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는다.
임진년 3월 넷째주인 24일(금)에서 26일(일)까지 봄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습니다. 섬진강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보성강을 따라 걷고 구산선문 중의 한 곳인 태안사를 답사할 예정입니다. 태안사 가는 길목의 고즈넉한 옛길이 얼마나 가슴을 아리게 하는지,
그리고 하동군 악양면에서 화개면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 길>과 꽃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나무 숲 들이 우거진 계곡의 물길에는
태안사로 오르는 산길은 올 적마다 호젓하다. 나무 숲 들이 우거진 계곡의 물길은 깊고, 세차게 흐르며, 산길을 돌아갈 때마다 피안으로 가는 다리들이 나타난다. 자유교, 정심교, 반야교를 지나 해탈교를 돌아서면 제법 구성진 폭포가 있고, 그 폭포를 아우르며, 백일홍꽃이 한 그루 만발해 있다. 지난해부터 보수공사를 위해 헐린 능파각 아래에는 이 나라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나무 다리가 있었다. 양쪽 난간에 90㎠쯤의 통나무를 걸치고 복판에는 나란히 널빤지를 올렸으며 노면 바닥에도 널빤지를 깔고서 능파각을 세웠었다. 그러나 나무가 세월 속에서 낡고 부실해지자 새로 세우느라 헐어버린 것이다. 능파각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길옆에 한국 전쟁 당시 이 부근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증명하듯 전투 경찰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서 있고, 얼마쯤 돌아가면 태안사의 절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존희의 글씨로 동리산태안사(棟裏山泰安寺)라고 쓰여진 동판이 걸려있고, 일주문인 봉황문을 들어서면 부도 밭이다. 태안사를 중창해 크게 빛낸 광자 대사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호)와 부도비(보물 제275호)를 비롯 다른 형태의 부도가 몇 개가 서있고, 부도밭 아래 근래에 들어 만든 큰 연못이 들어서 있다.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탑을 세웠으며, 그 탑에는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안치 했다. 그리고 나무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나무다리는 거의 썩어 있어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아무래도 천년 고찰 태안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못이다.
광자대사 윤다는 8세에 출가, 15세 이 절에 들어 33세에 주지를 맡았다. 신라의 효공왕의 청을 거절한 윤다도 고려 왕건의 청을 받아들여, 이 후 고려 왕조의 지원을 받아 크게 부흥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적인선사 혜철의 비를 그대로 빼어 닮은 윤다의 부도비는 비신이 파괴된 채로 이수와 귀부 사이에 끼어있다.
구산선문의 하나였고,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태안사는 한때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만큼 세력이 컸으나, 고려 중기 송광사가 수선결사로 크게 사세를 떨치는 바람에 위축되었다. 조선 초기 승유억불정책에 밀려 쇠락한 채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 하였는데, 그나마 절이 유지된 것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원당사찰이 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숙종, 영조 때 연이어 중창, 대가람이 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일주문과 부도 탑들 뿐이었다.
○청화스님이 주석한 절
안마당에 들어서기 전에 큰 건물이 보제루이고, 문이 시원스럽게 열려진 대웅전은 전쟁 중에 불타버린 것을 봉서암에서 20년 전에 옮겨왔다. 그 뒤 태안사가 여러 채의 건물을 새로짓고 청정한 도량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은 우리시대의 고승 청화 선사가 수십 년을 이 절에 주석하면서 이룩한 성과였다. 속명이 강호성(姜虎成)으로 1923년에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 철학과를 수학한 뒤 동양철학에 심취했으며, 진보적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해방이후 극단적인 좌우익의 대립을 지켜보다가 더 큰 진리공부를 위해 출가했다.(...)
청화스님은 1985년 태안사에서 주석하면서 탁발수행과 떠돌이 선방좌선을 매듭지었다. 6. 25때 불타버린 후 퇴락해있던 태안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그해 10월 스물한명의 도임과 함께 3년 동안 묵언수도를 계속하며 일주문밖을 나서지 않은 채 3년 결사를 하였다. 그 당시 청화선사의 3년결사는 세상의 이익에 급급한 채 수도 정진을 게을리 했던 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었다.
청화스님은 이후 옥과의 성륜사를 일으켜 세웠고 미국에 한국불교를 전파하다가 성륜사에서 몇 년 전에 입적하였다. “불교든 기독교든 역사적으로 위대한 철학이라고 검증된 것이라면 믿어볼 만합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하나된 우주의 법칙으로 불교나 기독교는 수행법이 서로 다른 방법일 뿐 궁극적으로는 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청화스님을 시인 최하림은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향훈(香薰)이 큰스님”이라고 표현 했는데 그는 모든 수행은 “정견을 바탕으로 선오후수(先悟後修:먼저 깨달아 버리고 수행하는 것)하는 것이니 불성체험에 역점을 두고 정진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정견(正見)은 바른 인생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과 같은 뜻이며 진리에 맞지 않는 업으로 우리가 고통을 받으므로 행복을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을 확립해야 하고, 거기에 따른 행동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송광․화엄사의 본산이던 태안사
태안사는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28년까지 대안사大安寺로 불려오다 조선 이후 태안사太安寺로 불렸다. 이는 절의 위치가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들이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에 따듯하여 심성을 닦고 기르는데 마땅한 곳이다.’라는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 비에 써 있는 r것처럼 대와 태의 뜻은 서로가 통하는 글자이고, 평탄하다는 의미가 덧붙여진 이름 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절이 지어진 것은 신라 경덕왕 원년 세 명의 신승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태안사가 거찰이 된 것은 신라 말에서 고려초기에 걸쳐 적인선사 혜철과 광자대사 윤다가 이절에 주석하면서 부터였다. 적인선사의 법명은 혜철이고 자는 체공으로 경주에서 원성왕 원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꿈에 한 스님이 서서히 걸어들어 오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어 낳았으므로 그때부터 출가할 그릇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냈으며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절을 찾기를 즐겨 하였다. 그는 15세에 출가,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 하였다. 그것은 그 당시 널리 읽히던 사상이 화엄사상 이었으며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부석사가 해동 화엄종찰 이었기 때문 이었다.
(...) 그의 선풍은 여선사, 광자대사로 이어졌다. 혜철의 부도와 부도비는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스님들의 선방을 지나야하므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가 요즘에야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고 있는데 그 배알문안에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가 있다.
배알문은 전주가 자랑하는 명필 이삼만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있는데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제법 운치 있는 문으로 유물을 향해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경배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부도(보물 제 273호)는 전체 높이가 3.1미터에 달하는 팔각원당형으로 적인선사 조륜청정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철감선사 부도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처럼 철저한 비례 속에 구현된 화려함은 별로 없다. 그러나 땅 위에서 상륜부까지 팔각을 기본으로 삼아 조용한 장엄함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도 옆에는 혜철의 행적을 비롯 사찰에 관계된 여러 가지 내용을 적은 부도비가 서 있는데, 1928년에 파손된 비신을 새로 세울 때 광자 대사 부도비의 이수와 바뀌 었다고 한다. 신정일의 <사찰 기행> 중
“저 악양에는 기름지고 풍요로운 들판에 걸맞게 이름난 부자 집이 몇 채가 있었다.
악양 소재지 첫 마을 강 부자집이 첫 번째이고, 상신마을에 있는 조 부자 집이 두 번째다. 우리들은 가끔씩 기억 속에 최참판 댁을 찾아가듯 상신 마을 조부자집을 찾아갔다.
백 칠십 여년 전에 지었다는 조부자집은 대지만도 1천여평이 넘는데 소슬대문과 행랑채와 지금도 변함없는 몸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집의 12월이나 1월은 곶감이 마루가득 걸려있다. 우리들은 그 곳에서 눈치껏 곶감을 빼어먹고는 즐거워(?) 했다.
섬진강 답사 길에는 빼놓지 않고 들렀던 조부자집에 가기 전 먼저 악양 소재지 삼미식당에서 봄내음 가득한 점심을 먹는다. 쑥국에다 취나물에 깻잎과 마늘장아찌 등이 어울어진 점심 반찬에다 맛있기로 소문난 악양 막걸리까지 한잔씩 걸치니 이 얼마나 한갓진 아름다움인가. 포만감으로 길을 나서서 조부자댁을 찾아가니 조성한씨는 기꺼이 저녁잠을 재워 주시겠다고. 그래 한나절만 열심히 걷고 저물어갈 무렵 돌아와 오랜만에 조선집 군불을 지핀 방에서 잠을 자보자.
보리가 심어진 악양 벌판엔 엷은 봄 햇살이 내려앉았고 19번 국도는 자동차들이 쌩쌩거리며 지나간다. 2급하천수 악양천이 합류하는 이곳 악양면 미점리는 미장이가 쓰는 흙손을 만들던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미점이라고 부르는데 개치마을은 입구에서부터 축사에서 나오는 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한때는 좋았던 집 한 채는 무너져가고 그 집에는 냉장고 등 온갖 가구들이 그대로 썩어가고 있다. 정각 6시에 멈추어 버린 저 집은 언제쯤인가 헐리고 말 것인데 그래도 노오란 산수유 꽃 나무는 꽃을 활짝 피우고 있으니
노란꽃이 만발한 산수유꽃
개치 남쪽에 있는 등성이인 갈미정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하고 악양산에는 악양루터가 있다. 옛날 중국의 명승지의 하나인 악양현을 본 따 이곳에 누각을 지었다는데 그 또한 세월 속에 사라지고 없다. 큰 팽나무가 늘어진 거리를 지나 하동읍 흥룡리에 접어든다.
하동 8km, 강은 이제 깊고도 넓게 흐른다. 그 흐르는 강물 위로 새 한 마리 날아오르고 마을에는 우유빛으로 빛나는 매화꽃들이 저렇게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이제 대나무숲은 오후의 바람을 받아 살랑거리고 강 건너 백운산 자락에 매화꽃들이 만발해 있다. 흥룡횟집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이곳에 있는 용소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흥룡이라 이름 지은 이곳에는 모든 이름들에 용이 안 들어 간 곳이 별로 없다. 와룡폭포, 와룡산, 용소, 용옥골, 용추, 흥룡이라는 이름들 속에 용 세 마리가 등천했다는 삼룡동까지 있으니 환상 속의 동물인 용이나 봉황을 그리워했던 옛 사람들의 절박한 소망을 알 법도 하다. 강은 이곳에서 바다나 다름없다. 저 건너 쫓비산 뒤쪽으로 억불산이 있고 그 뒤편에 백운산(1217m)이 늠름하게 펼쳐져 있다. 이름도 이상하게 쫓비산이다.
다압면 고사리는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 이라고 하여 고사리라고 지었다는데 고사골에는 비나 눈이 내려 날씨가 궂으면 근처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기신바우가 있고 매산바우 서쪽에 있는 버지골마을에는 버드나무가지에 꾀꼬리가 집을 짓는다는 “유지앵소혈”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길가에는 웬 재첩국집들이 그리도 많은지 저 섬진강에서 갓 잡아 올린 재첩으로 만들었다는 재첩도 알고 보면 우리나라 것이 별로 없고 값이 싼 중국산이 대다수라고 한다. 포장도로를 멀리하고 제방둑으로 올라선다. 그런데 가다가 금방 길이 끊어지고 배나무 과수원 길로 접어든다. 가도 가도 끝없는 이 배나무 과수원 길이 언제쯤 끝날 것인가. 생각하는데 뒤따라오던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려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테지 강가로 내려가는 길은 대나무 숲이 가로막고 그 아래는 낭떠러지다 보니 엄두조차 낼 수가 없다.“
<섬진 강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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