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열 번 째 서산 팔봉 구도나루터에서 대산읍 삼길포항까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걸어 갈 서해안 걷기 열 번 째가 몇 달 째 이어서 걸었던 태안군을 벗어나 서산시를 걷게 됩니다. 서산 팔봉 구도나루터에서 대산읍 삼길포항까지, 걸어갈 이번 여정은 태안과 서산을 가르는 가로림만을 바라보며 당진 쪽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백제 때는 기군(基郡)이었던 서산시
예로부터 서산지방에서 전해오는 말이 있다. “한 해 농사지어서 세 해 먹고 살 수 있는 땅이다.” 이 말은 그만큼 서산의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넉넉해서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당진군 서쪽에 자리 잡은 서산시는 백제 때는 기군(基郡)이었는데, 고려 충렬왕 때에 이 지역 사람 정인경(鄭仁卿)이 공을 세워 서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인경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춘수(春叟),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중국 송나라가 멸망하자 고려로 망명한 정신보(鄭臣保)의 큰아들이다. 부석면 간월도리에서 태어난 그는 1254년(고종 41) 과거에 급제하였다. 1269년(원종 10) 호위무관 겸 통역관으로 세자 심(諶, 훗날의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임연(林衍)의 모반으로 원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주(麟州, 지금의 의주) 태수로 있던 아버지에게 이를 알려 세자를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 공으로 1274년(충렬왕 1) 시종1등공신(侍從一等功臣)에 올랐으며, 그의 고향인 부성현(富城縣)이 서산군(瑞山郡)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대장군과 상장군을 거쳐 부지밀직(副知密直)에 오르고, 서경유수,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지낸 뒤 도첨의중찬으로 치사(致仕)하였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문신과 무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서산을 본관으로 제수 받았다. 서산정씨대종회에서는 그의 아버지 정신보를 원조, 그를 시조라 칭한다. 아버지와 함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산95번지에 묘역과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간월도에는 그가 초당을 짓고 살았다는 옛터가 남아 있다.
1914년에 태안과 해미가 서산으로 통합되었고 1989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신숙주(申叔舟)는 서산을 일컬어 “산세가 둘러싸고” 있다 하였고, 박원형(朴元亨)은 “바다가 삼면을 둘러 있다”고 하였다.
서산마애삼존불
해미면 산수리에 있는 안흥정(安興亭)이라는 정자는 고려 문종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송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고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현 동쪽 11리 지점에 있다. 고려 문종(文宗) 31년에 나주도 제고사 태부소경 이당감(李唐鑑)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왕래하는 고만도(高彎島)의 정자는, 수로가 약간 막혀 있어 선척의 정박이 불편하오니, 청 하건데 홍주(洪州) 관하 정해현 땅에 한 정자를 창건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장소로 삼도록 하소서.”하니 제서를 내려 그 말을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나라 중간에 있는 목장지로서 옛날에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 일컬었다.“ 라는 글이 실려 있다. 해미면 반양리의 구해미라는 마을은 옛날 정해현의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불과 몇 년 전에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고장이 된 해미의 형승을 두고 정충기鄭忠基는 <동헌기>에서 “땅이 큰 바다 가에 임해 있다.” 고 하였는데, 이 해미에 사적 제 116호로 지정된 해미읍성이 있다. 음식축제로 소문난 순천의 낙안읍성과 성 밟기 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고창의 모양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읍성 중에 제 모습을 거의 제대로 갖추고 있다. 해미면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곳 해미읍성으로.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옮긴 것은 태종 14년인 1413년이었다. 병마절도사가 옮겨오면서 이곳에 성이 필요하자 성종 원년에 이 성을 착공하여 성종 22년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그 뒤 효종 2년 청주로 병영이 옮기면서 해미영이 설치되었다. 해미영은 충청도의 5개 영중 하나로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고 불렀다. 청주로 병마절도사영이 옮겨가기 전까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이 해미읍성에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정도 근무를 했었고, 숙종 때에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다산 정약용이 열흘간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곳 해미현의 염조포 부근에 안희산 봉수가 있어서 서산의 북산 봉수를 받았고, 면천의 창택산 봉수와 연결되었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고 하여 ‘탱자나무 성이라고도 불렀던 이성을 두고 서거정은 “백마가 힘차게 세류영細柳營에서 우는데 중요한 땅 웅장한 번진藩鎭의 절도사節度使가 장성長城을 이루었네, 늦은 가을 하늘 높이 세워진 큰 기의 그림자가 한가롭게 보이고, 진종일 투호投壺하는 소리마저 자세히 들려온다. 아낙네의 소라 같은 쪽진 머리가 떠오르는 듯 산이 둘러싸 있으며, 바다는 고래 물결로 동하지 아니하고 맑고 깨끗하다. 서녘 바람이 얇은 솜옷을 한없이 불어제치니, 먼 길손 만리 타향의 외로운 정을 견디기 어렵도다.” 고 하였다.” 그것은 해미읍성을 둘러싼 가야산의 맑고 고요한 모습 그리고 규율이 엄격한 군대의 주둔지를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은 둘레가 6630척의 높이가 13척 옹성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었던, 이 성안에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성안에 행정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 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성밖으로 옮겨서 전남의 낙안읍성이 사람이 살고 있음으로 하여 살아있는 성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고창읍성처럼 죽은 성이 되고 말았다. 이 해미읍성에서 1866년인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인 천여 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천주교인들은 이곳 해미영에 끌려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지금도 서 있는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을 매단 채 죽기도 하였는데 그 때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져 온다. 옛 기록 속에는 개심사가 있는 상왕산(象王山)이 여미현 동쪽 4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가야산(伽倻山) 은 현의 동쪽 11리 지점에 있으며 상왕산과 서로 연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실린 절들 중 문수산에 있었다는 문수사나 가야산에 있었다는 안흥사.安興寺. 일악사日岳寺. 수도사修道寺라는 절은 없고, 황락리皇洛里에 있는 일락사日樂寺만 이름이 바뀐 채 남아 있고 개심사나 보원사지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당시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하였기 때문에 절에 대해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는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거리낌 없이 표현하여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이 있다. 운산면 일대 사람들에겐 알려져 있었던 서산마애삼존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9년이다. 당시 부여박물관 관장이던 홍사준(洪思俊) 관장이 보원사지의 유물을 조사하러 왔다가 주민들로부터 서산마애불에 대한 얘기를 듣고 국보보호의원인 김상기(金庠基)․이홍직(李弘稙)에게 연락해 답사한 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84호로 지정되었다. 세 부처는 법화경 교리에 의하면 본존인 석가여래입상이 서 있고, 좌측에 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과 우측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서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에 성행했던 신앙에 의하면 석가세존(釋迦世尊)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미륵보살이 협시(脇侍)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석가여래불의 옷맵시에서는 중국풍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크게 뜬 눈과 활짝 웃는 미소는 옛날 양식이면서도 틀림없는 백제의 미소라 할 수 있다. 그 미소가 신비한 미소라고 불리는 것은 부처의 표정이 빛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양쪽의 협시보살들도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띤 여자다운 모습이라서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진 첩부처’라는 장난스런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너그러운 웃음은 고구려의 미소를 백제 화시킨 한국 불상의 독특한 형태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그 건너편에 있는 바위가 인암印巖이라고 불리고 있는 인바위이다. 사면이 돌로 되어 있고, 이끼가 끼어 있는 이 바위는 석가모니(상왕象王)의 말(斗)만한 인장을 이 바위 속에 숨겨놓았다고 한다.
예전에 해미고을 원님이 이 인장을 꺼내기 위하여 석공을 시켜 이 바위를 떨어내려고 하는데, 별안간 구름이 일며 천둥번개가 내려치고 소나기가 퍼부으며 큰 산이 흔들리고 움직이며 가까운 거리도 알아볼 수 없었다. 원님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귀신이 돌보아준다고 생각한 후 할 수 없이 중지했다고 한다.
이 근처에 있던 무릉대武陵臺는 민간에 전해오기를 ,석가모니를 장사지낸 곳이라고 한다.
태안을 벗어나 서산시의 아라뫼 길을 걷게 될 열 번째 서해안 걷기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의 축제, 길 문화 축제 제 10회 길 문화 축제를 열면서, (0) | 2015.02.13 |
---|---|
한국의 섬 기행. 통영의 섬, 욕지도와 연화도를 가다. (0) | 2015.02.13 |
강진으로 떠나기 전 (0) | 2015.02.13 |
길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퇴계가 즐겨 걸었던 퇴계 오솔길과 청량산 청량사. (0) | 2014.10.16 |
갑오년 가을에 지리산 신선 둘레길을 걷다., (0) | 2014.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