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강진으로 떠나기 전

산중산담 2015. 2. 13. 09:26

 

강진으로 떠나기 전

 

 

경주 강연과 답사를 마치고 곧바로 태안의 천리포로 가서

우리 땅 걷기 도반들과 서해안 걷기를 해야 하는데,

강진 다산 수련원에서 <다산 정약용과 남도 유배길>이라는 강연과

도보답사에 참여한 사람들과의 걷기행사가 있어

출발을 준비하는 마음에 여러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800년 가을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났다. 백서사건이란 제천堤川의 배론 토굴에 도피중이던 황사영이 중국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편지가 발견되어 빚어진 옥사였다. 편지의 내용은 청국황제가 조선국왕에게 천주교도 박해 중지의 압력을 가하도록 선교사들이 개입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황사영은 즉각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은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로서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다. 즉 정양용의 큰형인 약현의 딸이 황사영의 부인이다. 이때 황사영의 어머니부인은 거제도재주도로 쫓겨가 여종살이를 해야했고 세 살 짜리 아들까지 추자도에 버려졌다.

정약용, 정약전은 그해 1020일 저녁 또 다시 체포된 채 올라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공서파에서는 천 명을 죽이더라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억지로라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위반한 범죄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그를 죽일 것인가라는 반론이 뒤따랐다. 두 번째 죽음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다산은 115일 아무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유배지 장소를 바꾸어 강진으로 또 다시 유배길을 떠나게 되었다. 정약전도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유배지가 바뀌어, 두 형제는 오랏줄에 함께 묶인 채 남도로 유배길을 떠나게 되었다.

나주의 율정점에서 헤어진 형 약전은 흑산도로 떠났고, 다산은 강진에 도착하여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적소인 강진에서 다산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때 큰 아들 학연의 나이가 열여덟이었고, 둘째 아들 학유의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로 두 아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 글이다.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다산의 아들 학연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산을 축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홍의호와 강준흠, 그리고 이기경에게 유배생활을 덜어줄 수 있도록 편지로 간청해 볼 것을 청한 것이다.

아들의 편지를 받은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해를 보는 경우이다.

너는 내가 필천 홍의호에게 편지를 해서 항복을 빌고, 또 강준흠과 이기경에게 꽁리 치며 동정을 받도록 애결해 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세 번째 등급을 택하는 일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데 무엇 때문에 내가 그 짓을 해야겠느냐.“

다산은 자기 자신의 안일을 위해 신념을 굽히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고. 그가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것은 18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묻는 질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강진으로 떠나기 전 이 아침이 새삼 새롭다.

갑오년 시월 스무닷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