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산중산담 2013. 6. 14. 19:30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한강 천삼백 리 세 번째 일정을 마치고 6월 넷째 주 네 번째 여정에 오릅니다. 영월읍 거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이 되어 유장하게 흐르는 강을 따라 내려갈 이번 여정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특히 비운의 임금 단종과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 그리고 정조대왕의 태실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진행될 이번 구간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강이 비경을 천천히 바라보며 걷는 구간입니다.

 

“멀리 거운교가 보이는데 길은 끊어지고 가뭄인데도 강은 건널 수가 없다. 아무리 가물었어도 한강은 한강인데 건너려고 했던 것이 무모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는 산길을 택한다. 급경사 길을 허겁지겁 올라서서 나는 '휴' 하고 한숨을 내뿜는다. 길가에는 꿀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다. 꿀 꽃 하나씩 따서 쪽 하고 빨 때마다 올라오는 그 진하디 진한 꿀맛. 그 감미로움에 자줏빛 꿀 꽃들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하여간 아침 여정은 별것들의 연속이다. 오디로 입술화장까지 했으니 길 걷다 만나는 처자(?)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거운리를 지나 도착한 먹골에는 오래된 당집이 길 옆에 서 있다. 그 옆의 장승 한 쌍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말 대신 토종된장, 엿기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오래된 전통들이 현대적 감각에 맞게 되살아나는지, 전통이 깡그리 무시된 채 경제우선주의에 매몰되어 가는지 모를 일이다. 강 건너 사지막골을 사이에 두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굿모닝동강, 동강민박, 동강래프팅, 가람래프팅 등 헤아릴 수도 없는 래프팅 업체들의 간판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마을사람의 말에 의하면 옛날 어떤 사람이 강변에 막을 쳐놓고 살았다 해서 마을 이름이 사지막골이라고 붙여졌다는데 사지막골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완택산 자연휴양림」이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지나며 강은 여울져 흐른다. 완택산(916m)은 삼면이 석벽으로 되어 있는데 돌로 쌓은 산성 둘레가 347척이다. 고려 고종 때 합단合丹이 침입했을 때 영월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고 한다.

완택산 서북쪽에 있는 번재(번치)마을을 돌아가자 강 가운데 둥글바위가 있다. 일제 때 뗏목이 걸려 파손되는 일이 잦자 강 저편의 산과 연결되어 있던 것을 깨버렸다고 한다. 강물은 둥글바위를 휘감아돌고 그 강가에선 부부인 듯한 두 남녀가 낚싯대를 드리운 채 앉아 있다.(...)

 

그 옛날 닥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닥바우 또는 땍삐리라 불리우는 마을 앞강에는 꽃밭여울이라는 여울이 흐르고 삼옥리 서쪽에 금강산의 다른 이름과 같은 봉래산(799m)이 있다. 봉래나루에는 나룻배 한 척이 매어 있고 봉애소는 새푸르게 깊다. 올라가는 고갯길은 숨이 가쁘다. 김형곤 씨는 쉬었다 가자고 하고 김성규 씨는 이 고개마루를 넘어서 쉬자고 한다.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영월이다. 동강은 서강과 몸을 섞기 위해 저렇게 잔잔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강은 아스라하고 강 건너 보이는 저새마을은 붉고도 붉다.

저새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앉아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는다. 강은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움직임이 없이 흐른다. 비탈진 산기슭에 펼쳐진 붉디붉은 너른 밭들 그리고 우람한 느티나무와 소나무.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채 산허리를 넘어가는 길들을 바라보니 『소문공충집』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강산과 풍월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일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마음 하나 가지고 한가롭게 강기슭을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꿈꾸지만 실제 나는 아름다운 마음은커녕 서둘러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저 느낌도 없이 걸어갈 때가 많으니, 정말 나는 언제쯤 후여후여 소리치며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돌 수 있을까? 그래서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라는 『문가유림』의 시구를 이해하게 될까?(...)

 

서강이라 불리는 평창강은 길이가 149km에 이르는데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남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와 팔괴리 사이에서 동강과 합류하고 그곳에서 마침내 굵은 물줄기가 되면서 남한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서강 저 멀리 옅은 안개 속으로 푸른 산들이 연이어 보이고 그 아랫자락에 청령포가 있다. 영월군에는 조선 왕조 여섯 번째 임금이면서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비롯해서 단종과 관련된 역사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고 그에 얽힌 땅 이름과 전설이 많다.

 

서면 광전리에 있는 고개는 단종이 유배올 적에 넘었다고 해서 임금이 오른 고개라는 뜻으로 등치라고 불리었고, 서면 신천리에 있는 고개는 오랫동안 흐리던 날씨가 단종이 넘으려고 하자 맑게 개어서 단종이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해서 배일치라고 불리운다.

신천리의 관란정觀瀾亭밑에는 ‘아이고 바우‘ 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아이고‘를 세 번 외치ㅁ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또 다른 이야기는 불의한 정변政變이나 수령의 악정이 있을 때 선비들이 이 바위에 모여 ’아이고, 아이고,‘하며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이곳 아이고 바위에서 통곡을 하면 강원감사가 그 수령의 잘잘못을 내탐했다고 하며 악한 수령들은 그 선비들을 탄압했다고 한다.

단종이 귀양을 와서 머물렀던 청령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쌓여 있으며 한쪽은 벼랑이 솟아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게 막힌 곳이다. 단종이 이곳에 머물러 있을 때 매월당 김시습이 두어 번 다녀갔다고 한다. 그래 매월당은 이곳에 와서 인생이 얼마나 뜬구름 같은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냐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미친 듯이 소리쳐 옛 사람에 물어보자

옛사람도 이랬더냐 이게 아니더냐

산아 네 말 물어보자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

삶이란 그날 그날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 위의 물줄 같은 것

그리하여 말하지 않았던가

이룩한 미완성 하나가 여기 있노라고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

 

정조의 태실이 있는 계족산

봉화 76km, 하동 11km 여정은 계족산鷄足山(880m) 아래를 지난다. 계족산에는 왕검성이 있고 정조대왕의 태실비가 모셔져 있다. 왕검성은 거란족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하여 왕검이라는 장군이 쌓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왕검의 어머니가 왕검과 그 누이에게 성 쌓기 시합을 시켰다고 한다. 아들에게는 돌로 딸에게는 흙으로. 그런데 딸이 먼저 쌓을 것 같아서 딸에게 독약을 먹여 죽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둘레가 2,314척, 높이가 19척으로 크게 가물면 마르기도 한다. 한곳의 샘과 다섯 간의 창고가 있다.”고 실려 있는 왕검성을 이곳 영월 사람들은 ’정양리 산성‘이라고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월 고적조에 “석책조 이천삼백십사척고십구척(石策條 二千三百十四尺高十九尺)”이라는 기록과 《대동지지》 영월 성지조에 “정양산 고성조 이천이백십사척(正陽山古城條 二千二百十四尺)”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이 성은 2003년 6월 2일 사적 제446호로 지정되었는데, 둘레가 771에, 성벽의 높이 4∼10m, 너비는 6m로 면적은 11만 8,637㎡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에서 연하리에 걸친 계족산에 축성된 테뫼식 산성인 이 성이 <여지도서>에도 “정양산성’으로 실려 있으며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왕검성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인 것은 틀림없는 이 성은 거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검왕이 쌓았다는 설과 남쪽에서 침입하는 신라를 막기 위하여 고구려에서 대야산성ㆍ온달성ㆍ봉래산성 등과 함께 축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전설은 952년 만주와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이 이곳 영월 지방까지 침략하자 이 들과 맞서 싸운 장군이 왕검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지만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산성은 대부분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특히 북문은 양쪽 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산성의 남쪽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남한강을 따라 영월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길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험준하고 높은 산의 장벽을 피해 상류에서 하류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이 왕검성이다.

왕검성은 둘레가 771m쯤으로 몇 군데 허물어지기는 했을 망정 옛날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조선왕조 오백 년사에 가장 걸출했던 임금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 정조의 태실비가 있다. 일반인의 태는 태어난 지 사흘이 지나면 태웠으나 왕실 자손들의 태는 잘 말린 후 봉안하였는데 그것을 태실이라 한다. 능은 수원에 있는데 그의 태실비는 이곳에 있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산, 명당에 대한 관심은 깊고도 깊은가 보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멀리 고씨동굴로 건너는 다리가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 횡성 고씨 일가족이 이 동굴 속에 피신하여 난을 피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굴 속에는 그때 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땐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인 이 고씨동굴은 석회동굴로 총 길이는 3,000m이고 주굴이 1,800m이며 나머지 굴이 1,200m쯤 된다. 굴 속으로 들어가면 넓은 광장 3, 4개가 있고 동굴의 지질연대는 4억 년 내지 5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종유석과 석순의 전시장'이라고 부를 만큼 장엄한 경관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들과 수학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고씨동굴을 눈앞에 두고 바람은 잔잔히 불고 아카시아 나뭇잎들은 살며시 흔들거린다. 일행들은 어서 쉬어야지 하는 일념 하나로 서둘러 걸어가다가 다리 아래 등나무 정자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오고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다본다.

이곳에서 태백 봉화 88국도와 단양 895번 지방도로로 길은 나뉜다. 각동교 아래로 래프팅하는 사람들이 보트에 몸을 실은 채 노를 젓고 있다. 남한강은 이제 옥동천을 받아들인다.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구룡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영월군 하동면 대아리 맛밭까지 56km의 여정을 마치고 남한강에 합류하는 옥동천으로 인하여 남한강은 더욱 깊어지고 넓혀진다. (...)

 

강 건너 건너던 맛밭나루에는 배 한 척이 매어 있고 하동초교 옥동분교는 청소년 야영장으로 바뀐 채 태극기만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다. 강 건너 저 산 너머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내려오는 형국이라는 오룡골이 있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여러 집이 살았지만 지금은 한 집만 남았다고 한다. 다리도 없고 물도 건널 수 없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살아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괴목마을을 지나며 날은 흐려지고 길 위쪽에 물맛이 아주 좋은 샘골마을이 있다는데 지친 몸들이라 올라갈 기력이 없다. 드디어 여정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이른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려 있는 단양군에 접어들면서 우리 일행을 반기기라도 하듯 바람은 시원스레 불어온다. 길가에는 산앵두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빨간 앵두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 주먹씩 따서 입에다 털어넣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길가의 주차장에는 래프팅클럽, 유로레포츠, 해병레저스쿨, 강산레저이벤트, 동강레포츠, 그린투어클럽, 레저라인, 단양레포츠 등 래프팅을 주선하는 간판들을 매단 컨테이너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러나 아직 철이 이른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매미 소리만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곳 영춘으로 1894년 당시 영국 왕실의 국립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한강의 배를 타고 올라왔는데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읍의 관아는 크고 불규칙하게 여기저기 서 있고, 훌륭한 출입문과, 해뜰 때와 해질 때에 관청이 열리고 닫히면서 귀가 먹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북과 그밖의 기구들을 가지고 있다.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훌륭한 관리'의 많은 돌비석, 하늘에 봉사한 희맹사들을 위한 넓은 터, 서원, 매우 더럽고 황폐해진 왕의 누각 등이 있다. 모두가 공손한 것은 아닌 군중들이 관청까지 우리를 따라왔는데, 나는 그곳에서 금강산까지의 길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바랐다. 관아를 들어갈 때 하급 관리는 매우 오만했다. 잠시 동안 그의 불쾌한 행동을 참고 나서야 더러운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그곳에는 경멸적이고 악의 품은 얼굴을 하고서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또가 담뱃대를 옆에 두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동양에서는 개인 면담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가 하인을 통해 짧은 대답을 내릴 때까지 우리는 뒤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의 압력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입구 바깥에 서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한국 관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다.

버드 비숍 여사가 왔을 무렵 그때 이곳 영춘군에는 1,500여 명쯤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갓진 시골 면소재지일 뿐이다.(...)

 

산딸기, 오디, 버찌에 앵두까지, 먹기만 했는가. 아침에 따온 오디에 소주를 부어 즉석 오디주를 만들어 저녁밥상의 반주로 들었고, 늦게사 딴 오디는 내일 또 반주로 먹기 위해 냉장고에 담아두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해찰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어두워오는 남한강변에서 밀려오는 피로와 쓸쓸함으로 저물어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다. 흐르고 흘러가는 강물은 멈춤이 없는데 내 생각은 자꾸자꾸 끊어지기만 하고 그 끊어지는 기억 속으로 김지하 시인의 시 한 편이 자막처럼 펼쳐진다.

 

남한강에서

김지하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애린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온달산성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온달산성 관광단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산신당을 지나 가파른 길에 오르자 아침인데도 금세 땀은 온몸에 흐르는데 바람 한 점 없다. 뒤따라오는 진재언 씨는 "아무래도 온달장군은 전쟁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산성을 오르다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야" 하고 말한다. 정말 그 말이 일리가 있을 만큼 가파른 길이다.

몇 년 전 이 산성을 오를 때만 해도 보수가 한창이었는데 성은 번듯하게 쌓여져 있고 성을 올라가는 데에는 나무 사다리를 세워놓았다. 온달산성의 정상에는 미세한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미처 못 쌓은 성을 쌓느라 발파작업이 한창이다. 안개 속에 아스라한 저 아홉 개의 봉우리 저편에 우리나라에서 손 꼽을 만큼 큰 절인 구인사가 있고 그 뒤편에 소백산이 있다.(...)

 

덕천교를 지나면 단양읍 덕천리에 접어든다. 좋은 샘이 있어서 덕천리라 이름 지은 덕천리에는 아평리로 건너는 덕천나루가 있고 웃덕천에서 매포면 도담리로 가는 나루가 웃덕천나루였다.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아랫덕천에서 도담으로 건너는 다리가 있다는데 덕천교를 지나서 물어보니 잘못 왔단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쉬고서 자신있게 얘기해 주는데 어쩌겠는가. 다시 다리를 건너가서 고수고개를 넘어 가리라 마음먹는다. 그런데 길은 사뭇 오르막길이다. 김형곤 씨는 오르막길은 날아갈 듯하다고 신나하지만 올라간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강 건너 덕천마을은 안개 속에서 평안하게 들어앉아 있고 바로 그 아래가 여천리이다.

 

비숖여사의 <한국과 이웃나라들>에는, “ 한강 훨씬 상류의 매우 아름답고 호수처럼 생긴 지역에는 최근에 버려진 마을이 있었는데, 호랑이들이 계속해서 주민들을 물어갔기 때문이었다. ”고 실려 있는 곳이다. 여천리의 선돌산 중턱에 큰 바위가 호랑이 바우로 호랑이가 살았던 곳이며, 웃말 북쪽에 있는 구남골(九男谷은) 호랑이가 아들 아홉 형제를 다 물어 갔다는 곳이다. (...)

그런데 그 아래 옛 철길로 강을 따라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놓치고 만 것은 두고두고 억울한 일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들과 그 지역을 잘 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그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딴 길로 들어, 두어 시간을 허비하게 된 것이다. "길은 잃을수록 좋다"라는 내 좌우명이나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일찍 온다"는 크롬웰의 말을 실천하지 않은 바로 내 탓일 따름이다.

 

산길을 굽이 돌아 내려가자 단양읍이다. 이색은 그의 시에서 "새벽에 단양 길을 향하니, 자석이 구름 병풍을 열었다" 하였고 최연은 그의 시에서 "여염이 시내를 끼고 있으니 뽕나무와 삼이 빽빽하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구름에 솟았으니 동학洞壑이 그윽하다" 하였다. 단양읍에서 도담삼봉으로 가는 길은 거꾸로 돌아가는 길이라서 흥조차 나지 않는다. 돌고 돌아 단양팔경 중의 하나인 도담삼봉에 도착한 것은 늦은 4시 20분이었다.

 

영월읍 거운리에서 영춘을 지나 단양에 이르는 길이 네 번째 여정에 펼쳐집니다. 동강과 서강, 그리고 상동천까지 합쳐져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 걸으실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