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천삼백 리 한강 아홉 번 째를 걷는다.김포 고촌리에서 강화 보구곶리까지

산중산담 2013. 11. 29. 20:09

천삼백 리 한강 아홉 번 째를 걷는다.

- 김포 고촌리에서 강화 보구곶리까지-

 

2013년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의 정기 도보답사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다.> 여정 마지막 회가 11월 넷째 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실시됩니다. 지난 이른 봄에 시작되었던 여정, 천 삼 백리 한강 여덟 번째 도보답사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길은 남북분단을 상징하듯 계속 철조망으로 이어진다. 전호리錢湖里는 제진섭, 제진도, 저호, 전당리라고 불리는데 본래 김포군 임촌면의 지역으로서, 한강가에 섬으로 되었으므로 전당이라 부른다. 이곳 전호리에는 각시의 소유였다는 각시논이 있고 무당의 논이었다는 무당논이 있으며 개논 위에 있는 논은 어느 흉년에 술 한 잔을 주고 얻었다는 술한잔배미가 있다. 또 메물논 아래에 있는 논은 흉년에 인절미 한 개를 얻어먹고 주었다는 인절미배미가 있고 방죽논 옆에 있는 논은 모래가 많아서 마치 시루에 물을 부은 것처럼 물이 헤프다는 시루배미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하지만 바둑판처럼 경지 정리가 된 평야에 그런 논배미들 이름이 남아 있기나 하겠는가?

이곳 전호리와 신곡리 부근에서 굴포천이 한강으로 접어든다. 판개라고도 불리는 굴포천은 인천시 철마산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른 뒤 부천시 복판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흘러 부평평야를 이루고, 계양의 동북쪽을 거쳐 고촌면 전호리 평야를 지나 신곡리 경계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굴포천에 고려 때 운하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고려 제 23대인 고종 때 권세를 잡고 있던 무신 최이崔怡는 한강물을 끌어들여 운하를 만들려고 전호리에서 운하를 파서 계양면 상하리까지 파다가, 중지 하였다. 그 이름이 ‘김포 굴포’ 작업이었는데 현재의 인천시 앞바다 들머리에서 남구 간석동에 있는 원통이 고개까지 곧바로 뚫어서 현재의 강서구인 양천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강으로 들어가기 위한공사였다. 인천과 한강 양쪽에서 땅을 파들어 가다가 중단된 이유를 풍수가들은 풍수지리상 좋지 않았기 때문에 멈췄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무신정권이 몰락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사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만두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뒤인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이곳에 운하를 파다가 그 역시 죄에 몰려서 죽는 바람에 중단되기도 하였다.

애기봉 25km, 덕포진 28km. 날은 바람도 없이 후덥지근하다. 영사대교를 지나 다시 강가로 나서지만 견고하게 처져 시야를 가로막는 철조망 너머로 고양시와 자유로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자유로 위에 차들은 쉴새없이 지나가고 철조망 너머의 새들은 떼지어 날아오른다.

 

이곳 봉성리에는 가리밋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덕칠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보가 이 고개 밑에 살면서 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기었는데 장가를 가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놀리는 말로 이 고개에서 기다리면 아내 될 사람이 온다고 하자 이 고개에서 아내가 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지나가고 맨 나중에 아름다운 처녀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달밤에 혼자 달을 보고 그 처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그 처녀가 나타나 갈 곳이 없으니 같이 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하므로 기뻐서 같이 살게 되었고 그들은 부자가 되어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에 접어들고 여기서 부터가 옛 통진 땅이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 서거정이 김포를 두고 “사방이 확 트였다”고 했는데, 그래서 김포 토박이들은 김포를 두고 ‘산이 커야 골이 깊다“고 ’높은 산이 없어서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자조 했다고 한다.

이 김포에는 조선 시대에 이천의 자채쌀과 함께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밀다리쌀의 본 고장이기도 하다. 한톨한톨의 쌀에서 빛이 나므로 자광미라는 이름을 가진 밀다리쌀은 50년대에 하성면 석탄리의 권광옥씨가 재배해서 수확한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낼 만큼 그 맛이 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밀다리 쌀은 소출이 워낙 적어 지금도 하성면 일대에서 조금 재배되고 있을 뿐이다. 급속도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김포지만 지금도 김포쌀은 나라 안에서 품질이 좋은 쌀로 그 명성이 높다.

그 명성에 걸 맞는 벌판이 홍도紅島펄이라는 홍도평야인데 이 평야는 고촌면 향산리와 김포읍, 걸포리, 사우리, 북변리에 걸쳐 있다.

 

적은 이곳을 보고 있다

하지만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따갈 수가 없어 농로를 따라 걸어간다. 저 강 건너 오두산 통일전망대 쪽으로 보이는 강이 임진강이고 저 부분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흐드러진 채 흐르고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글귀, 「내가 근무하는 시간과 장소로 적은 꼭 올 것이다」 얼마나 지당한 말이며 또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더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휴전선은 강물 위에도 있다는 것이다. 서해 백령도에서 동해 고성까지 이어지는 휴전선에는 지금도 이렇듯 무심한 듯한 긴장이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다.

김포, 설탄 배수펌프장을 지난다. 돌여울, 도련이 또는 도연동으로 불리운 석탄리에는 조선 영조 때 안동 선비 권집경이 세웠던 능파정터가 있고, 천연기념물 제73호이며 수령 550년쯤으로 추정되는 석탄리 은행나무가 있다.

「적은 이곳을 보고 있다」고 씌어진 문구가 멀리 보이는데 소름이 끼친다. 우리들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모정동 북쪽에 있는 도당골에서는 도당굿을 했었고 능파정과 골말 사이에 있는 핑굿재에는 빙고가 있었다고 한다. 도련이 서쪽에 있는 디리물(두곡)에서 후평까지는 일직선으로 뻗은 제방 때문에 심심하기 이를 데 없다. 억새와 갈대가 숲을 이루고 꽃잎이 작은 쑥부정이 피어 있는 그 길에 며느리밑씻개와 한삼넝쿨이 가을볕에 노랗게 사위어간다. 버드나무 위에선 참새떼들이 나뭇잎이 떨어져 날리듯 우수수 날아가고 길은 후평리에 접어든다.

 

애기봉을 목전에 두고

그런데 난관이 생겼다. 금방 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애기봉을 바로 목전에 두고 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보초병이 가로막은 것이다. 초소에서 통행증을 끊어주어야 갈 수 있고 그것도 차로 간다면 몰라도 걸어서 갈 수는 없단다. 보고도 못 가는 애기봉이여. 한강이 그냥 한강이 아니로구나. 한이 많아 한강이로구나.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요" 하면 돌아가야 한다. 나는 갈 수가 없는 애기봉을 바라보며 황지우의 시 〈길〉을 떠올린다.

 

 

황지우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행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 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닻이었구나

 

갈 수가 없는 보신암 북서쪽에 있는 애기봉은 일명 쑥갓머리산으로 높이 143m이다. 이 산에는 평안감사와 사랑을 나누었던 애기의 슬픈 사연이 서려 있다. 의좋게 살고 있던 두 사람이 병자호란을 당하여 할 수 없이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종로에서 평안감사는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가고, 애기 홀로 조강리에 와서 날마다 쑥갓머리산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애타게 평안감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평안감사는 오지 않고 애기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내가 죽거던 저 봉우리에 묻어주시오" 그런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에 따라 이 산 꼭대기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1953년 휴전협정에 따라 휴전선 남쪽 끝이 되므로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에 비를 세우고 노산 이은상이 시를 지어 기리었으며, 그 옆에 30미터나 되는 철탑을 세워서 태극기를 달고,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에 오색 전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강의 하구 조강포祖江浦, 즉 조강나루는 통진에서 개성으로 건너던 큰 나루였다. 조강나루에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개성이나 한양으로 세미稅米를 싣고 가기 위해 만조滿潮 시간을 기다리는 조선漕船의 사공들이 모이는 큰 포구였다.

 

조세를 납부하는 철이면 전국의 여러 곳에서 모여든 배들과 뱃사공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포구에는 주막과 음식점 숙박업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곳 조강을 들어서서 한강을 왕래하던 뱃사람들에게 조강을 넘나드는 밀물과 썰물 곧 사리와 조금현상은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런 연유로 이규보는 조강 일대의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현상을 <조강의 날에 따른 밀물 썰물 시>로 남겼다.

 

초 사흘간은 토끼 때(卯時), 다음 사흘은 용 때(辰時)

또 다음 사흘은 뱀 때(巳時) 그 다음 1일은 말 때(午時)

양 때(未時)가 사흘이요, 그 다음이 잔나비 때(申時)

달이 기운 후에도 이와 같으니라.

이규보가 살펴본 것처럼 바다 조수의 밀물은 매달 음력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를 주기週期로 하고, 그 주기가 다시 16일부터 되풀이된다. 조강 근처의 조수는 초하루부터 사흘간은 아침 5시부터 7시 사이까지인 묘시에 밀물이 들고, 4일부터 6일까지 사흘 동안은 7시부터 9시까지인 진시에 들며, 7일에서 9일까지 사흘 동안은 9시부터 11시까지인 사시에 들고, 10일 하루만은 11tyl부터 오후 1시까지인 오시에 든다. 11일에서 13일까지 사흘 동안은 오후 1시에서 3시까지인 미시에 들고, 14일과 15일 즉 2일 동안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인 신시에 주기적으로 물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16일부터 그믐까지는 초하루에서 보름 때처럼 반복된다는 것이다.

 

월곶면 보구곶리에 드디어 도착한다. 한강의 발원지에서 이곳까지 514km, 멀고도 먼 여정을 달려온 저 강물은 저렇게 소리도 없이 흐르고 강 건너 북녘의 산들은 선명하다. 그러나 군초소에선 한강변에서 북녘 땅을 볼 수 있으리라던 우리들의 염원은 아랑곳없이 우리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지류 모든 강들을 받아들여 강화해협을 지나 서해바다로 들어갈 저 강물에 내 마음을 실어 보내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한강은 가을 햇살과 가을 구름에 휩싸여 저리도 짙푸르고 대북방송이 울려퍼지는 이 보구곶리의 컨테이너 박스에서는 "내일의 청춘아"라며 <럭키서울>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렇다. 이곳 보구곶리에서 서울의 축복, 서울의 은총, 민족의 대동맥이라고 불리는 어머니의 젖 같은 달디단 강물은 서해바다에 몸을 풀 것이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 "보구곶리甫口串里`:`본래 통진군 보구곶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보습처럼 생겼으므로 보습고지, 보스곶, 보수꼬지, 보수구지 또는 보구곶, 보구꼬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구곶리라 해서 김포군 월곶면에 편입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보구곶리의 한강에는 머머루, 머머리, 머머리섬이라고 불리는 유도가 있다.

그 옛날 홍수에 떠내려오다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오는 이 섬은 개가 누워 있는 모양으로 머리, 몸, 네 개의 발이 분명히 보이는데, 입과 코 부분에 높고 깊은 동굴이 있어서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가 있을 만큼이라 한다. 밑은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큰 이무기가 살았다 한다.

여름철 한강 상류에서 홍수가 나면 여러 가지 것들이 떠내려와 이 섬에 머무는데 그 가운데 뱀이 특히 많다고 한다. 옛날 이 섬에 자유로이 드나들었을 때는 뱀을 잡으러 오는 땅꾼들로 붐볐다 한다. 현재는 군사분계선 안에 있어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으나,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는 학을 비롯하여 왜가리, 두루미 등의 조류들에게는 이 섬이 조용하고 먹을거리인 뱀들이 많아서 지상의 낙원이라 할 만하다.

저기 염하를 건너 보이는 곳에 연미정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이다. 강화라는 이름은 한강이 강화섬 앞에서 바다로 접어들기 때문에 이 섬을 한강물이 빚어낸 한 떨기 꽃으로 비유하여 강의 꽃 ‘강화江華‘라고 하였다 한다. 강화읍 월곶리 동쪽의 바닷가에 있는 연미정燕尾亭은 본래 교동현 읍내리에 있는 정자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하여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 두 갈래가 되어 한줄기는 남쪽으로, 한줄기는 서쪽으로 흘러 마치 제비꼬리처럼 생겼으므로 연미정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유도섬이나 한강이 바다로 합류하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인데...

햇살은 점점 붉은 빛으로 사위어가고 강 건너 강화도는 짙푸르다. 우리들은 인천에 살고 있는 김현준 기자의 누님(김은희)과 이대원 씨의 차에 실려 서울로 전주로 돌아갈 것이다. 여섯 달 동안 꿈속에서도 그리워했던 보구곶리에 햇살은 저리도 찬연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상이 별것이냐는 듯이 강물 위로 가만히 내리쬐고 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보숫골 서쪽에 퉁수처럼 생겼다 하는 퉁수배미도 흉년에 팥떡과 바꿨다는 팥죽배미도 사람을 많이 묻었다 하는 구슬푼이도 오랫동안 그토록 그리워했던 보구곶리라는 풍경 속에 다시 묻어둔 채 돌아갈 뿐이다.

강은 나무와 같다. 수많은 지류들이 셀 수도 없는 가지가 되어 한강이라는 나무를 이루었고 나는 이제 그 마지막 기둥뿌리에 기대어 있다. "나의 삶은 한 권의 위대한 소설이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처럼 우리들이 한강을 따라 걸은 답사여정 역시 한 권의 소설이었다.

그렇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맹자가 말했듯이 낮은 데로 내려온 나는 다시 북녘 산하의 강들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두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바다가 잇닿는 지점까지 내려올 것이다. 언제 오리란 약속도 없이, 다만 조강나루터에서 개성 땅으로 배를 타고 노 저어 갈 것이라는 기대만을 안은 채 돌아갈 뿐이다. “

 

천 삼 백리 한강의 마지막 구간에 참가하여 강이 다하고 바다가 되는 그 경이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1.일시: 2013년 11월 23일(토요일)에서 24(일요일)일까지

 

2. 출발시간 및 장소: 서울 오전 7시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국립외교원 앞

전주 오전 4시 전주 종합경기장 정문 앞 출발

 

3, 답사지: 김포시 고촌리에서 애기봉과 조강포 지나 한강의 하구 보구곶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