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길위에서 만나는 고통의 축제

산중산담 2015. 2. 13. 10:01

 

길위에서 만나는 고통의 축제

"자네한테만 말해주지.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에 언제나 나는 무서운 고민에 휩싸인다네"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중에서 메날끄의 말이다. ‘절망좌절속에서 보낸 젊은 시절, 나 역시 많은 고민에 사로잡혔었다. 그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이나 아침이 오기 전 신 새벽에 장송곡들을 몇 시간이고 반복해서 들었었다.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곡 <죽음과 소녀> 2악장을 들으면서 죽음이 아주 감미롭게 올 것이라고 주제넘게 생각했다. 모차르트 <레퀴엠>, 포레의 <레퀴엠>, 베르디의 <레퀴엠>, 브람스의 <독일진혼곡>, 베토벤의 교향곡 3<영웅> 중의 2악장,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비창>4악장, 쇼팽의 <장송 소나타> 등을 지금도 첫 소절에서 마지막 소절까지 흥얼거릴 수 있는 것은 그 시절 내 젊음을 후비고 지나갔던 그 어두운 그림자 덕일 것이다.

잔잔한 감미로움으로 혹은 격렬한 흐느낌으로, 포근함으로 내 삭막하기만 한 영혼의 바다를 그 죽음들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야 내 정신은 평온을 되찾을 수가 있었고, 나는 이른 아침에 마음 비우고 길을 나서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의 불안감을 느끼는데, 부조리의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의 글에도 그 불안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망설이고 있자 카뮈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긴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더 나쁜 어떤 일이 내게 일어 날 수 있는가.? 그건 죽는 겁니다. 그러면? 하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장 그르니에가 여행을 가지 않았다고 말하자 까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주 하고 싶은 일 이외에는 하지 말아야죠"

그렇게 말한 알베르 카뮈는 아이러니칼 하게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주머니 속에선 몇 시간 뒤 파리에 도착하는 열차 표가 있었습니다.

열차 표를 예매했던 카뮈에게 지인이 자동차로 같이 가기를 원했고 그것이 결국 피할 수 없는 그의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여행이건 어떤 것이건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예측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행을 두려워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로망 롤랑은 <매혹된 영혼> 에서 "인생은 왕복차표를 발행하지는 않는다.

한번 여행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남겼고, 영국의 시인 드라이든은 "인생은 여행이고 죽음은 그 종점이다" 고 말하고 있다.

여행 같은 인생길에선 언제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데, 내 여행의 여정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저승에도 커피가 있을까?

구절초 꽃이 아름다운 공주의 영평사에 하룻밤을 묵었던 때의 일이다.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나서 새벽예불에 가기가 싫어 이리저리 뒤척여도 자꾸 들려오던 새벽 종소리, 거기에 뒤섞여 들리는 개구리 소리, 그러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

여섯시 아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깨어 아침밥을 먹고 주지스님이 따라준 아름다운 백련차에다, 지천으로 피어난 흰 연꽃에 호사를 누릴 때만 해도 아무런 일도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수자원 공사에 근무하던 권성일씨의 차를 타고 공주로 가다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선대先代인 이진휴가 숙종 때에 세운 금강변의 사선정을 보기 위해 차를 세우자고 했다.

조금 지나쳤으니 100m 쯤 지나서 차를 세우지요.” “알았습니다.” 하고 내 말을 받아 권성일씨가 차를 돌리면 되지요,” 하고서

내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차를 돌려버린 것이다.

그 길이 중앙 분리대가 있는 4차선임을 잊어버린 권성일씨가 1차선으로 차를 역주행한 것이다.

꿈인 듯 생시인 듯2차선과 1차선에서 쏜 살같이 달려오던 차들,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순간 상황을 알아차린 권성일씨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찰라 속에 우리가 탄 차를 스치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행렬들,

그래서 한 숨을 내쉬며 이렇게도 사는구나, 했는데 그 차엔 권성일씨의 아들 둘과 내가 타고 있었다. “아빠 때문에 우리가 죽을 뻔 했잖아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한 숨을 내쉬던 권성일씨.

저 사람 미쳤어,“ “아냐, 착각이었을 거야우리가 가끔 설왕설래하는 착각과 미쳤다는 것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그대로 진행되었으면 저녁 뉴스에 삼부자와 한 사내가 대전 공주 간 국도에서 원인모를 역주행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은 순전히 . 이라는 말이 맞는 듯싶었다.

그 순간을 벗어난 뒤 천천히 공산성을 올라가 쌍수정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저승에도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서 내려가는 길에 그림을 그리러 올라오던 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중에 한 아이가 뒤 따라오는 아이에게 깎아지른 듯한 성벽을 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 최하 사망일거야

그 말을 들으며 오늘의 시대는 아이들에게조차 죽음이 저렇게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을, 위험한 순간을 잘 넘기고서, 마치 지옥에서 살아오기나 한 것처럼, 덤으로 살고 있느니, 또는 구사일생했느니 하며 너스레를 떨었던 내가 얼마나 작아 보이던지, 흐르는 금강 그 탁한 물을 바라보며 잠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허겁지겁 살고 있는 나를 돌아 본 하루였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간격은 얼마나 될까? 한 순간이라고도 하고, 찰나라고도 하는데, 그 순간이 죽음이 아니고 삶일 때 그 순간을 금세 잊어버리는 그 마음을 어찌 해야 하는지.

산다는 것은 순전히 운이다.

역주행 사건이 우연처럼 다가온 사건이라면 입암산성으로 취재를 하러 가던 때의 일은 나에게 있어서 무슨 사건일까?

호남 고속도로 금산 IC 부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KBS 김명성 기자와 입암산성 일대 취재를 가던 길이었다. 광주 민학회의 배성자씨가 민학회 답사를 위해 왔다가 동참했고, 카메라 기자와 다섯 명이 가던 길이었다.

피곤한 지 세 명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고, 승용차 기사와 나만 깨어 있었다. 곧 금산사 부근을 지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랬다. 눈 깜짝할 시간에 차가 기우뚱 거리더니 1차선에서 바깥 차선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 하고 놀랄 사이도 없었다. 차는 큰 트럭과 부딪쳤고, 반동으로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았다.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하는 순간, 차는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은 뒤 주저 않았다. 충격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 김명성 기자가 밖으로 나가 1차선으로 오는 차들을 제어 했고, 얼떨결에 깨어난 사람들이 고속도로 바깥 차선으로 나가자 우리가 받았던 13톤 트럭의 기사가 얼굴이 사색 되어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다쳤어요.?” 하고 묻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들이 받았던 부분을 보니, 이럴 수가? 타이어의 고무부분을 들이 받고 그 반동에 의해 차가 중앙분리대 쪽으로 들어갔고,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고 승용차가 주저앉는 그 시간에 다행히 고속도로에 차가 뒤따라오지 않아서 무사한 것이었다.

트럭이 없었더라면 고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가 죽었을 것인데, 그 차를 들이 받아 무사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금세, 레카 차들이 고속도로에 들어와 사고를 수습하고 우리는 구급차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진단 할 결과 신기하게도 그 어느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알고 보니 타이어 정비 불량으로 타이어가 펑크 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그 차는 폐차가 되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하마터면 KBS 취재차 가던 우리들이 타 방송국에 의해 취재를 제공할 뻔 했다. 그날 다시 방송국에 가서 우리들이 그날 새로 살아난 날이기 때문에 매년 그날이 되면 밥 한 끼라도 먹자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바쁜 사람들의 약속이 지켜질 리가 있는가. 하여간 그날의 취재는 그 다음으로 미뤄졌고, 다시 취재를 떠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병원에서는 그 뒤 계속 입원을 하라고 전화가 결려 왔지만, 안 아픈 데, 그리고 바쁜데, 병원에 누워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그 뒤 여러 명의 무속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김개남 장군 추모비, 정여립 장군 추모비, 동학농민군 위령제, 빨치산과 토벌군 위령제를 지내주었기 때문에 그 혼령들이 보호해서 그런 것이지요.”

하여간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견디면서 어디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무사한 고속도로 사고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가끔씩 생각하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구절이 있다. “전쟁과 피하기 어려운 죽음에 직면해서 아타락시아조용한 마음으로 만사를 방관하는 이외의 나은 지혜는 없다.”는 말,

사실 그날 그 시간에 일어난 일은 어느 것 하나 생각할 시간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닥쳐오는 일이기 때문에 그 말도 그리 유효한 것은 아니리라.

수없이 많은 위험한 길을 걸었고 그렇게 위험에 노출된 길을 걸었는데도 내가 이제껏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운이 좋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그런 순간에 또 다시 직면할 것이다. 그 때 나는 TS 엘리어트의 시 한 구절을 꼭 기억할 것이다.

근심할 것과 근심하지 말 것을 분별케 하소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가르쳐 주소서

언제든 삶이 죽음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노라면 우선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오늘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서운 할 것이 없는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필요하다.

부처님도 다음과 같이 말했지 않은가?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축적된 것은 소모되고, 쌓아올린 것은 무너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떨어진다.“

우리가 실제로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순간뿐이다. 우리의 모든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고 헛된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가을 구름처럼 덧없다.

존재의 삶과 죽음은 마치 춤동작을 보는 것과 같다.

삶은 하늘?【?번쩍이는 번갯불처럼 잠깐이며,

깎아지른 산에서 흘러내리는 급류와 같다.“

다시 부처님의 말이다. 삶과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다. 단지 한치 앞을 모르기 때문에 그걸 인식하지 말할 뿐이다.

내일 또는 다음의 생, 어느 것이 먼저 올지 그것을 어느 누가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삶과 죽음에 초연한 마음을 가지고 먼 길 떠나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힘들겠는가?

다시 떠나는 길이 나에겐 희망이다.

길에서 노닐고 길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1111일을 <길의 날>로 제정하고 <길 문화 축제>를 연지 어언 10여년이다. 119일 오후 전주천변 청연루 일대에서 여는 길 문화 축제에 앞서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축제>를 떠올린다.

나는 축제주의자입니다.

그 중에 고통의 축제를 가장 사랑합니다.

합창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하다고

그래, 알고 보면 나 역시 축제주의자다. 길을 걷는 고통, 살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의 시절도 어느 날 문득 다시 그리워질 테지.

 

갑오년 동짓달 초여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