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길위에 인문학- <삼국유사>의 현장을 따라 걷는 경주 기행

산중산담 2015. 2. 13. 11:29

-길 위에 인문학- <삼국유사>의 현장을 따라 걷는 경주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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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일월이고, 추워서 그런지, 답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올해에는 되도록 그 진행 일정대로 움직이기 위해 <삼국유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경주 기행>을 준비합니다.

?삼국사기?에 당나라의 태종이 말하기를 진실로 군자의 나라로다라고 하였으며 <수서隋書>, “의복의 빛깔은 흰색을 숭상하며, 부인들은 머리카락을 땋아 늘여 머리에 두르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꾸민다.”라고 실려 있는 곳이 경주였다.

경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신라의 옛 수도였다. 한나라 오봉(五鳳) 원년에 신라 시조 혁거세가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였으며(이 뒤로부터는 방언으로 왕경王京을 서야벌이라고 통칭) 혹은 사라(斯羅)라고 하고 혹은 사로(斯盧)라 하다가 뒤에 신라라 일컬었다. 탈해왕 때에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따라서 나라의 이름으로 하였는데, 기림왕이 다시 신라로 하였다.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니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라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야 경주라는 이름을 얻은 이곳을 형가(刑家)에서는 회룡고조(回龍顧祖)형이라고 하였다. 즉 용이 돌아서서 조상을 돌아본다는 뜻으로, 본 산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가 휘돌아서 본 산과 서로 마주 대하는 산세를 일컫는 지형이라 한다. 경주 시내를 형산강(兄山江)이 흐르는데, 형산강은 경상남도 울산시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경주를 지나 동쪽으로 흐르면서 큰 강이 되어 포항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경주에 대하여 이첨(李詹)은 그의 기()에서 토지는 비옥하고 풍속은 순박하며, 백성들은 예절과 겸양을 안다하였고, 정인지는 번화하고 아름답고 고움이 남쪽 지방의 으뜸이다하였으며, 또한 ?수서(隋書)?에는 땅은 산이 험한 데가 많다고 씌어 있고, 서거정은 산과 물이 빼어나고 기이하다라고 하였다.

경주의 진산은 남산인데,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하며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 남산을 비롯한 경주에 원효元曉스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요석궁瑤石宮이다.

신라의 승려 원효가 일찍이 말하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터인가, 하늘 고일 기둥을 내가 깎아 주겠네.”

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 “이는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로움은 없다.”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왕실의 과부가 있었다. 임금이 요석궁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더니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유교楡橋를 지나다가 요석궁 관리와 마주쳤다. 거짓으로 물속에 빠지니, 그 관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대로 묵도록 했다. 과연 과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다. 그 요석궁의 터는 향교 남쪽에 있고, 유교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

<여지도서>에 실린 글이다.

불국사와 토함산의 석굴암을 비롯하여 반월성포석정괘릉(掛陵) 등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신라는 대소 가야국을 다 차지한 뒤 당나라와 연합작전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잠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쳤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신분층이 진골(眞骨)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6두품 이하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방사회에서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실력자들은 자신의 처지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만큼 국가에 더 이상 애착을 가질 수가 없었다.

1-4주 감은사지

그런 가운데서 중앙의 귀족들은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화려한 생활을 누렸고 급기야는 왕위쟁탈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통일 이후의 안정기는 1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반란이 빈발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갔다. 지방에서는 현지의 유력자들이 성장하여 권력에 대한 욕구를 키우고 있었으나 골품제(骨品制)가 유지되는 한 이들의 욕구는 충족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진흥왕 때의 설계두라는 사람이 신라에서는 사람을 쓸 때 골품을 따지므로 정해진 신분이 아니면 비록 큰 공을 세워도 한계가 있다며 신라를 등지고 당나라로 떠나 버렸을까.

그 당시 이런 저런 이유로 신라를 등진 사람들이 많은데, 남산 자락의 폐사지인 남산사南山寺에 남겨진 이야기 한편이 흥미롭다.

대세大世라는 신라 사람은 세속을 초월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평왕 9년인 587년에 담수淡水라는 승려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신라의 산골짜기 사이에서 한평생을 마친다면 연못 속의 물고기나 새장 안의 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다녀서 오나라. 나라와 같은 먼 나라에서 가서 이름난 스승을 따라 이름난 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려 합니다. 만약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신선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다면, 광활한 하늘 너머로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니, 이는 천하의 기이한 유람으로 웅장한 구경거리일 것입니다. 그대는 나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담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세가 그 자리에서 물러 나오다가 구칠仇柒이라는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는 굳세고 절개가 빼어났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사에서 노닐었는데, 별안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낙엽이 뜰에 괸 물에 떴다. 그것을 본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노닐러 가고 싶은 뜻이 있습니다. 각각 나뭇잎 한 개 씩을 취하여 배로 삼아서, 그것이 떠내려가는 차례를 가지고 우리가 떠나가는 차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 잠시 뒤에 그들은 나뭇잎에 올랐고, 대세의 나뭇잎이 앞서 떠나기 시작하자 대세가 웃으며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 말을 들은 구칠이 성을 발끈 내며 말했다.“ 나도 남자인데, 어찌 나만 남아 있으란 말입니까.” 마침내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어 남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떠나갔다. 그 뒤로는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마음이 가면 몸도 간다.“는 옛 말처럼 마음으로 나뭇잎을 움직여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그 뒤로도 수없이 나타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결국 신라는 9세기 말부터 지방세력의 반란에 의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56대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말았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중에서

천년 사직을 담담했던 경주에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속에 나오는 현장들이 즐비하다. 그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며 신라의 문화 역사를 공부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