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세 번째 - 김화에서 화천까지

산중산담 2015. 6. 25. 23:57

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세 번째 김화에서 화천까지

 

 

 

휴전선을 따라 걷는 두 번째 여정이 시작도 되기 전에 세 번째 여정을 준비합니다. 이번 여정은 한탄강을 건너 김화를 거쳐 화천에 이르는 구간으로 7월의 두 번째 주말에 실시됩니다.

어엿한 하나의 군이었던 김화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철원에 소속된 읍으로 철의 삼각지 중의 한 곳입니다.

승리전망대 지나 김화군 근남면 마현리에서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가 말 고개라고도 부르는 마현령馬峴嶺입니다. 적근산赤根山(1073)과 대성산大成山(1175) 사이에 있는 이 고개도 산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절벽을 따라 있는 길 하나가 백번 꺾이고 천 번 돌아나가므로 화천과 춘천으로 가는 요충지였습니다.

적근산은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곳으로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의 한 곳이었습니다.

철원과 내금강산의 장안사를 연결하는 금강산 전기철도가 개설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국도가 신설되기 전까지, 단발령을 지나는 도로는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간선도로였다. 그러나 1킬로미터 가량의 단발령 터널이 완성되면서 단발령 일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창도군 아래편에 있는 고을이 김화군金化君이다. 김화군은 강원도 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부는 창도군, 서부는 평강군, 본부는 회양군과 세포군, 남부는 철원군과 접하고 있다.

김화군은 고구려 때의 부여군(夫如郡)으로, 신라 때 부평군(富平郡)이었다가 고려 현종 9(1018)에 김화로 개칭하면서 동주에 속하게 되었다. 태종 13(1413)에 김화현으로 되어 오래 계속되다가 조선 말기에 군이 되고 1914년에 김성군과 통합했다. 그 후 1945년까지 김화군의 행정구역은 1개 읍, 11개 면이었으며, 1952년 개편 때 창도군으로 흡수됐다가 1954년 다시 갈라져 나와 오늘의 김화군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형승조 강희백(姜淮伯)의 시에 산협은 큰 강을 얽어서 험하며 막힌 곳을 만들었고, 백성은 메마른 땅에 의존하여 간난함을 참는다하였고, 성석인(成石因)은 그의 시에서 산천이 담담하게 막혀서 평탄한 땅이 없구나. 뽕나무산뽕나무 쓸쓸한 사이에 몇 집이 있는가. 태수는 스스로 수령된 기쁨을 말하기를, 아전과 백성은 비록 적으나 오는 손은 많다네하였으며, 우승범(寓承範) 역시 작은 뜰에 잎이 떨어지니 사람의 발자취 없고, 한밤중에 달 밝으니 학의 소리 듣노라하였다. 김화군은 38선 이북의 북한지역이었으나 1953년 휴전 이후 근남면 김화읍 서면 등이 남한 땅에 들었고, 현재는 9개 면과 90리가 북한에 소속되어 있다.

백역산백운산정암산남미봉오성산대성산 등이 솟아 있고, 군의 남동부 지역을 북한강과 그 지류인 금성천이 흐르며 중앙부에는 남대천, 서남부 지역에는 한탄강이 임진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근남면의 매월대는 매월당 김시습이 은둔하면서 여덟 선비와 담론하던 곳으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으며, 사곡리에는 김시습이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터가 남아 있다.

이곳 김화에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자취가 여러 곳 남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관아의 동쪽 7리에 있던 주필봉駐驆峯이다. 세조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가던 길에 이 봉우리에 올라 들판에서 사냥을 했다고 한다. 그 뒤부터 임금의 행차가 머물렀다는 뜻으로 주필이라고 했는데, 그곳의 지명은 삼이현三伊峴이다.

관아의 남쪽 5리에 있던 어수정御水井은 세조가 이 고을에 머무르며 사냥할 때 물의 성질이 무거운지 가벼운지를 시험해 보았다. 이 물의 성질이 가장 무거워 가져다가 수라를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그 우물의 이름을 임금에게 올리는 물이라는 뜻으로 어수정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진흙과 모래에 덮여버렸다.“

하늘만 바라보며 사는 땅이지만 상례와 장례에 삼가고 조심한다. 사리에 어두워 교화를 따르지 않으니 어리석음을 면하지 못한다. 성품이 꽤 꾸밈없고 순박하며, 생업은 농사와 장사에 부지런하다. 지난 옛날을 살펴보면 무예를 모두 숭상하여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많았다.”라고 평한 김화군에서 함경도로 가는 길목에 여파령餘破嶺이 있었다. 산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나 골짜기가 좁고 길이 험해 소나 말이 나란히 통행할 수 없어 요충지 중의 한 곳이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강원도편에서

화천도 한국전쟁의 상흔이 깊이 자리 잡은 곳이다. 적근산은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산이며, 파로호는 중공군과 북한군 몇만 명이 죽은 곳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지은 이름이다. 또한 캐러멜 고개는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 광덕산에서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원래의 지명은 광덕(廣德)고개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 주둔한 사단장이 작전수행을 위해 이 고개를 넘을 때 운전병이 졸지 못하도록 모퉁이를 돌 때마다 캐러멜을 주도록 지시한 이후 캐러멜 고개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서부전선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원도 스무 고을 중 가장 보잘 것 없지.

사또는 평생토록 가난해도 욕심 없다네.

골짜기 입구 나라 땅이라야 기장 정도 거두고

산허리의 관아는 사립문으로 겨우 가렸네.

사민 가운데 장인과 상인, 선비가 부족해,

아전 하나가 호방과 예방, 병방을 겸하네.

한낮 동헌에서 봄철 나른한 잠에 족하니

이 몸은 높은 벼슬 얽매일 일 잊었노라.“

이 고을의 수령을 지낸 이식립李植立이 노래한 것처럼 산세가 험하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곳이 이 지역이었다.

한편 이 곳 화천에 곡운구곡이 있다. 조선 중기 은둔 선비의 삶터를 보여주는 곡운구곡谷雲九谷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김수증金壽增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김수증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이다. 김상헌(尙憲)의 손자인 그는 1650(효종 1)에 생원이 되고, 형조 ·공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각 사()의 정()을 지냈다. 1670년에 김수증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복거(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1675(숙종 1) 그가 성천부사로 있을 때 동생 김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성천부사를 사임하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그 때 주자(朱子)의 무이구곡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하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그때 화가 조세걸(曺世傑)에게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괴산의 화양구곡과 함께 화음동정사가 있던 이곳은 당시 선비들의 이상향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구곡 중 실경이 남아 있는 몇 곳 중의 한 곳이라고 하며, 중용의 미를 보여주는 자연 경영이라고 한다.

각 곡()마다 김수증의 아들, 조카, 외손 등 아홉 명이 매곡을 읊었다는 시비가 있다. 1곡은 김수증, 2곡은 아들 창국, 3곡은 조카 창집, 4곡은 조카 창협, 5곡은 조카 창흡, 6곡은 아들 창직, 7곡은 조카 창업, 8곡은 조카 창즙, 9곡은 외손 홍유인이 지었다.

화음동정사는 곡운계곡의 7곡을 지나 다리를 건너 왼편 길로 들어간다. 삼일계곡이 있는 곳으로 김수증의 화음동지에 의하면 동쪽으로는 방화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칠선동에 이르는 곳으로 백운계(白雲溪) 위에 띠지붕 정자를 짓고 요엄유라 이름하였다한다. 창건 당시에는 삼일정, 부지암, 송풍정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없어졌으며, 바위에 새긴 화음동, 태극도, 인문석, 하도낙서, 복희, 팔괘 등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세계관을 조경에 나타낸 것이다.

1694년 갑술옥사 뒤에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좌윤(左尹)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은둔하였다. 당시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곡운집이 있다.

곡운구곡의 옛길은 계곡을 비켜가는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바로 계곡 옆에 길이 나면서 옛정취가 많이 훼손되었다.

화음동 정사 위편에는 신라시대 사찰 터에 세워진 법장사가 있다. 건축물이 지형에 어울리지는 않으나 화악산의 장엄한 위용을 맛볼 수 있다.

이곳 화천의 기우제는 특이하다. 다른 지역에서 돼지머리를 놓고 지내는 것과는 달리 개를 잡아서 그 피를 바위에 바르고 제사를 지낸다. 그것은 천한 짐승의 더러운 피를 씻으려고 하늘에서 비를 내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하지가 지낸 뒤에 지낸다고 한다. 그것은 더 이르게 지내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진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산이 가까워 구름이 골짜기에서 솟아오르니, 잠간 그늘졌다간 도로 맑아지곤 하네. 땅이 낮으니 봄물이 창일하고, 나무가 빽빽하니 여름 바람이 맑구나. 밤이 어두운데 등잔불에 무리지고, 처마가 비었으니 빗소리가 잘 들린다. 읊으면서 그대로 잠자지 못하노니, 치우치게 고향 생각이 일어나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강원도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