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남해 보리암과 김만중의 적소 노도,

산중산담 2012. 3. 13. 13:52

남해 보리암과 김만중의 적소 노도,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구름이 가득하여 남해금산 보리암에서 일출을 보고자했던 소망은 물 건너간 듯하였다. 그러나 행여 하는 마음으로 도착한 보리암은 매서운 바람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귀와 손발이 무척 시리도록 추웠다. 그런데도 상주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점점이 떠 있는 섬을 바라보며 조선 전기에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자암 김구가 ‘한 점 신선의 섬, 즉 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 찬탄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리암 주지 스님인 능인 스님과 다과를 함께 하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고 상주해수욕장에서 대량까지 남해 바래길을 걷고서 다량에서 배를 세내어 노도로 향했다.

 

대량 마을에서 1킬로미터쯤 배를 타고 건너면 닿는 자그마한 섬 노도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던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익겸(益謙)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만중은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이 되고 헌납(獻納)·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고, 이때 <서포만필西浦漫筆>을 지었다.

 

“사람의 마음은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절주節奏를 가지면 문학작품이 된다.”고 하면서 조선 사대부들의 중국문화 추종과 한문학 모방을 질타했다.

 

“우리나라 시문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므로 설사 십분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하는 짓이다. 일반 백성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아아’하면서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 하지만, 만일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른바 시詩니, 부賦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그는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인 노도에 유배되어 3년여의 세월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김만중이 그렇게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김만중은 많은 시문과 잡록,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구운몽〉·〈사씨남정기〉등 의 소설을 지었다.〈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씌어 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였다.

김만중이 이곳에 유배중일 때 하루 종일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한숨을지친었기에 이 고장 사람들은 그를 두고 놀고먹는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노자묵자 할배’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늑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

방장봉래봉은 가까이 있도다.

육친인 형제 숙질과는 떨어져 홀로 외롭게 살건만

남들은 나를 신선으로 알겠구나.“

 

김만중의 시 한편이 남아 전하는 노도에는 그의 적소였던 집과 우물, 그리고 그의 허묘墟墓만 남아 있다.

그가 그리워 한 육지는 남해 섬 바깥에 있지만, 양아리, 대량, 벽련 마을은 지척에 있으면서 김만중의 그리움을 자아냈을 것이다.

노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전에 밀려오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지친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임진년 이월 스무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