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이 아름다운 계절 9월에 고창의 천하명승 병바위와 선운산 도솔암과 수동리 팽나무에 취해볼까?
가을이 아름답게 익어가는 9월 17일 토요일에 고창의 천하 명승을 찾아갑니다. 2021년 12월 6일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고창 병바위 일원 중 병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사람 얼굴 형상이기도 하고 호리병 모양이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북두칠성 모양, 부처님 얼굴 같기도 하다. 고창 병바위에서 전좌바위 아래 새집처럼 들어앉은 두암초당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다.
병바위와 두암초당을 답사하고 고창 선운산 답사에 나선다.
해리를 지나 낮으막한 고개를 넘으면 용문굴에 이르고 도솔암 마애불이 그 아래에 있다.
미륵비결이 숨어있는 마애여래불
이 비결을 1892년(임진) 8월 무장 접주 손화중과 동학의 지도자들이 꺼내게 된다. 어느 날 손화중의 집에서는 선운사 석불비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을 내어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벽력이 또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좌중에 오하영(吳河泳)이라고 하는 도인이 말하되, “그 비결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으면, 벽력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중대한 것을 봉해서 둘 때에는 벽력 살이란 것을 넣어 택일하여 봉하면 후대인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열어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서구가 열어볼 때에 이미 벽력이 일어나 없어졌는지라 어떠한 벽력이 또 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는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나니 여러분은 그것은 염려 말고 다만 열어볼 준비만을 하는 것이 좋다. 여는 책임을 내가 맡아 하겠다.”고 하였다. 좌중에서는 그 말이 가장 이치에 합장하다 하여 청죽(靑竹) 수백 개와 새끼 수십 타래를 구하여 부계(浮械)를 만들어 그 석불의 전면에 안치하고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그 절 중 들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부터 수십 명의 중들을 결박하여 두었는데, 그 일이 끝나자 중들은 뛰어가서 무장관청에 고발하였다. 전날 밤에 동학군들이 중들을 결박 짓고 석불을 깨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백 명이 잡히었는데, 그 중 괴수로 강경중(姜敬重), 오지영, 고영숙(高永叔) 세 사람이 지목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여러 형태로 피해를 받았지만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무장 접주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바라볼수록 마애불과 잘 어울리는 한 그루 소나무를 뒤로하고 도솔암으로 오른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르른 나뭇잎 새들이 손짓하는듯한 정경 속에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부르는 도솔암은 자리 잡고 있고 그 안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선운사 지장보살 좌상이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 만큼이나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지장보살은 관음전에 있는 금동보살과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도솔암에서 물을 마신 후 대나무 잎 새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내려가면 훤칠한 미남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장사 송을 만나게 되고 그 옆에 진흥굴이라고 불리는 천연굴이 있다.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곳 선운사에 와서 이 굴에서 자던 중 꿈속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이곳에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 절을 크게 일으키니 그 것이 선운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이 신라 땅에 속했을 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 창건설화는 이렇다. 죽도 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 때 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가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利益이 있게 하리라’라고 쓰여 진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진흥왕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100명을 보내 뒷산에 무성했던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절터를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을 가느라고 뚫어놓은 자연석굴인 용문굴이 등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검담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때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 충숙왕 5년과 공민왕 3년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사가 되었고 조선 성종 14년에 행호(幸浩)선사가 쑥대밭만 무성하던 절터에 서있는 구층석탑을 보고 성종의 작은 아버지 덕원군의 시주를 얻어 중수했지만 정유재란 때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당시 광해군 6년(1614) 월준대사가 재건한 뒤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 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 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 등 4개의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십여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이 부안면 수동리에 있으며, 2008년에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수동리 팽나무다. 요즘 드라마 때문에 유명해진 우영우 팽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수동리 팽나무를 보며 하루를 마감할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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