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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에 가면 만나는 민주열사 : 전태일 열사

산중산담 2014. 9. 5. 12:59

모란공원에 가면 만나는 민주열사 : 전태일 열사

 

 

민주열사묘지에 있는 전태일 열사 흉상  - 사진 : 초보산꾼

 

 

전태일 [全泰壹, 1948.8.26~1970.11.13]

한국의 노동자, 노동운동가.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분신자결하였다.

헌신적으로 노동자 인권운동을 펼쳤기에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보진영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호칭을 붙인다.

의의
전태일의 분신저항으로 각인시킨 노동자의 인간존엄성 선언과 소외, 핍박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사회구조적인 죄에 대한 저항은 역사적 의의를 띤다.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현장의 상황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알려졌고

이로 인해 전체 노동자들이 겪고있는 인간이하의 고통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일기 시작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감내할 수 없는 비인간적 노동조건에서 신음하던 노동자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지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대궐기는 종전에는 보도조차 하지 않던 노동문제를 이슈화했다.

신문, 방송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고 이로써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태일의 항거는 민주노동운동의 고양과 훗날 사회민주화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의 의거로 당시 군사독재기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이나마 민주적인 노동조합 결성이 급격히 증가하고

노동자의 권익쟁취을 위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민주노조의 가열찬 투쟁과 쟁의는 혹독한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마침내 독재체제가 붕괴되는 하나의 토대를 구축했다.

 

전태일 의거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YH여성노동자(따로 만나게 됩니다)들에 의한 마지막 저항과 투쟁은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전태일 관련작품
그의 삶은 1983년 출판된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전태일 평전이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990년대에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도 만들어졌다. 당시 홍경인이 전태일 역을 맡았다.

출처 : ko.wikipedia.org/wiki/전태일

 

 

 

전태일 열사가 그토록 분신까지 하면서 얻고자 했던 노동의 현장의 모습은 곁으로 보기에는 많은 발전이 있고

또 이만큼 노동현장의 민주화도 이루어젔다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면서 바뀐 사회환경속에 노동자들의 모습은 교묘한 법테두리 안에서

또 다른 소외된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법이라는 이름으로 더이상 말도 못하게 하는 교묘한 현실이

노동귀족이라는 거대한 또 다른 집단을 만들어 더 많은 노동자들을 그림자에 가려지게 하고 있다.

이것이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계천 6가  "버들다리" 위의 전태일열사 반신 부조상 - 사진 : 초보산꾼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에서 발췌

 

 

다리이름을 병행표기하기로 하고 2012.11.01 날 명명식을 했다고 하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 - 사진 : 초보산꾼

 

 

 

초기에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은 미군정 시절 미국의 것을 본떠서 만들었기에 내용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출지상주의를 내건 박정희 정권에게 성장을 위해서는 근로자의 희생이 필수 였기에

법적용을 할 이유도 알릴 필요도 없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수출에 의한 성장 지상주의가 낳은 희생양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전태일 재단 방문을 거부한 이유일 것이다

 

거기에 1971년 선거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촉발된 노동환경의 개선을 약속하고도

소위 유신헌법으로 불리는 초유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은 노동공약은 허무하게 뒤집어젔지만

70년대 노동운동의 신호탄이 되고 80년대 노동자들의 정치적 활동이라는 기폭재 역활을 했다고 평가한다

 

 

***  네이버 지식에 있는 내용 그대로 옮깁니다  *************

 

젊은 나이에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의류 제조 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였으나,

사회의 무반응과 개혁의 불가함에 의분하여 분신 항거한 노동 운동가.

 

전태일(全泰壹)은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서울로 옮겨와 생활이 어려워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17세 때 평화시장의 의류제조 회사의 재단사로 입사하였다.

당시 한국의 중소 기업은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가발 산업이 성하던 시대였다.

청계천변에 자리 잡은 평화시장 역시 소상인과 소규모의 기업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가 근무하던 봉제공장은 그런대로 규모가 있는 회사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값싸게 채용하여 수익을 올리는 사례가 많았고,

정부의 근로기준법이 있었으나 이를 어겨가며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많았다.

전태일은 직원이 2만여 명이나 되는 봉제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면서,

주변에서 나이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노동에 박봉의 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의분을 느꼈다.

그는 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근로기준법(勤勞基準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내용을 공부하였으나

한자가 많아 내용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알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근무하는 회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해야 하는 회사에 해당되나 이를 지키지 않고 있음을 알고 요로에 진정을 하였다.

노동환경 조사 결과를 토대로 노동청과 서울특별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번번이 묵살 당하였다.

시청 근로감독관에게 감독을 요청하였으나 허사였다.그가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근로 환경을 고발한 내용에 의하면,

 2만 명이 넘는 직원의 90% 이상인 봉제공의 평균 나이가 18세이며 하루 근무시간은 15시간이고,

시다공의 평균 연령은 15세이며 하루 16시간을 일한다고 적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불행보다는 공장 내 나이 어린 여공들의 생활 환경에 더욱 동정심이 갔고,

이의 해결을 위한 의분(義憤)이 발동했다.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이 어린 소녀들이 안질, 신경통, 위장병, 폐결핵 등에 고생하고 있으며,

성장기에 한 번 고생하면 평생 고칠 수 없게 된다고 하소연하며 근로환경을 개선해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였다.

 

그가 고발한 열악한 근로환경과 개선 요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이 어린 소녀들을 고용 착취

- 근로 시간 어김(성인 공무원 주당 45시간인데 반해 15세 시다공의 주당 근로시간 98시간)

- 하루 종일 햇볕을 보지 못하고 환기되지 않는 공기로 안질, 폐결핵 등에 걸림

- 한 달 휴무일 격주제 2일

- 건강검진 형식적 (필름 없이 X레이 촬영)<개선 요구 내용>

- 하루 근무시간 10~12시간으로 단축

- 1개월 휴일 2일을 매 일요일(4일)로 연장

- 건강검진은 정확하게 할 것

- 시다공 임금 하루 70 ~ 100원에서 50% 인상해줄 것 등

 

모든 것이 요구대로 개선되지 않자,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근로기준법이 있으나 형식적이며, 감독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자, 더욱 비애를 느끼고 죽음을 택하였다.

그는 정의심이 불타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회의 비정함과 무관심 미래가 없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이 사회에서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자신도 그 불에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하였다.(1970. 11. 13)

그의 죽음은 당시 산업사회로의 도약과 민주사회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열망과 맞물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정부와 기업인 그리고 관료들에게 무거운 경각심을 주었다.

또한 197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에 발화의 역할을 하여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전태일 평전》이 저술되었고,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되었다.

최근에는 그가 분신한 곳을 기념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 위에 반신 부조상을 설치하였다(2005. 9. 30).

[출처] 전태일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