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담양과 순창, 지리산에서 맛과 멋에 취해 역사의 숲길을 거닐다.

산중산담 2014. 5. 6. 11:18

담양과 순창, 지리산에서 맛과 멋에 취해 역사의 숲길을 거닐다.

 

 

지나간 시절 그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면 좋은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무등산 자락에 자리 잡은 무등산 둘레 길과 광주호 주변에 산재한 정자문화권입니다.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척, 면앙정 송순, 김덕령, 석주 권필, 임억령, 김성원을 비롯 조선 중엽에 수많은 학자들과 문장가들이 무리지어 노닐었던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독수정과 권필의 자취가 서린 취가정,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송강정, 명옥헌, 충장사, ,개선사터 석등이 정자문화권에서 만나게 될 아름다운 문화유산입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E.H. 카아가 갈파했듯 역사 속에 길을 걷다가 보면 만나게 되는 자연유산들이 있습니다. 담양의 관방제 숲과 메타세퀴아 길이 바로 첫날에 걷게 될 길입니다.

두 번 째 날은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성 하나로 알려진 금성 산성을 거쳐서 일 년에 백몇십만 명이 찾는 아름다운 길, 강천산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수많은 폭포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보면 강천사에 산경표를 지은 여암 신경준 선생 집안의 원찰인 강천사에 이를 것입니다.

금성산성에서 강천사에 이르는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속에 스민 역사와 문화를 반추하면서 걷는 길의 묘미를 깨우쳐 줄 것입니다.

산동리, 창덕리, 남근석과 순창읍의 귀래정. 그리고 섬진강의 물길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향가리 유원지 일대, 그 길이 이번 답사에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세 번째 날은 남원에서 함양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 길 중에서도 가장 진수인 1코스와 3코스를 걷게 될 것입니다.

길에서 역사와 문화를 섭렵하며 남도에 멋과 맛을 함께 느끼는 길 위의 인문학에 참여를 바랍니다.

 

“무등산 북쪽 원효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이룬 광주호 변에는 16세기 사림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으로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취가정, 독수정, 풍양정 등의 정자들이 있다.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있는 독수정은 이백의 시 구절인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이 처음 세웠고 송강정은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다.

송강정은, 정철이 율곡이 죽은 1584년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을 그만두고 돌아와 초막을 짓고 살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우의정이 되어 조정에 나가기까지 4년 동안을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기름진 들이 넓었던 담양에는 큰 지주가 많았고 그 경제력에 힘입어 봉건시대의 지식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했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 터를 잡고 말년을 보내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 지역에서 그들이 활동을 하게 된 연유는 16세기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士禍에 의해서였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석리 광주댐 상류에 위치해 있는 소쇄원은 남쪽으로는 무등산이 바라보이고 뒤로는 장원봉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이 터를 처음 가꾸었던 사람은 양산보였다.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양산보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 신진사류의 등용문이었던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받지는 못했다.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화순 능주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상에 환멸을 느낀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별서정원 소쇄원을 일구면서 55세로 죽을 때까지 자연에 묻혀 살았다. 흐르는 폭포와 시냇물을 가운데 두고 대봉대에서 외나무다리를 지나 그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감상하도록 만들어진 소쇄원에는 열채쯤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만이 남아있다.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계곡, 담벼락, 연못, 폭포, 계단, 다리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자연스러움을 연출한 소쇄원을 우리나라 정원문화의 최고봉 또는 ‘건축문화의 백미’라고 일컫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식영정 근처에는 그 사이 가사문학관이 들어섰지만 식영정으로 오르는 돌계단만은 옛날 그대로 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것은 이미 옛말이고 2년도 안되어 강산이 변하는 세상이다 광주호가 들어서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지만 댐이 생기기 전 이 앞의 냇가에는 배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어서 자미탄이라고 불렀다.

성산 자락에 자리잡은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 임익령을 위해 1569년에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은 장자의 고사중에서 “도를 얻은 뒤 제 그림자마저 지우고 몸을 감춘다”는 식영론을 인용한 것인데 이곳의 경치와 주인인 임억령을 찾아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송순,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백광훈, 고봉 송익필, 고경명 등이 그들이었다고 그중에서 김덕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의 식영정의 4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식영정은 스승의 자취보다 제자 송강의 터로 더 유명해졌다. 서하당 김성원의 가계가 몰락한 후 성산별곡을 지은 송강의 후손들이 이 정자를 사들여 관리해 온 탓에 정자마당에는 송강문학비가 들어서 있고 입구에도 송강가사의 터라는 기념탑이 서 있다. 식영정에서 자미탄을 건너 마을길을 버리고 산길을 올라가면 환벽당이 있다. 서화당을 세운 김성원과 환벽당을 세운 김윤제는 자미탄 위에다 다리를 놓고 서로 오가며 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후산 마을 명옥헌 부근에 터를 잡고 무등산 자락에 펼쳐진 원효계곡 일대를 오가며 삶을 영위한다면 마음이 한가하고 또 한가할 것이다.“

신정일의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33곳> 중에서

 

우리 국토는 하나의 대간인 백두대간(白頭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인 장백정간, 그리고 열세 개의 정맥(正脈)이 큰 강의 유역을 이루고 있다.

그로부터 가지를 친 지맥들이 내와 골을 이루어 삶의 지경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분류하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나라 등뼈를 이루는 것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성신여대의 양보경 교수는 <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과 국토 인식>에서 신경준의 <산수고>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산수고>는 우리나라의 산과 강을 각각 12개로 나누어 정리한 한국적 지형학이라고 볼 수 있다. 산과 강을 중심으로 국토의 자연을 정리한 이 책은 우리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서이자, 한국적인 산천 인식방식을 전해주고 있다.“

신경준은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들과 달리 기예와 기술을 매우 중시했고, 명분과 허명을 좇지 않으면서 내용과 실질을 숭상하였다.

 

“꽃 중에 이름 없는 꽃이 많다. 무릇 사물이란 스스로 이름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아직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 수 있지만, 반드시 이름을 지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사물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이름 밖에 있는 그 무엇이다.

사람이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이름이 좋기 때문이 아니며, 좋아하는 옷도 그 이름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맛있는 생선구이가 있다면 배불리 먹을 뿐, 어떤 고기인지 모른들 어떠랴. 가벼운 털옷이 있다면 그 옷을 입어 몸을 따습게 할 뿐, 어떤 짐승의 가죽인지 모른들 떠 어떠랴.

내가 본 꽃에 이미 사랑을 느꼈다면 그 꽃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될 것인가?

그 꽃에 대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면 아예 이름을 지을 필요조차 없겠으나 그 꽃에서 사랑을 느낄만한 것이 있어 이미 그 사랑을 느꼈다면 구태여 이름을 지을 필요 또한 없지 않은가?“

<여암유고旅菴遺稿> 권 10 <잡저>에 실린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이라는 글이다.

이름이 없어도 이름을 몰라도 그 본질에는 아무런 모자람이 없다는 글로 신경준의 생각이 잘 드러난 글이다.“

신정일의 근간 <조선의 진보주의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