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에 영동의 천태산과 금강을 거닐다.
겨울의 끝자락에 영동의 천태산과 금강을 거닐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월 14일 토요일 금강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산 천태산과 천년 고찰인 영국사를 갑니다. 충청도의 산들이 기립하듯 달려오는 천태산과 영국사의 아름다운 문화재들을 답사하고 금강 변을 거닐 게 될 겨울의 끝자락 기행에 참여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금산을 거쳐 제원에 접어들면 어느덧 강은 구색을 갖추고 양산에 이른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요 난들 가서 배 잡아 타고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양산 창포강에 잉어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장끼가 논다 장끼가 논다. 양산 수풀 속에 무수리 장끼가 논다.” 양산가라는 노래의 고향인 영동은 거문고를 잘 탔던 고구려의 왕산악과 가야금을 잘 탔던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음악의 3대성인인 난계 박연의 고향이다.
이곳 양산(陽山)에는 강선대, 여의정, 용담, 함벽정, 봉황대, 구선대, 채하정과 영국사(寧國寺) 등의 양산팔경이 있다. 이렇듯 산세의 수려함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은 양산팔경의 제1경인 영국사는 천태산자락에 있고 천태산은 누교리를 지나며 시작된다. 영국사 2.5km, 날은 더없이 맑고, 바람은 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겨울 산을 오르기 위해 여장을 꾸렸다. 푸른 하늘 아래 새 푸름으로 빛나는 눈빛들과 눈 덮힌 암벽위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선 푸른 소나무들이 내가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를 감싼다. 햇살이 비추인 양지바른 길은 어설프게 눈이 녹아 흐른다.
영국사를 오르는 길은 누군가의 말처럼 세속에 물든 사람이 신선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나무숲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벽으로 쌓여 있다. 벌써 버들강아지가 눈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자 꽃 봉우리들을 피워 내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눈을 돌리니 말로만 듣던 삼단 폭포다. 여름의 장쾌함을 찾아볼 수 없지만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제법 구성지다. 길은 더욱 구부러지다가 이윽고 침목의 계단이 나타난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열차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고개마루를 넘어서자 넓은 분지가 펼쳐진다. 영국사를 가운데 두고 몇 채의 민가와 논밭들이 쏠쏠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정감록비결의 「십승지지(十勝之地)」와 비숫하다.「정감록(鄭鑑錄)」에서는 십승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신할 땅이 열이 있으니, 첫째는 풍기예천이요, 둘째는 안동의 화곡이요, 셋째는 개령의 용궁이요 넷째는 가야요, 다섯째는 단춘이요, 여섯째는 공주의 안산 심미곡이요, 일곱째는 진목이요, 여덟째는 봉화요, 아홉째는 운봉의 두류산이요, 열 번 째는 풍기의 대 소백산이니, 길이 살 땅이라 장수와 정승이 이어 나리로다. 그 연유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그 길지로 찾아갔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열 곳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 영국사에 가서 보면 그 말에 합당한 곳이 영국사임을 깨닫게 된다. 절 바로 밑에 천연기념물 223호인 영국사 은행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안에서 그 크기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영국사 은행 나무는 높이가 35m에 둘레가 11m이다.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는 이 나무는 밤이면 서럽게 운다고 전해오고(실제로 이 곳 사람들은 그 것을 들었다고 한다) 가지가 땅에 닿아 새롭게 뿌리를 내려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밤이면 서럽게 운다는 영국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를 지나 영국사로 가지 않고 곧바로 등산길에 접어든다. 소나무 숲길을 조금 지나자 정상 1.3km라는 안내판 밑에 전기밥통이 놓여 있다. “웬 밥통일까?” 나의 물음에 김현준 기자가 “배상우씨라는 인근에 사는 사람이 자기의 사비를 들여 만든 안내도를 넣어두는 시설물이라고”, 설명해 준다. 횡재다 싶어 밥통 문을 열었으나 안내도는 없고, 먼지 얹은 비닐뭉치만 수북했다. 세상의 모든 길마다 저렇게 뜨끈뜨끈한 밥통에 밥이 가득 담겨 있거나, 험하고 어두운 세상을 헤쳐 나갈 나침판과 지도가 비치되어 지나는 길손들을 기다린다면, 그것이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오매불망 기다려 온 미륵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천태산 산행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것도 쌓인 눈길에 바위산행이니 그럴 수밖에 조심조심 바위조심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밧줄을 당겨 오른다. 길은 두 갈래다. 가파른 암벽에 내려뜨려진 밧줄을 잡고 오르는 길과 돌아가는 길, 그 길에는 -아녀자와 노약자는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음은 돌아가라 말하고 육체는 밧줄을 타고 오르는 길을 택 한다 아녀자라면 어떻고 건강한 사내라면 어떻겠는가? 푸른 하늘 아래 겹겹이 다가오는 산들은 아득하다. 나는 눈 쌓인 가파른 산길을 한 계단씩 오르며 군대시절의 유격훈련을 생각했다. 선착순에 구보에 악에 바쳐 복창하던 유격유격이 어느 순간 죽여죽여로 바뀌었던 그 시절을 그러나 그 시절도 세월의 흐름 뒤에는 푸쉬킨의 시 구절 처럼 “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 지느니”와 다름없으니 세월이 약인가. 잊음이 약인가. 이렇듯 산을 올라가는 것이 힘겨웠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학자였던 정구는 ‘산에 오르면서 깨닫는 공부를 바로 어진 사람이 산을 보고 자성(自省)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길은 끝나기 위해서 있고, 길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있다. 밧줄이 끝나는 지점 큰 바위가 나타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그 바위에 가부좌하고 앉는다. 멀리 산들이 내 지난날의 아스라한 그리움처럼 펼쳐지고 덕유산 속리산너머 더 멀리 태백, 설악을 지나 동해바다와 푸른 바도가 가슴 속으로 떠 밀려 올 듯도 싶다. 그렇게 흘러가고 또 흘러갈 세월 앞에서 쌓인 눈발은 무엇이며 발자국 남기며 가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그러나 그 발자국들 또한 쌓인 눈 녹듯 사라지고 말 것인데...
여기서부터 길은 오를만하다. 가까스로 능선 길에 접어들고 한달음에 올라서자 정상이다. 천태산 714m라는 팻말이 쓰여 진 정상에 도착해서 나는 보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게 펼쳐진 산줄기의 바다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검푸름으로 빛나고, 나는 보았다. 스스로 자(自)와 그럴 연(然)이라는 두 글자가 합해서 만들어진 스스로 그러한 것인 자연이 사람들의 눈앞에 이익과 무지로 파괴되어 버린 현장을.
가까운 듯 먼 듯 보이는 덕유산은 깊은 상처를 남긴 채 그 골이 깊어 저렇듯 선명하게 피(?)를 흘리고 있고, 그 상처들이 번지고 번져 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의 ‘대 자연의 냉혹함’에서 “대자연의 냉정함(산. 바다. 숲. 사막)은 호감이 가는 것인데, 그것도 잠시 뿐이다. 그때가 지나면 우리는 초조해진다. 대체 이것( 대 자연)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싶지도 않다는 것인가? 우리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여기에서 <인간 존엄 침해 죄>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런데 니체가 생존한 그 시대로부터 불과 백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우리들은 자연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이 자연에게 저지르는 것은 <자연 존엄 침해 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천태산의 정상,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그렇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빛나는 햇빛과 눈빛이 반사되는 그 싸늘함 속에서 보았고 그 사이로 조정권의 산정묘지가 한 줄 한줄 떠올랐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山頂錨地․1
<!--[if !supportEmptyParas]--> <!--[endif]-->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어둠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
산정에서 나는 따뜻했고 하늘의 품(천태산)에서 내 마음은 평온했다. 먼저 온 남녀한쌍이 옆에서 라면을 끓이고, 나는 오른 만큼 내려가야 할 것이다. 눈덮힌 산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며, 언뜻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본다. 저만치에서 일행은 뒤따라오고 남고개를 내려서자 으슥한 골짜기다. 물소리 들리고 찬 물 한모금 마신다. 어쩌면 나는 천태산의 산정에 서늘한 나의 오랜 그리움을 두고 왔는지도 모른다. 다시 올 수 없는 그 옛날의 그 아련한 그리움을, 겨울 산 그 산정의 푸르른 하늘에 묻어두고 왔는지도 모른다.
고개들을 연이어 넘어선다. 저 만큼에서 영국사가 보이고 덮힌 밭두렁을 따라간 산 언덕에 영국사 부도가 있다.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사 부도(보물532호)는 8각원당형 석조부도로 높이는 1.17m이다. 옥신석 각 면에는 우주가 정연하게 조각되어 있고, 정면에는 장방형의 문비가 조각되었다. 옥개석은 낙수 면에 기왓골이 있고 상륜부도 완전한 편이다.(...)
절에서 들리는 독경소리와 바람소리, 뭇 새들의 울음소리 들으며 서 있는 부도를 지나 발길은 원각국사의 비로 향한다. 이 비(보물534호)는 1180년(고려 명종 10년)에 원각국사를 추모하여 세웠다. 꿇어앉은 거북위에 점판암 1매석으로 만든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고려시대의 보통 양식인데, 이 수는 그 옆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표면 중앙에 장방형의 전액을 양각하여 3행 6자로 원각국사비명이라고 쓴 이 비는 건립 연대가 뚜렷하여 다른 탑비 연구상 큰 도움을 주는 값진 것인데도 아이들이 장난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이름을 새기기도 하여 지금은 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비 위쪽에 서 있는 세 개의 부도가 제 각각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지만 글쎄 어느 때 살았던 어느 스님의 부도인지 알 길은 없고 무심히 절로 향하는 오솔길은 따사롭다.
○양산팔경중 제 1경인 영국사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천태산(지륵산)의 중턱에 있는 영국사는 신라 문무왕 8년 원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창건 당시의 이름은 만월사(滿月寺)였다. 그 후 효소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면서 국청사(國淸寺)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고종 때 감역 안종필이 왕명을 받아 탑과 부도 및 금당을 중건 하고, 산 이름을 천주산(天柱山)이라고 하였다.
영국사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제 31대 공민왕(恭愍王) 때였다. 원나라의 홍건적(紅巾賊)이 개성까지 들어오자 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이원면 마니산성으로 피난을 왔다. 그 당시 국청사였던 이곳으로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기 위해 온 왕의 뜻을 알아차린 신하와 백성들은 천태산에서 걷어 온 칡넝쿨로 구름다리를 만들었다. 구름다리를 지나 절로 간 공민왕은 국태민안을 위해 기도를 계속하였고, 그 후 기원대로 나라와 백성이 편해지자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절 이름을 영국사라고 바꿔 부르게 하였다. 이 때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은 누교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절의 맞은편에는 팽이를 깎아 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데 공민왕은 그 봉우리 위에 왕비를 기거하도록 하면서 옥쇄를 맡겨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세조때 세사국사가 산 이름을 지륵으로 바꾸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별로 없다.
본래 영국사는 지금 대웅전이 서 있는 곳에서 천태산의 주봉쪽으로 100여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방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된 영국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조선중기 이후의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신장탱과 삼장보살이 걸려있다. 사람으로 치면 젊은 청년 같다고 할까. 생기가 넘쳐나는 듯 하다. 절 뒤쪽에 푸른 대나무 숲이 바람결에 넘실댄다. 절 마당 한 편에 오롯이 서 있는 삼층석탑(보물533호)을 한바퀴 돈다.
눈 쌓인 산들은 푸르름으로 빛나고 절 아래에는 은행나무가 고즈넉하며 쓰러져가는 해우소가 옛 정취를 일깨워 주고 있다. 도란도란 요사채에서 스님의 말소리가 들린다. 자그마하지만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삼층석탑은 지금은 이렇듯 대웅전 앞에 서 있으나 원래는 옛 절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42년에 이 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하며 이 탑의 재질은 경주 장항리 절터의 오층석탑 재질과 비슷하다. 2층 기단위에 삼층의 탑신을 세웠고, 면석과 첫 층 옥신이 거꾸로 놓여 있다. 옮겨 세울 때 잘못 복원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초층 탑신부에 문비가 조각 되었으며, 자물통과 원형문고리까지도 나타나 있는 탑이다. 은행나무를 지나 영국사 망탑으로 향한다. 눈 덮힌 논둑사이로 펼쳐진 바위를 지나 개울물이 흐르고 이 물길이 삼단폭포 지나 금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푸른 금강물이 역사로 흐르는 곳
망탑봉(望塔奉)으로 난 산길에도 누군가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이 있다. 몇 시간을 두고 산을 헤집고 다닌 탓인지 한걸음 한걸음이 힘에 겹고 길은 제법 가파르다. 잔솔 우거진 산길을 10여분 올라가니 망탑봉이다. 자연석 화강암 지반을 그대로 살리면서 윗부분을 평평하게 다듬었고, 그 가운데에 네모진 둔덕을 만들어 기단을 만들었다는데 탑 아래의 암반이 길게 파여 있다. 파인 골 위쪽에 조그만 여근 모양이 있고 그 암반 아래에는 촛불을 켰던 것으로 보이는 자국이 남아있다. 망탑봉의 여근곡으로 이지역의 기자신앙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탑이 언제부터 망탑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근 마을이나 절에서 모두 망탑봉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멀리서 탑을 바라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 듯하다. 몇 개의 바위가 연이어 있고, 정상 끄트머리에 커다란 자연석 화강암을 기단으로 삼은 망탑봉삼층석탑(보물535호)이 서 있다. 각면에는 우주를, 중앙에는 탱주를 하나 두어 양쪽에 단상 하나씩을 음각하였다. 기단이나 탑신부의 양식과 수법이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지는 이 탑 앞에 서서 나는 세상을 바라다본다. 이 망 탑을 중심으로 세상의 온갖 산들이 물결치듯 퍼져나가고, 그 산들이 이 탑을 향하여 기립하고서 SOS하며 구원의 손길을 보내는 듯도 싶은데, 나는 외로운 등대처럼 홀로 서 있는 탑 앞에 서서 희끗희끗 쌓여있는 눈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울었다. 그 흐르는 눈물자국은 강물이었고, 귀로에 다시 찾은 금강 가에는 조그마한 고깃배 한 척이 세월을 기다리며 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금방 걷어 올린 듯한 싱싱한 고기 그물이 지는 겨울 햇살 받으며 나부끼고 있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꽃 피는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을 거닐다 (0) | 2015.06.24 |
---|---|
번개 기행으로 안양과 군포에 있는 수리산을 오릅니다 (0) | 2015.06.24 |
길위에 인문학- <삼국유사>의 현장을 따라 걷는 경주 기행 (0) | 2015.02.13 |
거제도의 보석 같은 섬, 지심도와 내도를 가다. (0) | 2015.02.13 |
정읍 내장산의 겨울 속으로 들어가다. (0) | 2015.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