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변산 채석강과 적벽강, 우금암과 개암사, 직소폭포 일원을 가다.

산중산담 2022. 9. 14. 16:30

변산 채석강과 적벽강, 우금암과 개암사, 직소폭포 일원을 가다.

 

느낌은 언제 오는가? 모든 것이 순간입니다. 어느 순간 느낌이 올 때,

그것이 영감이건, 아니면 사물이나 사람이건, 그때에 새로운 것이 시작됩니다 .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이성복 시인의 <느낌은 언제 오는가.>의 일부분입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늙지 않는 법입니다.”프란츠 카프카의 말, 살아 있는 때 명승을 많이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살다가 보면 그 순간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이 준비된 듯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순간에다 대고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 세상에 이루어 놓은 나의 흔적은

이제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나는 이제 최고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나니“

괴테의 <파우스트> 제 11581행에 실린 글과 같은 그런 장소와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인간은 그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으로 탈바꿈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맞습니다. 놀랍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 풍경이 되는 경이,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기 위해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대한민국 천하명승 기행>을 시작합니다. 인류의 삶이 시작되면서부터 사람들의 삶과 함께 했던 천하명승이나 아직도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고 숨어 있는 절경을 찾아가는 기행입니다.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국가 명승이 130여 곳 중, 부안의 직소폭포 일원, 채석강과 적벽강, 그리고 우금암과 개암사 일대를 답사할 예정입니다.

 

직소 폭포 가는 길

 

길은 평탄하고 조금 오르자 실상사 터에 닿는다.

실상사(實相寺)는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과 대장경 등 보물 급 문화재가 있었으나 6.25때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3기의 석조부도와 허튼 돌로 막 싼 기단만 남아 있는 절터는 이름 모를 뭇 새들의 울음소리 속에 붉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에 온 몸을 드러낸 저 금당 터에 내소사 대웅전이나 개암사 대웅전 같은 날아갈 듯한 절 집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내소사에 소재 해 있는 연재루는 이 실상사에서 1924년에 옮겨갔다는데…

 

한참을 올라가자 발아래에 쏘가 보이고 그 위에서 떨어지는 한줄기 직소폭포, 김수영의 시 한 편이 물소리에 실려 스치고 지나간다.

 

폭포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란타(게으를난)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옥녀봉, 선인봉, 쌍선봉 등의 봉우리들에 휩싸여 흐르고 있는 2km의 봉래구곡 속에서도 단연 빼어난 변산 팔경의 제 1경이 실상 용추를 이루고 실상 요추에서 흐르는 물은 바로 아래 제 2, 제 3의 폭포를 이루며 흘러 분옥담, 선녀탕 등의 소를 이루며 이를 일컬어 봉래구곡이라고 부른다. 이 물이 흘러 백천내에 접어든다. 백천내에서 흐르는 물이 의상봉 아래 중계리에 닿았고 그 아래에는 중계 초등학교가 있었다.

 

개암사와 우금암 가는 길

<개암사지>에 의하면 개암사(開암寺)지는 변한의 왕궁 터였다고 전해지는데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성을 쌓았다. 문왕은 우禹와 진陳 두 장수를 보내 감독하게 하였으며, 좌우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지은 후 동쪽의 것은 묘암, 서쪽의 것은 개암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백제 무왕 35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쳐짓고 개암사와 묘암사로 고쳐 불렀고, 통일 신라 문무왕 때 원효와 의상대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원감국사가 중창하였고, 조선 태종 때 선탄선사가 중수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효종 9년에 밀영선사와 혜징선사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울금산성을 뒷 배경으로 지어진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정면3칸 측면3칸의 팔각지붕 다포식 건물인 대웅보전의 닫집 안에 아홉 마리의 용이 뒤엉켜 물을 토해내는 모습의 목조각이 있고 대웅보전 현판위에는 두 마리의 도깨비 얼굴이 붙어있다. 특히 우금암遇金岩이라고도 부르는 울금바위에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방이 있다. 백제 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는 베틀굴 또는 복신이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았던 굴이라고 하여 복신굴이라고도 불린다.

백제의 멸망 이후 백제의 장군이었던 복신과 도침이 의자왕의 넷째 아들 풍豊 왕을 불러들여 백제 부흥운동을 벌렸지만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지도부의 내분으로 백제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말았다. 나당 연합군이 663년 7월에 주류성을 공격해오자 지원하러 왔던 일본군이 신라 수군의 연화계連火計에 의해 패망하였고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하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패잔병들을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자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써 다했다. 고향 땅을 어찌 다시 밟으리오.”라는 뼈아픈 탄식을 남긴 채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뒤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백제의 유민이었던 경상도 문경사람 견훤이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전라도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했지만 결국 역사의 뒤틀림으로 패망하고 말았으니.....

 

소나무 숲에 들어서서 저마다 마음에 드는 소나무에 등을 기대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다가 버스에 실려 도착한 것이 적벽강 부근이다.

켜켜이 쌓인 바위벽이 책을 쌓아놓은 듯 하다고 해서 채석강이라 불리는 채석강과 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드문한 적벽강(赤壁江)은 대막골 북쪽에 있는 명승지로 해안을 따라 500여m의 붉은 빛 절벽이 휘돌아 있다. 돌벽 사이로 짙푸른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다. 적벽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놀던 적벽강(赤壁江)의 이름을 따서 적벽강이라 한다.

물이 가장 많이 빠진 때라서 그런지 바닷물은 저 멀리 있고, 저마다 여러 생각에 젖은 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기묘하게 생긴 적벽강 일대를 바라보며 올라서자 수성당에 이른다.

수성당(水聖堂)은 대막골 서남쪽, 적병강 해안에 있는 신당으로 당집 밑에는 두 벼랑의 곧은 바위가 둥근 통모양의 굴처럼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개양할미의 전설 한 편이 남아 있다.

개양 할미는 칠산 바다를 맡아 보는 바다신이다. 아득한 옛날 적벽강 대막골(죽막동) 뒤 ‘여울골’에서 개양 할미가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의 깊이를 조정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개양 할미를 물의 성인으로 높여 수성 할미라 부르며 여울골 위 칠산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에 구랑사를 짓고 모셔 오다, 지금은 수성당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이 개양 할미는 키가 어찌나 컸던지 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조차 젖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곰소의 ‘게란여’에 이르러 발이 빠져 치마까지 젖자, 화가 난 개양 할미가 치마로 돌을 담아다 ‘게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지금도 깊은 물을 보면 “곰소 둠병 속같이 깊다.”는 속담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개양 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위도와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 바다 곳곳에 두고, 막내딸을 데리고 구랑사에 머물러 서해 바다를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수성당 할머니라고 부르며, 음력 정월 보름이면 죽막 등을 중심으로 한 주변 마을 어민들이 안전과 물고기 풍년을 비는 수성당제를 지낸다.

 

“아름다운 경치와 유람을 논하는 사람은 반드시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신체적 조건을 우선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그 사람의 정취情趣가 아름다운 경치와 한 덩어리가 되어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널 때 스스로 정신이 왕성해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달릴 수 있는 건각健脚을 가졌더라도 갑자기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 것이다.”

<소창청기 小窓淸記> 중의 한 소절 같은 감흥을 느끼게 될 <대한민국 천하 명승기행>은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떠나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