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4월의 넷째 주에 청송과 영양 일대에 있는 외씨 버선길과 청송의 반변천 부근을 걷습니다. 경북 지방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영양과 청송의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될 이번 여정은 완연한 봄 마중을 하게 될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히 연록색의 봄물이 오르는 주산지와 청송의 아름다운 절 대전사와 주왕산 기슭, 그리고 반변천 일대를 걷게 될 것입니다.
“태백산 밑 네 산골마을은 동쪽으로 “영양군과 진보 두 고을은 풍속이 대략 같고 진보에서 동쪽으로 읍령을 넘으면 곧 영해(지금의 영덕)지역인데, 북쪽은 강원도 평해와 경계가 맞닿”아 있다.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현이었던 진보는 현재 청송군에 딸린 하나의 면으로 되어 있는데, 진보현의 객관 북쪽에 있던 압각대鴨脚臺를 두고 서거정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다행히도 동헌 앞에 압각대가 있어 과객을 받으므로 갔다가는 돌아오네. 강남에서 어느 누구 장대류를 부르는고, 농상에는 아무도 역사매를 기대지 않네. 붉은 나무는 가까워 걸음이 길어질 듯하고, 푸른 산은 눈앞에 우뚝함이 쌓여있네. 늙은이가 힘써 일했지만 무슨 일을 이루었는고, 세월은 유유히 술잔에 부쳤거늘.”이러한 시가 남겨진 진보현은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있던 조선시대의 현으로 본래는 신라의 칠파화현漆巴火縣이었다.
청송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주왕산(周王山)과 청송보호감호소가 자리 잡은 곳이다.
홍여방(洪汝方)의 <찬경루기讚慶樓記>에 “선덕宣德 기유년 중춘仲春에 나는 바다를 따라 동에서 북으로 가다가 진보眞寶에 이르러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수십 리를 가는 동안 점점 산세山勢는 기복起伏이 있어서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으며, 냇물은 서리고 돌아서 마치 흘러가려 하다가 다시 나오는 것 같았다. 소나무 잣나무는 울울창창하고, 연기와 노을은 어둠침침하게 잠겨 있어서 맑고 그윽한 한 동학洞壑이 의젓한 선경仙境인 듯 한 것은 곧 청송이었다 (중략) 행례行禮를 마친 뒤에 남루南樓에 올랐더니 원체가 백성들이 순박하고 풍속이 후하여 온 종일 고소장告訴狀을 내는 자가 없었다.” 라고 실려 있는 청송군 파천면 덕천 1동에 심부자의 집이 있다.
조선 후기인 영조 때 만석꾼으로 불린 심처사의 7대 손인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1880년 무렵에 지은 이 집은 ‘송소고택’이라는 명칭보다 ‘심부자집’이라고 불리고 있다. 9대에 걸쳐 만석꾼을 낸 청송 심부자의 집은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낸 경주 최부자집과 함께 경상도의 이름난 부자이다. 이 집이 의성에서 이곳 청송으로 이사 올 때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어느 날 도적들이 이 집에 들어와 집안사람들을 위협하자 이 댁 안방마님이 나와서 “사람들의 목숨은 다치지 말라”면서 곳간문을 활짝 열어주고 마음껏 가져가게 하였다. 도적들이 욕심껏 가져가고 남은 재산으로 지은 집이 바로 이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떵떵거리던 청송 심부자 집도 해방 이후 토지개혁을 단행한 뒤로는 집과 함께 그 부자집이라는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가 지금은 한옥생활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파천면 신기리 가람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감남골에는 퇴계 이황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오는 곳이다.이퇴계의 5대조의 묘로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손꼽히는데 이곳에 퇴계 이황의 선대 조상들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퇴계 이황의 5대조가 진보현 아전으로 있었을 때 하루는 원님이 감남골의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와서 명하기를, “달걀을 가지고 가서 이곳에 파묻고 자시까지 기다려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라”하여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원님을 속이 곯은 달걀을 묻고 자시가 되어 가 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므로, 닭의 소리가 안 들린다고 전하니, 원님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뒤 원님은 서울로 큰 벼슬을 얻어 떠낫는데, 아전은 전의 일이 아무래도 수상하여, 밤중에 몰래 새 달걀을 가지고 가서, 그곳에 파묻고 기다리니, 닭 우는 소리가 들려서 파보니, 병아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명당자리인 줄 알고 있다가, 자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이곳에 묻으니, 시체가 땅밖으로 튀어나오므로, 다시 깊이 파고 묻었는데, 또 땅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그 때의 원님을 찾아 뵙고 지난날의 자기가 지은 죄의 용서를 빌고,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원님은 자기가 그때 산소자리를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말하기를, “그곳은 큰 벼슬을 지낸 사람만이 묻힐 곳이라.”하며, 헌 관복 한 벌을 내주며 “시체에 이 관복을 입혀서 장사지내라.”고 하매 그대로 하였더니, 6대 만에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고 한다.
“무릉도원에 들어가는 듯한 여기가 내 고향
맑은 냇물과 붉은 절벽이 금당에 비치네.
라고 이곳 진보를 노래한 사람이 이황이었고,
조선 초기의 대학자인 김종직은 이곳 청송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 봄을 구르는 쑥처럼 떠다니는 이 몸은 외롭구나. 이미 좋은 계절季節에 꾀하던 일은 시기를 잃었음을 깨닫는다. 장막帳幕안의 잣나무 향香이 타서 다하고자 하는데, 일만 산 깊은 곳에 청부靑鳧가 자고 있다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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