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2012년 4월 둘째 주인 13일부터 정기기행으로 우리나라 옛길인 <관동대로>를 걷습니다. 몇 년 전 걸었던 동대문에서 울진 평해까지 이르는 길이 아닌 거꾸로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에서 대관령을 넘어 서울 동대문까지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서부터 시작될 길은 울진을 지나 그 아름다운 삼척지방의 옛길을 지나고 동해를 지나 강릉에 이를 것입니다. 대관령을 넘은 여정은 평창과 횡성을 지나 원주에 이를 것입니다. 문막을 지난 여정은 양평에 이르고 두물머리(양수리)를 건너면 남양주, 구리로 이어지고 망우리를 지나면 동대문에 이릅니다.
그 길에는 월송정, 망양정 옛터, 용화 해수욕장, 죽서루, 대관령, 등, 아름다운 역사유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옛 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들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옛길은 9대로였습니다. 그중 관동대로가 <동국여지비고>제 2권에 서울에서 우리나라 각 지역에 이르던 9대로 중의 제 3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북西北으로 의주義州에 가는 것이 제 1로가 된다. 홍제원弘濟院과 양철평梁鐵坪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수라진慶興府 西水羅津에 가는 것이 제 2로다. 흥인문興仁門과 水踰峙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가는 것이 제 3로가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中梁浦중랑포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 부산진으로 가는 것이 제 4로가 된다. 숭례문과 한강진漢江津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固城縣과 통제사영에 가는 것이 제 5.6로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 5로가 되고,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 6로가 된다. 남으로 제주로 가는 것이 제 7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남으로 보령현保寧縣 수군절도사영에 가는 것이 제 8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으로 강화부로 가는 것이 제 9로가 된다. 양화진楊花津을 경유한다.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경흥의 서수라로 가는 제 2로와 평해로 가는 제 3만이 이곳 동대문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를 거쳐 가야할 강원도는 영동과 영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산수자연이 빼어난 곳 영동지방에는 예로부터 바닷가 곳곳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와 누각들이 많았고 원주와 춘천지방을 아우르는 영서지방은 생산물이 풍부해서 사람 살기에 적당했습니다.
백두대간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 잡은 서로 다른 지방이라서 그런지 여러 풍속들이 다른 게 많았습니다.
영동지방은 기후가 따뜻해서 삼베를 만드는 삼이 잘 자라 사람들이 삼베옷을 많이 입었습니다. 그러나 춘천과 원주 일대의 영서지방에서는 삼이 잘 자라지 않는 대신에 가을철의 건조한 기후를 이용하여 목화재배가 성했습니다. 그래서 솜으로 짠 무명옷이 그 당시 이 지역 서민들이 보편적으로 입었던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쩌다가 영동과 영서지방에서 큰 고개를 넘어야 하는 혼사가 이루어지면, 혼주들이 그 지방에서 나는 옷감으로 혼사 때 입을 옷을 만들어 입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제 고장에서 귀한 옷을 차려 입는답시고 영동에서는 무명옷을 입고, 영서에서는 삼베옷을 입어 오히려 천한 옷차림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대관령 넘어 영동지방은 관동팔경과 금강산 설악산 두타산 등 산수 자연이 빼어나 수많은 문객들의 답사처가 되었습니다. 이승휴, 이곡. 이색. 원천석. 김시습. 원호. 남사고. 이산해. 양사언. 김창협, 허균. 허난설헌. 이식. 허목 등, 역사 속에 자취를 남긴 기라성 같은 사람들의 자취가 서린 곳이 관동대로가 지나는 길목인 관동지방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이름난 유배지가 많았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관동대로의 종착지인 평해에 유배를 가서 몇 년간을 지낸 이산해의 글을 보면 그 당시 그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낙후가 심해서 미개인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처음 유배지로 갈 때 기성箕城경내로 들어서니, 날이 이미 캄캄하여 사동沙銅 서경포西京浦에 임시로 묵게 되었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거리가 수십 보가 채 안되고 띠 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십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 땅에 한 참을 앉았노라니, 주인이 관솔불을 밝혀 비추고 사방 이웃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가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 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악취가 나서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놀라, 궁향窮鄕 벽지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보다 생각하였다. 그 후 사람들에게 물어본 즉 이곳이 이른바 바닷가의 단호(蛋戶. 바닷가에 사는 미개인의 집)란 것으로 기성에만 열 한곳이 있으니, 여음. 율현. 구미. 해진, 정명. 박곡. 표산. 장정. 도현. 망양정 등이며 사동도 그 중 한 곳이라 하였다.“
문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한 번도 궁핍한 것을 모르고 살았던 당대의 재상 이산해가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그런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 관동대로입니다. 그 길에 서린 역사와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애환이 서리서리 얽힌 길을 별 탈 없이 걸은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었습니다.조선시대의 옛길은 그저 사라져간 역사의 길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해즙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토를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며, 현대인들의 건강을 책임져주고 새로운 관광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영남. 삼남. 관동대로와 남한의 5대강을 걸은 여력으로 부산해운대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동해트레일을 걸었습니다. 북한을 포함한 우리 땅 어디건 간에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위하여 <우리 땅 걷기> 도반들의 우리 땅을 걷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끝냈다는 포만감과 안도감으로 점심을 마시며 낮술 한 잔씩을 마신 뒤 적당히 지치고 그리고 나른한 몸으로 평해 터미널에 들어섰다. 무심결에 버스 요금표를 보았다. 나흘 전 떠나온 동해까지의 버스 요금이 11400원, 느림의 속도와 빠름의 속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흘 동안 죽기 살기로 걸어온 거리를 차비 11400원이면 갈 수 있고, 버스로는 80키로 속도로 1시간 반이면 도착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사랑을 알았다. 나는 방랑하는 모든 것의 옆을 스쳐갈 수 있기 위하여 스스로 방랑자가 되었다. 어디서 몸을 녹여야 할지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고, 유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나는 방랑을 통하여 나 역시 국토를 알았고, 사람을 알았고, 자연을 알았으며 길에 대한 사랑을 알았다. 이미 알아버린 그 사랑을 위해 나는 이 길이 끝나자마자 다른 길을 예비할 것이고 다시 길 위에 설 것이다.
길의 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길의 시작이다.
서울로 갈 사람들을 보내고 대구를 향해 바닷길을 달린다. 밀려오는 파도 속에 내가 걸어온 그 길이 하나둘씩 물살로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길이 끝난 지점에서 내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 희미하게 보였고, 그 때 <법구경> 중 몇 구절이 가슴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그네는 마침내 고향집에 이르렀다.
저 영원한 자유 속에서
그는 이 모든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그를 묶고 있던 오랏줄은 풀리고
헛된 야망은 이제 꺼져 버렸다.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니
그의 곁에 살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도록 하라.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기쁨이다. 영원한 기쁨이다.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가지 말라
거기 원치 않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원수와 함께 사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거기 기쁨은 넘쳐 강물로 흐른다.
그 영혼이 새벽처럼 깨어 있는 사람
인내심이 강하고 고개 숙일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의 뒤를 따르리.
저 별들의 뒤를 따르는 달처럼 <법구경>“
휴머니스트 간<관동대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관동대로 구둔재(구질현)를 넘으며,
무왕리를 벗어나자 지평면 일신리에 이른다. 노일과 신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일신리 구둔九屯에서 양평군 양동면 매월리로 가는 길이 어젯밤 내내 밤잠을 설치게 했던 길이다. 길이 과연 남아 있을까? 부딪쳐 보자, 하면서도 지도상에 마땅히 길이 없기 때문에 그저 막막하게 불안하기만 하다. 이런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도 여러 번 길 없는 길을 가면서 헤맨 탓이다. “한 번 덫에 걸린 새는 모든 덤불을 두려워한다.”는 서양 속담도 있지 않은가?
노일 북쪽에는 먹을 만들었다는 먹방(墨方)이 있었고, 구둔 서쪽에는 금동이라고 부르는 거문골 마을이 있으며, 거문골 동쪽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못저리라고도 부르는 지산池山마을이 있다. 다행히 마을 입구에서 이 마을 토백이라는 황은석(74세)씨를 만났다.
구둔재를 넘어 가는 길
이마을 토박이라는 황은석씨에게 구둔재를 넘어 양동면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한 20여 년 전만 해도 그 고개를 넘어서 양동장에 갔어, 옛날에 어른들에게 들은 애긴데 구둔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전쟁을 아홉 번이나 치러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황노인의 말을 듣자 우선 안심이다. 20여 년 전에 넘었던 고갯길이라면 아무리 사람이 안 다녔어도 어렴픗하게 길을 있을 것이다. 마음 다지며 바라본 구둔 마을 뒤편 산 능선, 저곳이 우리가 넘어야 할 구둔치일 것이다.
마을은 평화롭게 가을 햇살을 받으며 펼쳐져 있고 다시 마을입구에 들어서자 나이 많으신 노인 한 분이 앉아계신다. 이 마을에 오래 사셨느냐고 묻자 그분 역시 이 마을 토박이란다. 이름은 최수복, 나이는 자그마치 97세란다. 나이가 많은데도 기억력이나 말씀도 또렷하다. “이 마을 뒤에서 매월리로 가는 고개가 구둔재여. 옛날에 소장사들이 소 많이 끌고 넘어갔어. 양평장 용문장 홍천장을 떠도는 장사꾼들도 몇 명씩 떼를 지어 넘어 갔고, 우리도 매월리로 해서 양동장을 다녔지, 도적놈들이 많았대, 그래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넘었다는데,”
우리나라 고개 밑에는 어딜 가나 도적들에게 피해 입은 민중들의 절절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다. 도둑이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하는 나쁜 짓 또 그러한 사람을 도적盜賊. 투아偸兒. 적도賊盜. 적賊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삼대도적이 홍길동과 일지매 그리고 임꺽정이며 그들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도둑들은 정치가 또는 사업가라는 탈을 쓴 간 큰 도둑들일 것이다.
“도둑놈도 핑계는 있다” “도둑놈도 의리가 있고 개통 참외도 꼭지가 있다”는 말도 있지만 “도둑놈 재워 주었더니 제삿밥 먹고 소까지 훔쳐 간다.” 도둑놈 재워 주면 새벽에 쌀 섬지고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선중기의 이 율곡의 글을 보면 “십년 전에 갔을 때 백여 호가 살던 마을이 십여 집 밖에 안 남았다.”는 글이 있고 그것을 십실구공十實九空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오죽했으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도둑이 되었을까?
도적도 많고 고개가 가파르다 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원래 관동대로 길이던 석실. 매월리 구둔재. 전양고개 를 넘지 않았다. 그 대신 석실 금왕리 고송리 용문면 광탄리 다문리를 통해서 가다보니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뜸해졌다고 한다. 이 길을 다른 데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 있는 터널을 지나자, 집 한 채 보이고, 산으로 향한 길이 보인다.“ <관동대로> 휴머니스트
2007년 가을 관동대로를 넘던 때의 기록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바가 없고,
단지 그 옛길을 문화재청에서 국가 명승으로 지정한 것이 다르다.
옛 시절 이 길을 넘었던 사람들은 누구이고,
다시 이 길을 넘는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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