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정호를 감싸고도는 물안개 길을 걷는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에 자리 잡은 옥정호를 휘감아 도는 <물안개 길을 걷습니다.
섬진강의 중류에 자리 잡은 옥정호 물안개길은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에서 시작하여 마암리까지 약 13킬로미터로 조성된 도보길입니다.
옥정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댐으로 섬진강댐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국사봉 동쪽 계곡에는 옛날에는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는 강당골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이 전북 지역 사람들이 주말마다 즐겨 찾고 있는 오봉산이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입석리가 저렇듯 출렁거리는 강물이 가득한 것은 오래지 않은 시간 저편이었다.
1928년 동진 수리 조합에서 운암 발전소를 세울 때 만든 운암댐이 바로 전라북도의 지세를 잘 이용한 대표적인 섬진강댐이었다. 동진강의 상류와 분수를 이루는 왕자산과 성왕산을 뚫어 수계를 바꾸면서 그 물을 동진강으로 유입시켰다. 나라의 제일 큰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는 그때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들 수밖에 없는 쓸모없는 땅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만 해도 3년 동안에 걸친 가뭄 때문에 전라도 전 지역 사람들은 살아가기조차 힘든 처지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만들고 과중한 수세를 요구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된 것이다. 물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던 호남평야에 이 운암일대를 흐르는 섬진강의 물을 강을 변경하여 정읍, 김제, 부안 등지로 내려 보냈지만 그러나 그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40년에 신 댐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그 뒤 1961년에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사이를 막아 1965년에 12월 길이가 344미터이고 높이가 64미터인 섬진강댐을 만들었고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서 칠보면 시산리까지 6215m의 굴(직경 3.40m)를 뚫어 칠보발전소를 만든 것이다.
섬진강 물을 땅 높이가 50미터인 정읍군 칠보 발전소로 내려뜨리게 한 것이다. 이것은 낙차 150미터를 이용하여 전기를 만드는 이른바 유역 변경 식 발전소로 이용하였고 발전에 이용한 물을 다시 동진강 유역의 농업용수로 쓰도록 하였다. 간선도수로의 총연장은 67km에 이르고 지선수로만도 69km에 달한다. 또 이 물을 계화도 간척지로 끌어내어 무주군 전체의 논 넓이와 같은 4,000 헥타아르쯤의 새로운 논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 그 후 이들 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질이 좋은 쌀에 드는 계화도 쌀을 생산하게 되었다.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콘크리트 중력식인 댐은 1961년 8월에 착공하여 1965년 12월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이다.
댐의 높이 64m, 제방의 길이 344.2m에서총 저수용량 4억 6600만톤이며 만수위 때의 수면면적은 26.51㎢, 유역면작은 763㎢이고l, 시설발전용량은 3만4800㎾이다. 댐의 건설로 전라북도 임실, 정읍군은 2개군, 5개면, 28개리의 총면적 9,371정보가 수몰되었다. 건설효과는 칠보발전소의 확대를 가져와 발전량 2만8800㎾가 되었으며, 홍수조절량은 2700만톤이며 용수 공급량은 연 3억5000만톤이다. 발전에 이용된 유수를 동진강으로 유역변경시킴으로써 동진강 하류지역인 경지 1만7890정보, 계화도간척지 3,050정보 부안농지확장지구 5,000정보 등 4만5700정보에 관개용수를 공급, 연 200만석의 식량증산과 섬진강 중하류의 홍수피해를 방지하게 되었다.
또한 섬진강수력발전소 건설공사는 1940년 9월 남선전기주식회사에서 착공하였으나, 1943년 조선전업주식회사에 통합되어 계속 공사 중, 전시 물자난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전체공사의 약 60%, 댐 공사의 23%를 완성하고 불완전하나마 1945년 4월 제1호기를 첫 발전을 시작하였으나 광복과 함께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 뒤 정부보조로 다시 착공하였으나 공사시행계획의 변경, 자재구입의 어려움, 시공업자의 선정 잘못 등으로 공사의 추진이 지연되다가 6.25 사변으로 다시 중단하게 되었다.
사변 중에는 1950년 7월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여 이른바 산업성 전기국 산하에 섬진강 발전부를 두어 칠보, 운암, 보성강 발전소를 통합 관리하였으며, 유엔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발전기를 비롯하여 부속기기를 해체, 소개하기 시작하던 중 유엔군의 폭격으로 다수의 시설이 파손되기도 하였다. 9.28 수복 때에는 인민군들이 산으로 도주할 때 방화와 총격을 가하여 건물 5동이 전소되고 변전설비가 파괴되는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 뒤 파손된 기기와 분산된 설비를 정비하여 1950년 12월 복구공사를 착수, 1951년 4월 시설용량 1만4400㎾의 제1호기 복구를 완료하였다. 종전 후 국토건설사업의 일환으로 1961년 8월 건설부 주관하에 건설을 다시 추진하였으며, 이는 당초 계획지점에 높이 64.0m, 길이 335m의 댐을 축조하고 기존 제1호기 옆에 설비용량 1만4400㎾의 제2호기 증설, 1965년 12월 준공함으로써 설비용량은 2만8800㎾로 증가되었다. 이후 제3호기에 대한 증설을 1983년 9월 착공, 1985년 3월 준공하여 설비용량은 다시 3만4800㎾가 되었으며, 저수용량 4억3832만㎥, 유효낙차 151.7m를 이용하여 프란시스수차 3대를 설치, 연간 1억8000만㎾h의 전력을 생산, 호남지역에 공급하고 있다. 현재 저수지는 산업기지 개발공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동진농조와의 계약하에 영농기(매년 4..11.~9.11.)에는 일정수위 이상을 유지하면서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고향을 두고 떠난 수몰민들
그러나 운암댐이 만들어지며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몰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읍군 산내면과 임실군 운암면 그리고 강진면 사람들은 물에 잠기는 고향마을을 두고 경기도와 동진강 일대로 흩어져 갔다. 8백 만평 쯤의 땅이 물에 잠기고 수몰민 2천 7백여 세대의 이주 정착을 위해 선정된 지역이 계화도 간척지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주는 1977년과 1980년 사이에 정읍과 임실 지역의 수몰민 천칠백 세대가 옮겨갔지만 시행 초기에는 문제점 투성이었다.
입석리에 살고 있는 박종만(55세 643-7145)씨는 “다음해 4월말에 이주해야 되는데 7월말에 홍수가 났어요 아무런 채비도 않았는데 물이 차오르니까 우선 급한 가재도구만 가지고 저 산으로 올라갔어요 그래서 도청 앞에다 솥까지 걸어놓고 농성을 했어요 누워 잘 수 있도록 천막이라도 칠 수 있게 해달라. 그러니까 계화간척지가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강제 이주를 시켰지요” 이곳 운암에 살다가 현재 계화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최우필씨를 80년대 중반에 만났던 적이 있다. 이주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밤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농사를 짓고 싶어도 소금물 때문에 그냥 묵힐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그보다도 또랑 논들만 짓다가 번듯번듯하게 한 필지씩 나누어 놓은 바둑판같은 논에서 아침 일찍 비료를 뿌리고 오면 남의 논에 뿌리고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한숨만 쉬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고통보다도 고향도 버리고 선산도 버리고 함께 어울려 살면서 정들었던 친척들과 친구들을 버리고 온 고통이 더 컸을 것이고 그 고향 산천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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