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네 번 째-부안 줄포에서 새만금을 지나 군산으로 가는 변산 마실길-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네 번 째
-부안 줄포에서 새만금을 지나 군산으로 가는 변산 마실길-
2014년 5월에 예정 된 서해안 걷기 네 번째는 서해안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유서 깊은 길인 부안의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바깥 변산과 안변산 일대입니다.
줄포에서부터 곰소를 거쳐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변산 마실길에는 나라 안에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솔섬이 있고, 모항의 아름다운 포구와 숲길, 그리고 격포의 채석강과 적벽강 등 명소가 즐비합니다.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을 함께 할 사람들의 참가를 바랍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살 만한 땅
“그밖에도 두승산․상두산과 가까운 정읍시에 편입된 태인․고부와 바다에 가까운 부안․무장 등의 고을은 모두 나쁜 기운이 있다. 오직 부안의 변산 부근과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과 선운산 등이 들어서 있는 지역은 토지도 비옥하고, 또 호수와 산의 경치가 좋으므로 그 중에서 나쁜 기운이 없는 샘을 고른다면 여기도 살 만할 것이다”
?택리지?에 실린 글이다.
고부의 진산으로 평지돌출의 산인 두승산에서 보이는 변산 기슭에 부안이 있다. 원래 이름은 부령현(扶寧縣)이었고, 백제 때 개화현(皆火縣)이었으며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규보가 그의 시에 “풍속이 중국 남방의 해변에서 생활하는 종족인 단자(蜑子)와 같다”고 한 뒤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봉래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한 것은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하였던 부안에서 허난설헌(許蘭雪軒)․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매창(李梅窓)이 태어났다.
이매창은 선조 6년(1573)에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桂生)이었고 매창은 호였다. 이매창은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지만 얼굴은 예쁜 편이 아니었고 시와 글, 노래와 거문고 등이 능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매창과 교류를 나누었던 사람 중에 천민이었으나 훗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한 공로로 인해 천민에서 벗어났던 유희경(劉希慶)이 이매창의 연인이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움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이매창이 죽고 60여 년이 지난 후 부안의 아전들이 그의 시들을 모았고 그가 생존에 자주 찾았던 개암사(開巖寺)에서 남아 있는 시들을 모아 책을 펴냈다. 부안을 고향으로 두고 시작활동을 했던 시인 신석정(辛夕汀)은 이매창․유희경․직소폭포를 가리켜 송도삼절과 견주어 부안삼절이라고 불렀다.
이매창과 교류를 나누었던 사람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이고, 그가 부안 기생 이매창을 만난 것은 1601년 7월 23일이었다. 그가 지은 <조관기행>을 보자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위의 글을 보면 허균이 만난 이매창은 얼굴보다 문학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함열로 유배를 왔을 무렵 허균은 이매창을 자주 찾았고, 이 지역을 사랑했던 그는 아예 눌러 살고자 하였다.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면 된 뒤에 이곳 우반동에 왔다. 그는 김청金淸이라는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우반동의 골짜기에 지은 정사암靜思巖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대의 집은 곧 나의 집이니
허균은 이곳 우반동에 있는 집인 <산월헌山月軒>을 두고 기記를 남겼는데 그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곳 우반동 부근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부안의 봉산을 몹시 기꺼워하여 그 산 기슭에 오두막이나 짓고 살려고 했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산 가운데 골짜기가 있어 우반愚磻이라 하는데, 거기가 가장 살만하다 하였으나, 역시 가서 보지는 못하고 한갓 심신心身만 그리로 향할 뿐이었다.
무신년 (선조 41년.1608) 가을에 관직에서 해임되자, 가족들을 다 데리고 부안으로 가서 소위 우반이란 곳으로 나아갔다. 경치 좋은 언덕을 선택하여 나무를 베어 몇 칸의 집을 짓고 평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더니, 일이 미처 마무리되기도 전에 당시의 여론이 나를 조정에 용납하치 않을 뿐 아니라 시골에 사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 하여, 무리가 모여 함께 헐뜯어 대었다.
“태평세상을 만났는데도 도원桃源의 뜻을 품었으니 너무도 옳지 않다.” 하여 마침내 나를 끌어다가 북쪽으로 가게 했다. 그 승지勝地를 돌아다보면 마치 천상에 격해 있는 것 같으니, 아아, 명이란 어찌하랴.
유형원과 허균이 좋아했던 마을
허균이 그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한 한 채 글만 썼더라면 다산보다 더 많은 저작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라서 타의에 의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 허균은 결국 반역죄로 비운의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으니,
이곳에서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그가 이상향으로 삼았던 율도국이 위도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이곳 부안의 우반동에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이 바로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다. 유형원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였다. 서울에서 살았던 그가 이곳으로 이곳에 살면서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 우반동에 집안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형원 (柳馨遠,) 은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이며 호는 반계(磻溪)인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자 사람들이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인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인 김세렴(金世濂)에게 사사한 그는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다.
1653년(효종 4)에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한 그는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나라곳곳을 유람하였다. 1665년,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유형원은 그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아나키스트 백정기의 고향
그들의 뒤를 이어 이곳 부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나키스트(anarchist)인 백정기(白貞基, 1896.1.19~1934.6.5) 의사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내 삼의사묘에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잠들어 있는 백정기
의 호는 구파(鷗波)로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정읍(井邑)시 영원면에서 자랐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면 보이는 섬이 조기잡이와 위도 띠뱃놀이로 이름난 위도다.
칠산 바다는 잔조기요. 연평바다는 큰 조기란다.
구월산에 둘러싼 조기 서울 장안에 금빛이란다.
연평바다 깔린 조기 우리 배 사공님 애태운다네.
매년 정월 초에 <위도 띠 배굿 배노래>가 울려 퍼지는 위도가 조선시대에 유배지였다.
서해로 지는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솔섬 부근에서 이틀을 묵으며 걷게 될 변산 마실 길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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