 절 응진전은 원효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남아있다.
원효대사는 성출봉(聖出峰) 아래에 길상암(吉祥暗)이라는 암자를 짓고서 원효골에서 도를 베풀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성출봉에서 16아라한이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깨어난 원효가 곧바로 성출봉에 올라가 보니 1척 남짓한 아라한 석상들이 솟아나 있었다고 한다. 원효는 열일곱 번에 걸쳐 성출봉을 오르내리며 아라한 석상들을 모셔다 길상암에 안치하였다. 그러자 육시(六時: 불교에서 하루를 여섯 번으로 나눈 염불독경의 시각 신조, 일중, 일몰, 초야, 중야, 후야)때만 되면 하늘에서 음악이 들려 온 산에 고루 펴졌다고 한다. 그러한 연유로 도림사 응진전에 모셔진 아라한 들이 그 때의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전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들은 없다.
‘이젠 산으로 올라가야지‘ 중일거리며 신발 끈을 고쳐 맨 후 오도문을 나설 때 한 마리의 암캐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 때 이 절을 찾았던 사람들, 원효元曉 스님은 너무 먼 세월 저편의 사람이지만, 함께 이나라 산천을 떠돌았던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꽃은 피고, 지고, 도림사 골짜기의 암반에 강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흐르고 흐르는데,
2022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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