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두번째 - 연천에서 철원까지

산중산담 2015. 6. 25. 23:14

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두번째 연천에서 철원까지

 

 

휴전선을 따라 걷는 첫 번째 여정이 무사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민간인 통제금지구역을 걸을 수는 없었지만 임진강을 따라 걷는 여정은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키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휴전선기행을 준비합니다. 이번 여정은 연천의 주상절리에서 징파나루를 거쳐 중면 신서면의 휴전선을 통과해서 강원도 철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곳에는 태풍전망대와 열쇠전망대, 그리고 백마고지, 월정역 부근 철의 삼각전망대를 거쳐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남아 있는 한탄강변의 정자연에 이르는 구간입니다.

휴전선의 백미라고 불릴 수 있는 중부전선을 걷게 될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 <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징파도澄波渡와 후근도가 있는데 후근도는 징파도와 양주의 한탄물이 이곳에서 합류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지원은 임진강변인 징파도 언덕에 있다하였던 징파도가 <택리지>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광복촌의 물이 이천 앞에 와서는 더욱 커져서 강이 된다. 매양 봄여름에 물이 불어나면 세곡 실은 배를 바로 띄워서 서울로 실어 나른다. 강물이 안협에 이르러 고미탄 물과 합치고, 토산을 지나 삭령의 징파도(지금의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에 이르면 강이 맑고 산이 멀며, 경성사대부 집의 정자와 누각이 있다.”

이곳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의 징파나루에 얽힌 얘기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력萬曆 임진년 왜변이 일어났을 때 난리를 피하는 선비 집 여자들은 모두 징파나루에 이르러 다투어 배를 타고 건너니, 거리는 손을 뻗치면 닿을만한 곳이다. 그 때 어떤 부인이 계집종을 따라서 여기에 나왔으나 배에 미처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뱃사공이 부인의 손을 잡아당겨서 올리려고 하였다. 부인이 크게 통곡하면서 내 손이 네 놈의 손에 욕을 당하였으니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고 곧 물에 빠져죽었다. 그의 여종도 통곡하며 내 상전이 이미 빠져 죽었으니 어떻게 차마 홀로 살겠는가?’하고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외간 남자에게 손을 잡힌 것이 치욕이라고 여겼던 것이 그 당시 조선 아낙네들의 풍속이었다.

한편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미수 허목許穆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살았던 은거당恩居堂이라는 마을이 있다. 미수 허목( 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선조 28년부터 숙종 8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이고 호는 미수(眉叟). 찬성을 지낸 자()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별제 강(橿),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교(). 어머니는 그 이름난 문장가인 임제(林悌)의 딸이고 아내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였다.

정언눌(鄭彦窓)에게 글을 배운 허목은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에게 글을 배우다가 문위의 소개를 받아 한강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서 살았던 허목은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했는데, 그때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를 완성하였다.

그림과 글씨 그리고 문장에 능했던 허목은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의 제 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삼척에 있는 척주 동해비이고 그림으로는 묵죽도가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기도 편에서

조선시대에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가 있던 철원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建置沿革)’편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이다. 모율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이 철성군(鐵城郡)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하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고치어 동주(東州)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모든 목을 재정비할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낮추어 부로 하였고, 조선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종 16년에는 경기로부터 옮겨다가 본도에 예속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일찍 추워진다라고 하였던 철원의 당시 호수는 351호였고, 인구가 720명이다. 군청은 시위군이 62명이었다. “풍속이 순박하여 송사가 까다롭지 않다.” 철원의 풍속이고, “남쪽으로 이름난 산들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 널따란 들판이 트여 있다.” 철원의 형승이고, “함경도로 가는 길 수백 리, 안팎의 온 강산이 또렷이 내 눈 안에 들어오네.”이이만李頤晩의 기에 실린 글이다. 산의 모양이 날아가는 학의 형체인 금학산金鶴山(947)이 동송읍 뒤편에 자리 잡아 진산이 되고, ‘한국의 그랜드캐년 이라고 부르는 한탄강이 흐르며, 철원평야라는 강원도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 쇠 둘레의 땅 철원이다.

그런 연유로 경원선 열차가 다닐 때에 철원의 서남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열차의 연기를 평강지방에 이르러 사라지기 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철원의 역사에서 궁예의 태봉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통일한국이 이루어진다면 맨 먼저 할 일이 휴전선 가운데에 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궁예란 자는 신라의 왕자로서 젊었을 대부터 무뢰한(無賴漢)이었고, 장성하여서는 안성죽산 사이의 도둑이 되어 고구려와 예맥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무도하였으므로 부하에게 쫓겨나고 태조 왕건이 드디어 군중에게 추대되었는바, 이것이 고려를 건국하게 된 시초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 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탓에 궁예는 어느 기록에서는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8-1철원

궁예가 개성철원지역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던 때가 893년이다.

궁예의 한이 서린 궁예도성

궁예는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치며 후백제의 견훤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였던 왕건이 호족들과 연합하여 궁예를 축출했다. 905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 태봉국의 서울로서 한 나라의 중심지였던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의 비무장지대에는 풍천원(楓川原)이라는 들에 터만 남아 있다.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은 그 흔적만 있고 두 겹으로 쌓았던 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용재총화(傭齋叢話)?철원은 궁예가 차지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경성의 옛 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지세가 막혀 강하(江河)는 조운이 어렵다라고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 땅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궁왕 대궐 터에 오작이 지지괴니 천고흥망을 아는다 모르는다라고 읊었고, 서거정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라가 깨어져 한 고을이 되었구나

태봉의 끼친 자취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하게 하네

지금은 미륵이 와서 노는 곳

예와 같이 어룡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비낀 채 엷은 연기는 하늘과 함께 멀고

떨어진 곳 나는 버들개지는 물과 같이 유유하네

당시의 거울의 참언은 참 임금께 돌아갔는데

가소롭다 궁예 왕은 제멋대로 놀기만 일삼았으니

강원도 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철원평야는 비무장지대를 지나 평강고원으로 이어진다. 금학산오성산대성산백암산명성산 등이 있으며, 그 중에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들어가 울었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철원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이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 갈말면의 북쪽에서 남대천을 합친 뒤 갈말면과 어운면, 동송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 경기도 포천군 전곡읍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탄강을 석체천(石切川)이라 기록하였는데, “양쪽 언덕의 석벽이 모두 계석체와 같아 체천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또한 한탄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원이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어느 날 남쪽으로 내려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온 궁예가 이곳에 와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아하, 내 운명이 다 했구나하고 한탄을 하여 그때부터 이 강을 한탄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하나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한국전쟁 때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간 곳이라 해서 한탄강이라 불렀다는 슬픈 내력도 있다.

그 강물에 기대어 펼쳐진 철원평야는 분단이 되면서 심한 물 기근을 겪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원평야에 물을 대주던 봉래호의 물줄기를 황해도 쪽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 철원평야는 물이 모자라서 점차로 황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에 용화저수지와 하갈저수지 등을 만들었고 70년대에는 둘레가 몇십 리에 이르는 토교저수지를 포함한 저수지 여러 개를 새로 만들어 다시 물이 닿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물이 모자랐는데, 한탄강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기계를 곳곳에 설치한 뒤부터 철원평야의 물 걱정은 줄어들었고 지금은 기름진 땅이 되었다. 물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논 한 평에 500원쯤 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배로 뛰어올랐다고 한다.

철원에 관한 ?택리지?의 기록을 보자.

철원 고을이 비록 강원도에 딸렸으나 들판에 이루어진 고을로서 서쪽은 경기도 장단과 경계가 맞닿았다. 땅은 메마르나 들이 크고 산이 낮아 평탄하고 명랑하며 두 강 안쪽에 위치하였으니 또한 두메 속에 하나의 도회지이다. 들 복판에 물이 깊고 벌레 먹은 듯한 검은 돌이 있는데 매우 이상스럽다.

한탄강변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현무암, 즉 곰보돌이 있다.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 이루어진 곰보돌은 가볍고 모양새가 좋아 맷돌이나 절구통을 만들거나 담을 쌓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철원에 경원선 철도가 놓인 것은 1914년이었다. 서울과 원산함흥을 잇는 철도가 생김으로써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명주실을 비롯 동해안에서 나는 싱싱한 어자원들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 뒤 1936년에는 경원선이 지나는 철원역에서 금강산의 장안사에 이르는 전기철도가 개통되었다.

철의 삼각지

한편 철원 하면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백마고지아이스크림 고지김일성고지 등의 싸움터이다. 한국전쟁 때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인 이곳 비무장지대인 월정역에는 가다가 부서진 채 고철로 남아 있는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를 들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철원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10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에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에 적힌 대로 포탄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을 채울 만큼 치열했다. 높이가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에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4천 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십만 발이 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가 세 개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노동당사는 그날의 상혼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고,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씌어진 채 부서진 열차만 서 있을 뿐이고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도선국사가 세운 도피안사到彼岸寺가 있다. 도피안사는 속세를 넘어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 절집으로 이절에 국보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철불의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인 철불이 있다. 신라 경덕왕 5년인 865년에 철원지방의 향도香徒 1500여명이 결연結緣하여 조성했다.“ 라는 기록과 함께 <함통 6년 기유 정월 咸通 六年 己酉 正月>이라는 문구가 철불 뒷면에 남아 있어 그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원래 이 철불은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 했던 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운반 도중 없어졌는데 나중에 찾고 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곳에 있기를 원한 불상의 뜻에 따라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철불을 모셨는데, 그가 세운 이 나라 800여개의 비보사찰중 하나라고 한다. 도피안사가 들어선 화개산은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연약한 모습이라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침략에 대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중창과 중건을 거듭하던 도피안사는 1898년 큰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는데 영주산인靈珠山人 월운月雲스님과 강대용姜大容이 재 창건을 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서 폐허로 변했다.

그 뒤 9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당시 15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명재李明載 장군의 꿈에 불상이 나타나 땅 속에 묻혀 있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기운은 느낀 그가 전방 시찰을 나갔다가 간밤 꿈에서 땅속에 묻힌 불상과 함께 보았던 여자를 발견하고 불에 타서 흔적만 남은 도피안사 일대를 뒤지다가 땅 속에 묻혀 있던 불상을 발견하고 장병들의 손으로 절을 다시 지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좌불상은 전남 장흥에 있는 보림사의 철불(국보 제 117)과 함께 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철불이다. 그런데 철불에 금분을 입혀 원래의 모습을 추정할 수 없는 것이 흠이고, 대웅전 앞에 자리 잡은 석탑은 보물 제 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철원과 신철원으로 나누어진 철원의 명소는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불리는 직탕폭포(直湯瀑布) 고석정(孤石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석정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남아 있다.

고석정은 부의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바윗돌들이 솟아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고려의 중 무외(無畏)의 기에 철원군의 남쪽 1만여 보에 고석정이 있는데, 큰 바위가 우뚝 솟았으니 거의 300척이나 되고 둘레가 10여 장이나 된다. 바위를 기어 올라가면 한 구멍이 있는데 기어 들어가면 방과 같다. 층대에는 사람 여남은 명이 앉을 만하다. 그 곁에 신라 진평왕이 남긴 비석이 있다.

다시 구멍에서 나와 오르면 꼭대기가 울퉁불퉁하여 마치 둥근 단과 같다. 거친 이끼가 입혀져서 자리를 펼친듯하고, 푸른 솔이 둘러서 이산을 편듯하다. 부딪치고 돌이 구르는 소리가 마치 여러 가지 악기를 한꺼번에 연주하는 듯하다. 바위 아래에 이르러서는 물이 고여 연못을 이루었는데, 굽어보면 두려워서 벌벌 떨리니 마치 그 속에 신령스러운 어떤 대상이 살고 있을 것 같다. 그 물이 서쪽으로 30 리쯤 달려서는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로는 모두 바위산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단풍나무와 녹나무, 소나무와 참나무가 그 위에 뒤섞여 나 있다. 맑고 시원하며 기묘하고 이상하니, 비록 글 잘 짓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비슷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석정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복판에 치솟은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우뚝하게 솟아 있고, 그 양쪽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직탕폭포 아랫자락에 승일교(承日橋)가 있다.

승일교를 거쳐 온 한탄강은 이 지역에서 강폭이 넓어지는데 그 옛날 있었다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수수한 모양새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고석정은 조선시대 최대의 도적이었던 임꺽정이 활동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속에서 고석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듯 아름다웠던 강 한탄강도 그 밑으로 댐이 생기고, 래프팅을 비롯한 관광개발이 진행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강원도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