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열 한 번 째 -아산시 인주면에서 평택시 원정리까지

산중산담 2015. 6. 24. 22:53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열 한 번 째. -아산시 인주면에서 평택시 원정리까지

 

갑오년에 시작한 서해안 걷기가 긴 겨울잠을 끝내고 을미년 3월에 열한 번째로 실시됩니다. 아산시 인주면에서 평택을 지나고 경기도 화성시의 입구인 남양만까지 이어질 이번 기행은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는 기행이 될 것입니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의 무덤과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는 수도사를 지나 아산만과 남양만을 지나는 여정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기행부터 답사비를 어쩔 수 없이 1만원씩 올렸습니다.

그 동안 물가가 너무 올랐기 때문입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유궁포(由宮浦)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와서 안성천 하구에 있는 지금의 아산호, 즉 소사하와 합치며 두 가닥 물이 만나는 그 사이가 아산이다. 칠장산에서 비롯된 산줄기가 안성 서운산을 지나 성거산에 와서 다시 한 줄기를 들 가운데에 뻗어 내렸는데, 이 산줄기가 천안시의 성환읍을 지나 아산시 영인면에 있는 영인산에서 그쳤다. 이 산이 곧 아산의 진산이다.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많은 아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아산군온양군신창군이 합쳐져 아산군이 되었다가 시로 변한 아산군의 백제 때 이름은 아술현(牙述縣)이었다. 신라 때에는 음봉(陰峯)이라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에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이 군의 형세를 정이오(鄭以五),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차하여 대치해 섰고, 두 시냇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기후가 차다.”고 기록된 아산의 당시 호수는 482호이고 인구는 1822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17, 진군이 55, 선군이 2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덕산망경산배방산영인산 등의 산이 솟아 있고, 삽교천으로 무한천과 곡교천이 흐르면서 당정평야를 이루어 놓았다. 이승소가 그의 시에서, “아산은 역시 옛부터 이름 있는 지역으로,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많아 한쪽 지방에서 으뜸갔던 곳, 풍속의 후박을 어찌 깊이 걱정하며, 시읍(市邑)의 흥폐를 다시 누구를 원망하랴라고 하였다.

아산에 편입된 온양은 온천으로 이름이 높은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온양온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세조 10) 3월 초하루에 온양군의 온탕에 거가(車駕)를 머무르셨다. 그러한 지 4일 만에 신천이 홀연 솟아올라 뜰에 가득히 흘러 찼다. 성상께서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고 명하여, 그곳을 파니, 물이 철철 넘쳐 나오는데 그 차기는 눈과 같고, 그 맑기는 거울 같았으며, 맛은 달고도 짜릿하였고, 성질이 부드럽고도 고왔다. 명하여 수종한 재상들에게 반포해 보이시니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또 서로 이르기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새로 생기어 탕정(湯井)의 물은 따뜻하고, 이 우물은 차니, 이는 실로 상서의 발로이다. 하며 8도에서 표문을 올려 하례 칭송하니, 드디어 주필(駐畢) 신정(神井)이란 이름을 내렸다.”

이순신이 살았던 곳

한편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에는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서울의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그의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오던 아산에서 살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은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1216일 남해의 노량해전에서 왜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백 년 뒤 그의 고향에 지역 선비들이 사당을 세웠으며, 숙종이 현충사라는 편액을 내렸으나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그뒤 1932년에야 성금을 거두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아산은 조선 말기에도 청일전쟁의 격전장이 되었다. “아산이 깨어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말은 싸움판에 누가 이기든지 결판이 날 때까지 싸우자고 할 때 쓰는 말인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내 나라 땅에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전쟁을 치르는데도 보고만 있었다는 것 또한 실로 특이한 일이었다.

아산의 진산 영인산은 평지돌출의 산으로 매우 높고 험준하여 큰 가뭄이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었다. 몽고군이 쳐들어 왔을 때 평택지역 사람들이 피난을 왔었던 이 산은 동남쪽에서 서북편으로 향하였고, 아산호의 하류가 여기에 와서는 산 바로 앞에 감돌아 피어 있다. 그 후면에서 삽교천 큰 물줄기가 동남쪽에서 흘러오는데 양쪽 물이 서북 땅에 함께 모여서 아산만이 되었다.

아산만 남쪽의 산 하나는 신창에서 뻗어온 것이고, 호수 북쪽의 산 하나는 수원에서 뻗어왔는데, 이 산이 수구를 감싸 안아서 양쪽의 문같이 보인다. 강물이 문을 통해 나오면 곧 유궁포의 하류와 합치며, 공산(公山)은 큰 배에 돛을 올린 것 같다. 공산도 전체가 돌이며, 중류에 우뚝 서서 발해(渤海) 복판에 있는 갈석산과 같다.

신흥대학교의 김추윤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유궁포는 지금의 삽교변, 즉 덕산군의 비방곶면에 있던 큰 포구였다. 현재의 아산시 신창면 돈포리의 돈곶포와 마주보는 삽교천 건너 함덕읍 쪽의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에 있었던 유궁포는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발달한 포구였다.

조정에서는 영인산의 북쪽 바닷가인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공세창(貢稅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근해 여러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서 매년 배에 실어 서울로 날랐으므로 이 호수를 공세호(貢稅湖)라 불렀다. 공세리 성당이 들어선 공세리는 조선 시대 충청도 일대의 공세미( 세금으로 내는 쌀)를 모아 보내던 나루터였으며, 지금 공세리 성당 자리는 공세미를 쌓아 두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부터 생선과 소금이 넉넉했는데, 창을 설치한 후부터는 백성들과 장사꾼이 많이 모여들어서 부유한 집이 많았다. 창이 있는 마을만 그러할 뿐 아니라 영인산 두 갈래의 물길, 즉 곡교천과 둔포천 사이에 그쳐서 기세와 맥이 풀리지 않았고 곡교평야가 펼쳐져 있으므로 산의 전후와 좌우가 모두 이름난 마을이며 사대부들의 집이 많았다.

유궁포의 동쪽과 서쪽의 여러 고을에는 모두 장삿배가 통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산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지금 예산은 예당저수지에서 넓혀진 뒤 무한천이라는 이름을 얻어 삽교호로 들어갈 뿐 그 옛날의 활기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

산은 낮고 옥야는 평평한 평택

화성시 남서쪽에 자리 잡은 평택시는 고구려의 영토로 하팔현(河八縣)으로 불리었다. ?세종실록지리지?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호수가 197호이고, 인구가 704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8, 진군이 3, 선군이 78명이라고 기록된 평택은 1914년 양성현과 직산현의 일부를 떼어내어 진위군(振威郡)이 되었다가 1924년에 평택으로 바뀌었다.

평택의 풍속은 대체로 부드럽고 순하니, 유달리 굳세고 과감하여 떨쳐 일어나는 기운이 없다. 이는 또한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글공부나 무예에 힘쓸 겨를이 없어 일찍이 마음에 둘 염려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에 실린 평택의 풍속을 논한 글이다.

재능과 기예가 있으나 무인이 선비보다 많다. 백성들이 근본인 농업에 힘쓰고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아서,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드물다.” 진위의 풍속을 논한 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박서생(朴瑞生)의 시에 물 천천히 흐르고 산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골골마다 밭가리를 일 는다라고 하였고, 노숙동(盧叔同)기름진 들 멀리 손 모양 모양 평평한데 농부들 도롱이 삿갓 쓴 채 구름 헤치며 밭을 간다. 봄바람 질펀한 들엔 꽃바다 이루었고 밭머리에선 꾀꼬리가 아래 우로 나르며 운다라고 하였던 것처럼, 평택은 들이 넓어서 쌀의 본고장, 즉 경기미의 본고장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 하륜(河崙)길이 남과 북으로 통 한다하였고, 서거정 또한 삼도의 요충이 되는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평택은 서울에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평택군지(平澤郡誌)?에 의하면 청북면 고잔리의 고잔포는 한강 하류를 거쳐서 마포나 인천으로 가는 뱃길 중에 중요한 포구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이므로 사신과 빈객의 행차가 잇달아서 영접하고 전송하고 공제하느라고 넉넉하지 못함이 염려 된다고 하여 이곳 평택고을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서거정 또한 이 가난한 백성과 궁폐한 아전이 번거로운 영접과 전송에 곤란을 당하고 또 무슨 다른 일을 거론할 것이 있으랴라고 뒷받침하고 있다.

<여지도서><진위현> 편에도 이곳이 나라 안에 중요한 길목이라는 것이 실려 있다.

관아 앞대로는 바로 북쪽 서울에서 삼남으로 가는 큰 길이다. 동쪽으로 양성까지 20리인데, 바로 소로이다. 서쪽으로 수원의 분양로에 이르는데 소로이다.”

그러한 이유로 벼슬아치들이 묵어가던 객사마저 터가 낮고 습하여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위태한 곳이 거의 반이나 된다.”고 하였을 만큼 가난했던 곳이 바로 평택이었다.

그러나 평택 일대에 철로와 길이 뚫리고, 한국전쟁 전까지 숯을 구워 팔던 송탄시의 신장동 일대에 미군과 비행장, 기지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시로 변모했다. 19951월 송탄시와 통합된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와 평택항이 건설되면서 활기를 띄고 있다.

이 지역을 흐르는 안성천을 중심으로 평택평야가 드넓게 펼쳐진다. 그런 연유로 이 평택을 두고 돌이 없고, 칡이 없고, 산다운 산이 없고, 물고기가 없다평택 팔무八無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한편 그 당시 진위군 관할이었던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에는 수도사라는 절이 있는데 창건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이 절에 원효와 의상스님에 대한 전설이 서려 있다. 신라 제 28대임금인 진덕여왕 4(650)에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이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길에 배를 기다리며 이 절에 하룻밤을 머물렀다. 원효대사가 밤중에 목이 말라 절 뒤로 가서 구멍에 담겨진 물을 마시니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그 물이 담겨 있던 곳이 해골바가지였다. 그 해골과 해골에 남아 있는 물을 바라보자 메스꺼움이 밀려와 토하다 생각하니,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물이 바라보자마자 구역질이 나는 것으로 변하는, 그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는 곧 바로 집으로 돌아왔고, 의상대사만 당나라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한 뒤 영주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을 세웠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기도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