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네 번째 펀치볼이 있는 양구

산중산담 2015. 10. 28. 20:28

 

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네 번째 펀치볼이 있는 양구

 

펀치볼이 있는 양구

 

 

휴전선을 따라 걷는 네 번째 여정을 준비합니다. 이번 여정은 양구 일대를 걷는 여정으로 지난해부터 개방한 두타연 계곡과 박수근 화가의 예술혼이 깃들어 있는 박수근 미술관, 그리고 북한과 맞닿아 있는 펀치볼이라고 부르는 해안면 일대를 걷는 프로그램입니다.

길이 매우 험난한 양구

인제 북서쪽에 양구군楊口郡이 있다. “순박하며 농사에 힘쓴다. 아울러 학문과 무예도 숭상하며, 더러는 생원이나 진사도 나오고, 더러는 문과나 무과에 합격한다.” 양구의 풍속이다. 송구빈이라는 사람이고을이 고요하니 마음마저 고요하고 사람이 드무니 힐 일도 드무네.”라고 노래한 양구군은 고구려 때부터 독립된 고을로서 이름이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이렇듯 양구는 궁벽(窮僻)한 산골이라서 조선 초기까지 현령조차 두지 않았다고 하며 양구의 진산은 비봉산飛鳳山이다. 김극기가 그의 시에서 붉은 해가 아직 바다에 나오지 않았는데, 흰 안개는 오히려 산에 잠겼네. 새벽밥 지어 먹고 문득 동쪽으로 달리노니, 길이 매우 험난하도다. ()의 잔도(棧道)는 높고 가파른 데를 뚫었고 시내의 징검다리는 졸졸 흐르는 시내를 통과한다. 험한 산길을 애써 지나 푸른 기슭에 오니, 동구가 점점 넓고 조용해지네라고 노래한 양구군은 화천호와 소양호, 그리고 높디높은 산으로 에워싸인 고을이다.

강원도에서도 궁벽한 고장으로 소문이 자자한 이곳을 찾았던 사람이 고려 때의 문장가인 김극기였다.

붉은 해가 아직 바다에 나오지 않았는데, 흰 안개는 오히려 삼을 잠겼네. 새벽밥 지어먹고 문득 동쪽으로 가노라니, 길이 매우 험난하네. ()의 잔도棧道는 높고 가파른 데를 뚫었고, 시내의 징검다리는 졸졸 흐르는 시내를 통과한다. 험한 산길을 애써지나 푸른 기슭에 오니, 동구가 점점 넓고 조용해지네. 호각號角소리와 깃발 그림자가 멀리 교목의 숲 사이로 나타나네. 비로소 알겠네. 읍내의 아전들이, 나를 맞으러 방금 관을 지나는 것을, 갑자기 보니 운수현雲水縣이 보이니, 멧부리와 봉우리가 반이나 둘러쌓네. 뽕나무와 삼밭 3.4리요. 가옥家屋은 교목喬木 있는 물굽이에 잇닿네. 허공에 높이 객관이 솟았는데, 금벽金碧 광채가 빛나고 아롱지네. 아름다운 수풀은 북쪽 동산에 빽빽하여, 아득히 푸른 연기는 홍설紅雪이 가득하네. 솔바람은 시원하여 더위를 씻고, 대수에 비친 해(竹日)는 그윽한 데까지 비치네. 문득 이곳이 신선의 동부인가 의심되고, 티 끌 세상임을 누가 알랴. 사군使君은 청운에 어진 선비인데, 아직도 검은 머리이네. 오히려 류벽柳壁의 손()의 마른 왕골 같은 흰 귀밑털이 애달프구나.

맑은 눈동자들은 서로 나를 보며 못났다 하지 않네. 동쪽 바위에서 기녀는 부르니, 좌중에 어여쁘고 우아한 여인들이 둘러앉았네. 좋은 노래는 부드럽고 곱게 들리고, 묘한 춤은 돌고 돌며 추네. 첫 자리에서 이미 내가 수레타고 빨리 떠날까 염려하는구나. 잔을 들고 갑자기 보도報道하기를 말례末禮는 생략함이 좋겠다하네. 아녀자가 공연히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어찌 배울까 보냐.“ 하였다.

한편 이곳 양구군 양구읍 군량리軍糧里는 궁예 시대 맥국을 정벌할 때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고도 하고, 군량을 나르던 길이 이 골짜기를 거쳐 갔다고도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 격전지였던 이곳의 산들은 그 이전에는 무명봉이었지만, 하루에도 몇 차례씩 주인이 바뀌는 처절한 싸움 뒤에 제각각의 이름들이 붙었다.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단장의 능선펀치볼 분지크리스마스 고지유엔 고지 같은 이름들이 지어졌는데, 특히 방산면 현리에 있는 피의 능선과 그 북쪽에 11킬로미터에 걸쳐서 줄지어 늘어선 단장의 능선은 전쟁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던 1951년에 이 나라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했던 싸움의 현장이다.

1951817일부터 95일까지 피의 능선에서는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때의 상황을 미국의 역사학자 페렌바크(T. R. Fehrenbach)는 그가 쓴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군과 미군 제2사단은 전선을 따라서 자리 잡고 있는 고지 몇백 개 중에서 보잘것없는 이 둥근 언덕 세 개를 차지하기 위해 4천 명도 더 되는 아군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공산군도 4천 명 넘게 죽었고 부상자가 1만여 명이 넘었던 이 싸움터가 피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레마르크의 소설 제목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독일 서부전선의 현장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것으로 꼽는 단장의 능선에서는 1951913일부터 1013일까지 4만 명의 군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이때 미군이 쏘았던 포탄이 20만 발도 넘었다고 한다.

한편 양구의 특산물은 들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양구쌀이다. “양구 모래 한 말은 쌀 한 말하고 안 바꾼다는 말을 들을 만큼 이곳은 땅이 기름지다. 그래서 조선왕조 때에는 경기도 여주쌀이나 이천쌀과 함께 진상품으로 바쳐지기도 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쌀가게에서 양구쌀이라면 여느 쌀보다 값을 비싸게 쳐서 받기도 했는데, 지금은 각 지역마다 개발한 우수한 쌀들과 한국 쌀의 대명사인 여주이천쌀에 밀려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랴 어 어디 어냐 이랴 마랴/ 제일 차고 시레찬 논 슬스리 가쟈 어냐/ 어디 농부 일생 한 일은 널과 널과 말이로다./ 아냐에 이후우 돌구돌아/ 감돌고 풀돌아 가쟈/ 어디 저 안소 헐허리 가쟈/ 오늘 해도 중낮인데/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 헐허리 가쟈 어서 빨리 가쟈 저 안소/ 헐허리 돌게 아뇨우 어드루 후우/ 감돌고 풀돌아 헐허리 가쟈.“ 양구에서 전해져 오는 밭 갈이 노래다.

숨겨진 보물이라고 일컬어지는 두타연은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건솔리 수입천 지류에 발달하여 사태리 하류에 위치한 계곡이다. 사태리(沙汰里)는 상동면 지역으로 사태가 많이 나므로 사태동이라고 하였다. 두타연 부근에 옛날에 두타사란 절이 있었다는 것에서 조선 중엽부터 두타연계곡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지금 절의 흔적은 없다. 관동지"본현(本縣)의 사태동(沙汰洞)에서 나와 낭천(狼川) 모일강(暮日江)으로 들어간다. 관문에서 50리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타연에는 높이 10m, 60m의 두타폭포가 있는데 계곡에서 떨어지는 물살이 세어 굉음이 천지를 진동하고 한낮에도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을 흐리게 한다. 이 폭포 바로 아래에 있는 두타연은 기암괴석의 바위가 병풍을 두르고 있으며, 동쪽 암벽에는 3평 정도의 굴이 있는데 바닥에는 말() 발자욱이 반석 위에 찍혀 있다.

한국전쟁 후 60여 년 동안 인간의 손때를 타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오랜 시간 여행자의 발길을 거부해 오다가 평화의 댐이 완공되고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두타연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고, 지난 2004년 자연생태관광 코스로 개방되었다.

서민을 그린 화가

강원도 양구읍에 박수근 미술관이 있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박수근은 양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향지(享智)와 어머니 윤복주(尹福珠) 사이에서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構?가세가 몰락하게 되자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된 이후 1936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회까지 이 전람회의 공모 출품을 통하여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1952년 월남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대한미협전(大韓美協展)을 통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195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 작가가 되었으며, 이어 1962년에는 심사 위원이 되었다.

그는 나는 인간의 착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하였다.

주제에 있어서 앞의 말대로 그가 실제로 체험하였던 주변의 가난한 농가의 정경과 서민들의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생활 정경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주제에 풍부한 시정(詩情)을 가미하여 일관??있게 추구하였다. 그리고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향토색 짙은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였다.

특히 돌밭이나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마티에르는 그의 화풍상의 큰 특징이다. 붓과 나이프를 사용하여 자잘하고 깔깔한 물감의 층을 미묘하게 거듭 고착시켜 마치 화강암 표면 같은 바탕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독특한 감흥을 주는 굵고 우직한 검은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한국적 정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52년 이후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말년에 이르러 한층 더 심화되었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요약화된 형태들을 평면적으로 대비시켜 배치함으로써 그의 특이한 구성미와 현대적 조형성을 더욱 충실하게 이룩하였다.

그가 이룩한 회화 세계는 그가 죽은 뒤에 196510월 중앙공보관에서 열렸던 유작전과 1970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을 계기로 재평가되어 유화로서 가장 한국적 독창성을 발휘한 작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대표작으로 절구질하는 여인(1952빨래터(1954귀가(歸家)(1962고목과 여인(1964) 등이 있다.

박수근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상징인 국내 최북단 강원 양구의 일명 '펀치볼'에 둘레길이 조성돼 생태 및 안보관광 자원으로 활용된다.

북부지방산림청(청장 윤영균)은 양구군 해안면 일원 펀치볼 둘레길 44km 구간을 내달 1일 개통한다고 29일 밝혔다.

이날 개통식에 이어 둘레길 구간 가운데 평화의 숲길 4Km를 걷는 '숲사랑 숲길 걷기' 행사가 진행된다.

펀치볼 둘레길은 테마별 순환노선으로 평화의 숲길(통일관~현리시내12.3km) 구간과 오리나무 숲길(통일관~도솔천~현리교14.6km), 만들벌판길(통일관~물골교17km) 구간으로 조성됐다.

해안면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분지 하나가 1개면을 이루는 지역으로 세계 유일의 분단현장이라는 DMZ의 가치와 전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펀치볼은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로, 외국 종군기자들이 가칠봉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마치 '화채 그릇(Punch Bowl)'을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펀치볼 일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을지점망대이고, 펀치볼 둘레길을 걸으면서 그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