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신비의 탑사 마이산 자락을 걷고 숲이 우거진 곰치재 길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5. 10. 28. 20:16

 

신비의 탑사 마이산 자락을 걷고 숲이 우거진 곰치재 길을 걷는다.

 

 

 

 

을미년 7월 18일 토요일 마이산과 곰치재 길을 걷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신비의 탑사를 보고 가능하면 개방된 암마이산을 오르며 진안 일대의 산천을 바라보고 숲이 무성한 곰치재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두 봉우리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하늘에 꽂혀 있는 듯한 마이산은 전북 진안군 진안읍과 마령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200310월 명승지 12호로 지정된 해발 667m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으며 용암동문이라 새긴 암벽 사이를 들어서면 기암괴석이 뒤엉켜 기기묘묘한 형상을 연출하며 절경을 펼쳐놓고 있다. 이곳 마이산은 옛 신라 때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속금산이라 부르다가 태종 때에 이르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의 특징과 매력은 누가 뭐래도 그 생김새가 기기묘묘한 형태로 갖가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숫마이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부르는데 숫마이봉 중턱에는 화암굴이 있고, 이 굴속에는 맑은 약수가 솟아올라 이 약수를 마시면 옥동자를 잉태한다는 전설이 있다. 서쪽의 암마이봉 절벽 아래에는 120여 기의 돌탑을 ?戮?유명한 마이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탑사는 조선 후기에 이갑룡이라는 처사가 발원하여 전국 명산의 돌을 몇 개씩 날라다 이곳의 작은 바윗돌과 함께 쌓아 만든 탑이라고 한다. 이름이 이경의李敬議 는 갑룡甲龍 는 석정石亭인 그는 임실 둔덕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간 시묘를 했다.

용출봉이라고 불렀던 마이산

그 후 전국의 명산을 전전하다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을 주식으로 생식하며 수도를 하던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아 탑을 쌓기 시작했다. 만불탑(萬佛塔)을 단석으로 쌓아 올린 것도 있고 기단을 원추형으로 단석으로 쌓아 올린 것도 있다.

이 지역에는 이갑룡 처사에 대한 신령스런 이야기도 많이 만들어졌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숫마이봉을 나막신을 신고서 오르내렸다고도 하고 어느 때는 명주 열여덟 필을 써서 서로 외면하고 있는 마이산 두 봉우리를 연결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기단을 쌓을 때에도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탑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탑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이갑룡 처사 혼자서 쌓은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아 쌓은 것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그가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스런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 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돌탑들은 거센 폭풍우에도 넘어지는 일이 없으며 단위에 놓여있는 정화그릇은 겨울에 물을 갈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 표면으로부터 1015cm의 고드름이 솟아오르는 신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탑이 쓰러지지 않는 것은 석질에 순인력(順引力)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숫 마이봉 남쪽 기슭에는 은수사가 자리 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마이산과 비슷한 작은 마이산이 서있다.

한편 마이산은 흙이 하나도 없는 콘크리트 지질의 두 개의 커다란 역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산으로 그 모양이 흡사 말의 귀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흙 한줌 없는 이 산을 본 어떤 미국인이 이 산을 쌓을 수 있는 기술은 물론이고 그 엄청난 양의 시멘트를 어떻게 충당했느냐하며 혀를 내둘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

암마이산을 오르는 길.

마이산을 오르는 길은 진안읍에서 사양골을 지나 마이산을 오르는 방법이 있고, 마령면 동촌리로 해서 마이산 탑사를 거쳐 암 마이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산악인들은 장비를 갖추면 숫마이 봉을 오를 수 있지만 대개의 일반인들은 암마이봉을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에 바위산인데도 암마이봉을 오르는 길이 제법 잘 나 있어서 초보자도 무리 없이 오를 수가 있다. 진안에 살면서도 이곳 마이산을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이 많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마이산을 그저 만만하게만 보았던 것이 아닐까 싶게 가파르다.

산은 자꾸 가파르고 먼데, 산들이 더욱더 선명하게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흘린 땀을 오랜만에 소매 끝으로 닦는다. 후련하면서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살아나는 생각들 이 세상에 살면서 나는 얼마나 간절히 이 세상을 벗어나고자 했던가. 내가 흘린 땀 만큼 내가 세상을 사랑한 만큼 세상은 나를 몰아세운다고 속 좁게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생각하며 오르는 사이 정상에 이른다. 진안군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산에서면 장수 영취산에서부터 비롯된 호남금남정맥이 장수 팔공산과 섬진강의 발원지산인 봉황산을 지나 성수산을 거쳐 마이산이 이어진 산금이 보이고, 덕태산 선각산. 운장산 부귀산이 보인다. 저기쯤이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몸을 나뉘는 주화산일 것이다.

해발 667m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이 마이산이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마이산(馬耳山) : 현의 남쪽 7리에 돌산이 하나 있는데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涌出峯)이라 이름하였다. 높이 솟은 봉우리 중에서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 높이는 천 길이나 되고 꼭대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사면이 준절(峻絶)하여 사람들이 오를 수 없고 오직 모봉(母峯)의 북쪽 언덕으로만 오를 수가 있다.”

조선 태종(太宗)이 남행(南幸)하는 길에 산 아래에 이르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이 산을 두고 조선초기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밖에 떨어지니, 쌍으로 쭈삣한 것이 말의 귀와 같거나, 높이는 몇 천 길인지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中原)에도 또한 이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공교함은 끝이 없으니, 길이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 일을 생각하도다. 내 이곳에 가을비 뒤에 오니, 푸른빛과 붉은빛이 비단처럼 엇갈렸네, 멀리 바라보노라고 고개를 돌리지 아니하니 문은 밤새도록 열어 둔 대로다. 어떻게 해서 신선의 녹옥장(綠玉杖)을 얻어 높이 걸어 진흙 찌꺼기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나 쇠석암(哸石庵)에서 묵고 봉정()에 올라 샘물을 웅켜서 선동(仙童)과 서로 상의하여 방촌(方寸) 숟갈의 약을 먹을 고.“

전설에 의하면 1억여년 전 마이산의 들머리가 호숫가 즉 선상지였다고 하며 4천만여 년에 걸친 지각변동으로 다른 지역보다 600여 미터 이상 솟아올라 산이 되었다고 한다.

산 전체가 수성암(水成岩)으로 이루어진 마이산을 두고 부부봉 또는 부부산으로도 부르며, 그에 얽힌 이야기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