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산중산담 2013. 8. 4. 23:10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

- 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한강 천 삼백리 도보답사의 여정이 여섯 번째로 실시됩니다. 원주시 부론면에서 실시될 이번 여정은 고즈넉한 폐사지인 법천사지와 그윽한 숲길이자 남한강변에 펼쳐진 문체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인 <여강 길>과 남한강변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특히 남한강에 자리 잡은 신륵사에서 이틀을 머물며 펼쳐질 것입니다. 신륵사의 새벽예불과 신륵사에서 여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한편 이곳 흥호리 부근을 사람들은 삼합지점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겨울철 강물이 얼면 담배 한 대 필 참에 3도 땅을 다 밟아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3도의 물이 한데로 모인다 해서 합수머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모여지는 것이 물뿐만은 아니었다. 3도의 물산과 세미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어 남한강 뱃길을 따라 서울로 내려갔던 곳이었다.

섬강교 바로 위쪽으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고 섬강교 바로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섬강은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속설리 봉문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원성군 부론면 흥호리 동매마을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송강 정철이 "한수를 휘어돌아 섬강은 어드메뇨 치악은 여기로다"라고 노래했던 아름답고 유서 깊은 이 강의 원래 이름은 달강 또는 달래강이었다.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 강변에 병암이라는 바위가 절벽에 있는데, 이 병암 상류 50미터 지점에 한 마리 두꺼비가 기어오르는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바로 두꺼비바위이며 섬강의 이름을 탄생시킨 유명한 바위이다. 곧 두꺼비바위가 있어 이 냇물을 '두꺼비 섬蟾' 자를 써서 섬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호 1리 마을을 지나 북내면으로 접어든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들이며 논바닥에는 수많은 잠자리 떼들이 날아다니고 들은 넓고도 넓다. 조선 초기의 학자였던 서거정이 "강의 좌우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 백 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에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 데에 적당하며 모든 것이 다 넉넉하다"라고 말했듯이 여주군은 먹고 살 양식이 넉넉하게 나는 곳이다. 특히 "광주 분원 사기 방아, 여주 이천 자채 방아"라는 민요도 있듯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주군은 이천시와 더불어 쌀의 산지로 이름났다. 남한강 언저리에 널려 있는 기름진 땅은 물이 늘 넉넉하여 벼농사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리지』에서도 대동강 언저리의 평양과 소양강 언저리의 춘천과 함께 이곳을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촌으로 꼽았다.”

 

“소나무숲 우거진 길을 내려서자 신륵사 보제존자 부도비와 석등이 있는 유물전에 이른다. 태백에서부터 발원한 남한강이 흘러내리며 만든 여러 물굽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한 군데가 신륵사 부근일 것이다. 한강의 상류인 이곳을 이 지역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는데 주변의 풍경과 그 수려함이 하도 뛰어나 옛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초기의 학자였던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에서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으며 산이 밝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고 칭하여 오는데, 신륵사가 바로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 "라고 썼는데 김수온이 말했던 국도는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부터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함이었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의 새재를 넘어온 물산이나 강원도, 충청도에서 생산된 물산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의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부른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1974년에 팔당댐이 생기고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나라의 길'이라고 일컬어지던 뱃길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

 

전국의 3대 선원 고달선원

멀리 보이는 북내면 상교리에 남한강변의 이름난 폐사지 고달사가 있다.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의 고달사高達寺는 혜목산 아래에 있다. 아늑하게 감싸인 지형이 큰 소쿠리 속에 있는 듯하다.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창건했으며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추정하기로 이때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남한강의 유리한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경영했을 때였으므로, 고달사를 신라시대 창건설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보다는 원종 이전 나말여초에 세력을 떨친 선종 계통의 절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이면서 고달선원으로 불리었는데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회는 원감국사 현욱의 제자였고 진경대사는 원종대사에게 법통을 넘긴다.

김현준이 쓴 『이야기 불교사』에 "문성왕 2년(840년) 현욱선사는 거처를 여주 혜목산 고달사로 옮겼는데 사람들은 산 이름을 따와서 스님을 혜목산 화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선풍을 떨치다가 경문왕 9년에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라고 적고 있다.

고달사를 중흥시킨 신라 말의 고승이며 고려 초의 선승이었던 원종대사 찬유는 성은 김씨였고 자는 도광, 계림이며 하남에서 용의 아들로(경문왕 9년)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상주 공산 삼량사에서 융제선사에게 배웠으나 융제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서 혜목산의 심회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890년(진성여왕 4년)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광주 송계선원에 있던 원종은 심회의 권유에 따라 892년에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 서주 투자산의 대동大同에게 배우고 곧 도를 깨달았다. 그 뒤 중국의 여러 사찰들을 유람하다가 921년(경명왕 5년)에 귀국하여 봉리마에 머물렀고 원감국사 현욱에 이어 진경대사 심회에게 법맥을 이어받게 된다.

심회는 삼창사에 머물 것을 명하였고 3년 동안 머물렀던 원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에 따라 경주 사천왕사로 가게 되지만 다시 이곳 혜목산 고달사로 되돌아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국사의 자리에 오른 원종대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을 이룩하였고 혜종과 명종은 가사를 내렸으며 광종은 그를 국사로 책봉하고 증진대사라는 호를 내렸다.

국사의 자리에 오른 원종에게 임금은 은병, 은향로, 수정염주, 법의 들을 내렸으며 고려 왕실의 막대한 지원에 힘 입은 원종대사는 이곳 고달선원을 전국 제일의 사찰로 만들었다. 사방 30리가 모두 절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달선원은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전국 3대 선원으로 불렸다.

고달사지에는 석물만 남아 있고

현재 발굴중인 고달사터에 들어서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유물이 보물 8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불대좌이고, 석불대좌에서 서북쪽으로 보물 6호인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다. 1915년 봄에 넘어지면서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이 곳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또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라고 쓰고서 그 까닭을 "강의 상류에 마암馬岩과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는데 여주읍 영일루 아래에 있는 큰 바위가 마암이다. 그곳에는 목은 이색에 얽힌 일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년째 되던 오월 신록이 물들어 가는 이곳 여강에 한 척의 배가 떠 있었고 그 배에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3은인 목은 이색과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타고 있었다. 당시 이색은 이태조가 사신을 보내 벼슬을 내리는 것을 거절한 채 초야에 살고 있었고 이색의 제자들 역시 새 왕조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연후에 목은 이색은 술 한 병을 꺼냈다. 이성계가 보낸 술이었다.

그 술을 한 잔 마신 이색은 그 배 위에서 그만 세상을 하직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이색의 제자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색의 의문사는 세월 속에 잠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남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그 마암 건너편에 신륵사가 있다.

 

벽절이라고 불렸던 신륵사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에 원화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절 신륵사가 유명해진 것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 절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양주 회암사에서 설법하던 나옹선사는 왕명에 의하여 병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밀양의 형원사로 내려가던 중 이곳에서 입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을 이색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날 진시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었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씻고 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 보 안에 비가 내렸다. 이에 사리 1백 55과를 얻었다. 신령스런 광채가 8일 동안이나 나더니 없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퇴락해 가던 신륵사는 대대적으로 중창불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륵사의 절 이름에 얽힌 유래 두 가지는 이렇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자주 나타났는데 매우 거칠고 사나워 누구도 다룰 수가 없었다. 그때 이 절의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는 설이 하나이다. 또 다른 전설로는 나옹선사가 이 사나운 용마에게 굴레를 씌워 용마를 길들였다는 전설인데 그래서 절 이름이 신령한 '신'과 굴레 '륵'자를 써서 신륵사가 된 것이다. 또한 이 절 동쪽의 바위 위에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올린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이라고도 불리웠다.

나옹선사가 입적한 3개월 후 절의 북쪽 언덕에 진골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이 절 또한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가 크게 중창된 시기가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 인근에 있는 능서면 왕대리로 이전해 오면서부터였다. 세종의 깊었던 불심을 헤아려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로 삼았고 절 이름도 잠시 보은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임진, 정유재란 때 전소되면서 그때에 지어진 건축물로는 드물게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만 남아 있다가, 현종 12년에 계헌이 중건하면서 오늘날 신륵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거대한 기둥 두 개가 떠받치고 있는 신륵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먼저 강월헌에 올라선다. 본래는 석탑 밑에 붙어 있었다는데 큰 홍수로 떠내려가는 바람에 철근 콘크리트로 세운 6각 모양의 누각에서 우리 일행은 바위 위에 퍼지고 앉아 강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본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서 가고

강월헌에서 바라보면 날렵하게 솟아 있는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이 보이는데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국내 유일의 전탑이다. 탑이 대개 경내 중심부에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전탑은 금당의 본존불과는 무관하게 남한강과 그 건너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탑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기 무렵이었고 도선국사가 활동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풍수지리상 허한 곳을 보補하고 지기를 원활하게 하는 방법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데 설득력이 있다.

전탑 위쪽에 대장각기비가 있다. 신륵사에 있던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서 목은 이색 집안의 애달픈 사연이 어려 있다. 목은의 부친 이곡은 그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려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자 목은 이색이 그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장각기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체로 썼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구룡루가 있다.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인 구룡루를 돌아가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 있다. 좌측으로 빼꼼 열린 요사채 대문 사이로 세 마리의 개가 질서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오수를 즐기고 있고 대웅보전 앞 다층석탑 앞에는 절을 찾은 사람들이 탑을 바라보고 있다.

높이 3미터의 다층석탑(보물 225호)은 특이하게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신라나 고려의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룡문과 연화문, 그리고 물결무늬와 구름무늬의 조각들이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며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성종 3년(1427년)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대웅보전 좌측으로 돌아가면 나옹 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 앞에 신륵사 조사당(보물 180호)이 서 있다. 대들보가 없는 팔각지붕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자그마하면서도 예쁜 건물이다. 정면에는 여섯짝의 띠살 창호를 달고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체로 마감하였다. 이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 태조가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남아 있다.

조사당 뒤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옹선사 석종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등을 만나게 된다. 언덕 일대가 나라 안에 유명한 명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 나옹선사를 추모했던 수많은 제자들이 지극한 공력으로 만든 부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 영월루를 흐르는 남한강에는 아침 안개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나는 영월루에서 여주 팔경을 회상해 본다. 여주 팔경이나 금사 팔경은 옛날부터 이름났던 이곳의 빼어난 경치 여덟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이규보와 같은 많은 선비들의 시구에 남아 있는 이곳의 경치는 아직까지 여주 팔경으로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또 여주군의 형편이 바뀜으로써 더러 없어졌거나 바뀌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곳의 팔경으로 반도낙안―여강 언저리에 내려앉은 기러기, 동대망월―동대인 청심루에서 바라본 달, 연탄귀범―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학동모연―학동의 저녁 연기, 신륵종성―신륵사의 종소리, 마암어화―마암 아래에 떠 있는 고깃배의 등불, 어릉춘수―두 영릉의 신록, 자수장림―팔대수의 우거진 숲 등을 뽑았다.

또한 이곳 여주, 이천 사람들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로 "여주, 이천 사람은 참새에 굴레 씌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참새보다도 더 약다는 이야기이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여주에는 사대부의 집이 많아서 대를 이어 산다"고 기록했듯이 이곳에서 인물이 많이 났는데 명성왕후 민비와 민씨 집안의 세력에 도전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홍영식과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으로 알려진 이완용의 고향이 이곳 여주였다.

조선초기의 문신 임원준任元濬이 < 승목기陞牧記>에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밤낮 이틀의 노정路程이요, 남으로는 세 도道를 통하는 길이 읍邑 밑에서 나누어진다. 진실로 국가의 상유上遊를 눌렀고, 경기京畿 의 깊숙한 구역이다.‘라고 하였던 곳이 이곳 여주였다.

아파트 쇠창살 안에 갇힌 청심루터

여주여자종합고등학교를 지나며 길은 길대로 뻗어 있고 강은 강대로 길게 흐른다. 남한강에는 시베리아로 떠나지 못하고 남아 텃새가 된 듯한 일곱 마리의 청둥오리들이 유유자적 헤엄을 치고 있고 「여주문화의 거리」라고 씌어진 길은 한산하다. 아파트 쇠창살 안으로 옛 시절 청심루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보인다.

청심루는 『동국여지승람』뿐만이 아니라 『택리지』나 『연려실기술』과 같은 옛 기록에 거의 다 나오는 이름난 누각이었다. 고려 때의 가정 이곡, 목은 이색 또는 정몽주, 도은 이승인과 조선조의 서거정, 신용개 등이 시를 지어 현판에 걸었었다. 대들보가 하나인데 칡으로 되었다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청심루에 올라서면 여주 팔경을 거의 다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누각은 해방이 되자마자 일어난 폭동 때에 불에 타서 없어졌다. 그 폭동은 제국주의 일본과 그 앞잡이들한테 시달렸던 이곳 사람들이 일으킨 것인데 그때의 여주 군수였던 강진수가 그 앞잡이 노릇을 워낙 지독하게 했기 때문에 그 앙갚음으로 청심루 곁에 붙어 있던 그의 사택에 불을 지른 것이 청심루에 옮겨붙어 잿더미가 되었던 것이다.“

 

“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세종과 효종의 능인 영릉은 한자로는 틀리지만 읽기가 똑같아서 이릉이라고 부른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은 예종 대에 이곳에 옮겨졌는데, 『택리지』에 따르면 "여러 능 중에서도 첫째로 꼽았다"고 한다. 또한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은 원래 양주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는데, 헌종 14년(1673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곳 왕대리의 새능 동쪽 남한강에는 이기수, 여계수, 외계수라고 불리는 소가 있다. 이곳의 지형이 평양과 비슷하고 돈이 많으므로 술집과 여자가 모여들어 '소평양'이라고 불렀는데 1900년쯤까지만 해도 고급 요릿집이 즐비하고 술집 기생이 이백여 명이 넘어 고을의 풍기가 몹시 어지러웠다. 여주 목사가 이를 근심하던 끝에 꾀를 내어 모든 기생을 모아 뱃놀이를 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취흥이 무르익자 미리 준비한 대로 배 밑에 구멍을 뚫어서 모든 기생을 죽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비가 오면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나고, 해마다 사람이 빠져 죽는 사고가 난다고 한다.“

 

“ 이포나루에서 여정을 풀다

드디어 금사면 이포리에 접어든다. 조선시대에 세곡과 물화를 싣고 풀던 큰 나루였던 이포나루는 배개나루, 배나루, 이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지금은 간 곳이 없다. 천령현이었던 천령마을을 지나며 다리가 무거워진다. 이포떡방앗간, 이포우체국이라고 씌어진 간판들이 보이고, 기천서원이 있었던 원촌 서쪽에는 천령 최씨의 시조와 그의 묘소를 잡은 무학대사 그리고 산신당을 모신 삼신당이 있다.

이포대교에 이르러 강물은 쏜살같이 흘러서 가고 길은 서울 양평`-`원주 여주 37번 국도로 나뉜다. 여기 이포대교에서 마지막 4구간 여정의 막을 내린다. 멀리 양평 너머로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가다 보면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두물머리가 나오고 이제 서울이 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