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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번개산행 소개) 모란공원에 가면 만나는 민주열사 : 노동 열사 김경숙 : YH사건

산중산담 2014. 9. 12. 13:07

모란공원에 가면 만나는 민주열사 : 노동 열사 김경숙 : YH사건 [ YH 事件 ] 1979.08.11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인권을 생각하다

 

 

이른바 ‘101’호 작전으로 불리는 공권력의 무차별 진압작전에 지금도 사망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노동열사 김경숙님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1970년 노동운동의 시작에 전태일이 있었다면 이 시대의 끝에는 YH사건의 김경숙이 있었다.

결국 YH사건은 정치 이슈화되었고 부마항쟁과 대통령암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오는 기폭제로 작용 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한강의 기적이라 자랑스럽게 떠들던 기적은 결국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살인적인 작업환경에서 이룬 기적이니

여성노동자들의 인권을 생각하게 했던 사건이다

 

노동열사 김경숙님의 묘 - 사진: 초보산꾼

 

 

**  '고용평등추진본부' 격월간 잡지 『평등』3호지 이혜경님의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

 

 

'고용평등추진본부' 격월간 잡지 『평등』3호

목숨을 건 폐업투쟁의 선봉에 서다.

이혜경(홍보위원회)

 

4년만에 국내 최대 가발업체가 된 Y-H

억압과 착취. 오랫동안 여성노동자들은 이 단어들의 1차적 대상이었다. 한국의 종속적 수출주도형 경제의 전개과정에 있어 여성노동자는 항상 가장 값싼 노동력으로 고용되었고,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되어 대외경쟁력을 보충해 온 것이다. 산업역군이라는 미명아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의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을 통한 여성노동자운동을 펼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회사측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단결로 맞서며 목숨을 건 투쟁까지 불사한 Y-H무역회사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자금 100만원, 종업원 10명, 작은 가발공장으로 1966년에 설립된 YH는 당시 밀어 닥치는 가발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정책에 힘입어 기적과 같은 성장을 보인 기업이다. 불과 4년만에 수출실적 100만불, 종업원 4,000명으로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가 되었으며 당시 수출순위 15위로서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동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장 장용호의 영문이름 첫 글자를 따서 YH라 이름지은 YH는 1970년, 회사순이익 12억7천3백89만원으로 최대의 이익을 올렸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땀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결과이다.

같은 해 9월, 장용호는 동서 진동희를 사장으로 앉혀 국내경영을 전담시키고 자신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상당액의 외화를 도피시킨 그는 YH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용 인터내셔널 상사>를 설립하고 호텔, 백화점 등을 경영하는 등 양쪽으로 부를 쌓아 올렸다. 이후 진동희 사장의 무리한 사세확장과 부정행위로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한 YH무역은 감원이 행해졌고 은행빚이 늘어 났으며 75년부터 급격한 하향길에 접어 들게 되었다.

가발부에서 하나의 가발이 완성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작업공정은 14단계가 있는데 이 중에서 11개반은 모두 도급제(일정노동시간 동안의 노동의 성과에 따라 시간당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로 이루어져 있고, 하루 12∼14시간의 연장근무를 하며 노동자들에게는 이에 따른 수당이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도급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일이 없으면 월급(A급 최고 3만원, 당시 한달 밥값 3천원)이라는 것도 없어져 버리는 상황이었다.

"근로조건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인상과 연장근로문제로 산발적인 단체행동들을 했지요. 한 두명이 빠지면 개인적 손해로 그치기 때문에 의견을 모아 단체로 연장근무를 안한다든지 출근을 거부한다든지 말이에요. 회사측에서는 간간이 일어나는 이런 일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러려니 했습니다. 물론 그 때는 노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몸으로 부딪히는 불만에 대한 표현 정도였습니다."

75년 설립된 섬유노련 YH노조지부장을 맡았던 최순영(현 부천시의원)씨의 설명이다.

 

김경숙열사의 죽음으로 이어진 휴·폐업투쟁

급성장과 사양길로 접어 드는 모든 과정에서 전체 직원들 중 90%에 달하는 여성노동자들은 항상 이용당하고 소외되었다.

75년 3월, 건조반 작업거부 사건은 노동조합결성의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된다. 공임단가를 비롯한 제반문제를 담당하는 감독의 독단적인 인사이동을 계기로 건조반이 작업을 거부한 것이다. 건조반원 200명 전원이 참여하여 단결력을 보인 이 과정 속에서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북부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철순씨가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개하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없고, 무엇보다 대등한 노사교섭력을 갖지 못하는 등의 눈 앞에 닥친 문제들 때문에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실패로 끝난 건조반 스트라이크 이후 노동자들의 좌절감과 허무감, 단체행동이 국가와 사회를 혼란시키는 죄로서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는 형사의 협박과 공포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당시 건조반 조장으로 있던 김경숙, 박금순, 이옥자, 전정숙 등은 YH노동조합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조직결성시도를 했던 그들은 그 후 해고되었고 수제반원 고참으로 있던 최순영은 강원도 하청공장으로 출장명령을 받았다.

75년 5월 24일은 4명의 희생이 있은 후 우여곡절 끝에 전국섬유노동조합 YH무역지부 결성대회를 가진 날이다. 그 순간에도 회사측은 어용노조를 결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고, 뒤이어 지부장 최순영과 부지부장 이정옥의 해고, 사무장 민경애의 전출, 노동자들의 매수 등 민주노조의 설립 방해 책동을 멈추지 않았다. 노조설립신고를 한 후 무려 한달만인 6월 30일에야 신고필증이 나온 YH노동조합은 바로 다음 날부터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회의와 활동방향의 논의에 들어갔다. 조직강화 활동과 사내질서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로 대의원대회를 비롯한 기숙사 자치회 구성, 소그룹활동, 교육, 수련회 등을 가지며 회사와의 지속적인 노사협의를 시도해 나갔다. 75년 12월, 50%의 상여금 지급은 YH노조의 투쟁의 첫 열매로서 회사 창립 이후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또한 단체행동을 통해 얻어진 최초의 성과라는 점에서 모두들 감격했다고 한다.

"노사협의를 통한 임금인상과 여타의 근로조건들은 당연히 저희 노동자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원체 당하고 살아서 조금의 성과에도 기뻐했지만 사실 우리들의 요구는 근로기준법에도 제시되어 있는 조건만이라도 해 달라는 것이었거든요. 퇴직금, 야근수당, 하루 8시간 근무 등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회사측과의 협상이 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낮은 수준에서만 협상이 되어 좀 나아지고 지켜지면 천국이라고 여길 정도였지요."

최순영씨의 설명은 YH무역회사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여지없이 드러내 준다. 70년대 후반부터 세계경제구조가 재편됨에 따라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진행되고 이에 사양산업이 된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은 휴·폐업의 악조건과 또 싸울수 밖에 없었다. 회사측의 무책임한 폐업조치에 대항하여 폐업철회를 요구하며 회사정상화투쟁을 하였으나 회사와 정부는 무관심과 책임전가에 바쁠 뿐이었다. 결국 200여명의 YH조합원들은 신민당사를 마지막 투쟁의 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라며 목숨을 건 40시간 동안의 신민당사 농성시위는 정확히 23분만의 살인적 진압으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 국회의원 및 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 그리고 노동자 수십여명이 부상당했으며 개처럼 끌려나왔고 노조 상임 집행위원 김경숙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이후 YH사건은 정치이슈화되었고 부마항쟁과 대통령암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오는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생존을 건 YH노조원들의 치열한 투쟁은 여성노동자의 자주성과 투쟁성을 드러내는 귀중한 운동사이다. 가혹한 노조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황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조직적인 운동을 강하게 지켜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YH노조가 이렇게 노동운동의 규범적 존재로 위치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성노동자들의 잘 무장된 도덕적 용기와 단결력이 아닐까?

출처 http://www.womenlink.or.kr/matter/labor/yh03_eq.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