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최시형 선생의 묘소. 최시형이 숨어 지낸 이천시 앵산

산중산담 2012. 4. 22. 19:52

 

 

김지하 시인과 함께 간 해월 최시형이 숨어 지낸 이천시 앵산에 대한 추억,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해월 최시형은 자주 그 거처를 옮기며 세상의 이목을 피해 살았다. 충주에서 음성으로, 상주로 옮겼다가 1896년 2월에는 지금의 이천인 음죽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처를 계속 옮기면서도 각처의 두령들에게 포교를 멈추지 않았던 해월은 1897년 4월 5일에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앵산동 마을로 숨어들었다. 마을 앞에 작은 산 하나가 있는데 밖에서 보면 그 산으로 인해 마을이 안 보이고, 안에서는 밖에서 오는 모든 사람들을 살필 수 있는 전략적 요층지가 앵산이었다.

 

1997년이던가, 그 앵산을 같이 가기 위해 김지하 선생님과 함께 이천시의 한 허름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선생님과 나는 콜라를 마시고, 대여섯 명의 다른 일행들은 맥주를 마셨다.

그 날 저녁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숙연해진 김지하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신형! 경원敬遠이라는 말을 아시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왜? 사람들은 멀리서만 나를 바라보는지.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은 없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씀하시다가 끝내는 한참을 우시던 그 모습이 김지하 선생님의 이름만 들어도 생각이나 눈시울을 적실 때가 많은데,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니,

 

이 앵산 마을에서 해월은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가르친다. 향아설위란 제사를 지낼 때 위패와 밥그릇을 벽 쪽에 갖다 놓았던 이제까지의 고금동서의 일관된 제사 양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를 바꾸어 제사 지내는 법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 즉 자기 앞에 위패를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는 혁명적 제사를 일컫는다.

“물론 부모의 귀신이 자손에게 전하여 왔으며 선생님의 귀신이 제자들에게 내려왔을 것으로 믿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면 내 부모를 위하거나 선생님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그 위패를 반드시 그 제사를 지내는 나를 향해서 놓는 것이 가한 일이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또 누가 생각한다 하더라도 죽은 뒤에 귀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귀신은 훗날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서 배회하겠는가? 그러므로 제사 지내는 나, 즉 상제 앞으로 위패나 메밥그릇을 돌려 갖다 놓는 것은, 바로 직접적으로 한울님과 사람이 하나라는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며 천지만물이 내 몸에 갖추어져 있는 그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그 밤을 지내고 해월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향아설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에 앞으로 오만 년을 바꾸지 못할 법을 새로 만들었다.”

동학은 ‘향벽설위’를 ‘향아설위’로 물이 흔한 앵산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처음 발표했다. 해월 선생은 형식에 치우친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맑은 물 한 그릇으로 모든 의식을 치르기를 권고했다. 해월은 그곳에서 몇 개월을 보낸 뒤 1897년 7월에 원주로 옮겼다가 다시 홍천군 서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해월은 가는 곳마다 신도들에게 알기 쉬운 말로 설법을 했다.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라 하리오.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이 하라. 항상 꽃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들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데 들어가리라.”

“한 사람이 착해짐에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화해짐에 한 집안이 화해지고 한나라가 화해짐에 천하가 같이 화해지리니 비가 몹시 내리듯 하는 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

 

수운도 가고, 해월도 가고, 김지하 시인도 가셨다. 살아 있는 우리들 역시 곧 뒤따라 갈 것이다. 조금 빠르고 조금 늦을 뿐이다. 겸허하게, 살다가 그분들이 가신 곳으로 가서 모두가 환한 웃음 지으며 만날 수 있을까?

 

내세에서 모두 평안하소서, 상향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다.

4월 초 여드레는 아름다운 사람 예수가 부활 했다는 날이다. 그날, 박동규. 신우선 도반, 그리고 김경자 웅청예술치유박물관 관장님과 함께 내가 찾아간 곳은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의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 선생 묘소였다.

 

1898년 6월 5일 광희문에서 처형당한 뒤 신도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잠들고 있는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골짜기 사이를 헤집고 흐르는 시냇물소리,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나타나던 광금사 표지판, 그곳에서도 해월 묘소는 2km가 남았다는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 절에는 사람이 없고, 쇠줄과 함께 열쇠가 굳게 잠겨 있었다.

나오다 다시 돌아가 휘여 휘여 올라간 산, 박동규 선생의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맺힐 무렵 도착한 산 정상부근에 해월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해월 선생의 유적지를 여러 곳 다녔지만 묘소는 처음이다. 엎드려 절을 드린다. “너무 늦게 찾아왔습니다.” 하고 절을 하면서 혈육보다 더 진한 울림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해월선생에 대한 연민과 미안감 때문이리라.

정성스레 절을 올리고, 먼 데 산들을 바라다본다. 마치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묘소와 같이 멀리 퍼져나간 산들이 휘파람 불며 돌아오는 것 같다.

이 땅의 사람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해월 선생은 여러 어록을 남겼다.

 

 

“성한 것이 오래면 쇠하고 쇠한 것이 오래면 성하고, 밝은 것이 오래면 어둡고 어두운 것이 오래면 밝나니, 성쇠명암은 천도의 운이요, 흉한 뒤에는 망하고 망한 뒤에는 흥하고, 길한 뒤에는 흉하고, 흉한 뒤에는 길하나니 흥망길흉은 천도天道의 운이니라.” <개벽운수>에 실린 글이다.

 

 

1897년 4월 5일에 해월 선생은 경기도 이천군 앵산동 마을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가르친다.

향아설위란 제사를 지낼 때 위패와 밥그릇을 벽 쪽에 갖다 놓았던 이제까지의 고금동서의 일관된 제사 양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를 바꾸어 제사지내는 법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 즉 자기 앞에 위패를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는 혁명적 제사를 일컫는다.

 

 

“물론 부모의 귀신이 자손에게 전하여 왔으며 선생님의 귀신이 제자들에게 내려 왔을 것으로 믿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면 내 부모를 위하거나 선생님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그 위패를 반드시 그 제사를 지내는 나를 향해서 놓는 것이 가한 일이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또 누가 생각한다 하더라도 죽은 뒤에 귀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귀신은 훗날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서 배회하겠는가? 그러므로 제사 지내는 나, 즉 상제 앞으로 위패나 메밥 그릇을 돌려 갔다 놓는 것은, 바로 직접적으로 한울님과 사람이 하나라는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며 천지만물이 내 몸에 갖추어져 있는 그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그 밤을 지내고 해월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향아설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어제 밤에 앞으로 오만 년을 바꾸지 못할 법을 새로 만들었다.”동학은 '향벽설위'를 '향아설위' 로 물이 흔한 앵산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처음 발표했다.

 

해월 선생은 형식에 치우친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맑은 물 한 그릇으로 모든 의식을 치루기를 권고했다.

 

“이제부터는 일체 의식에 청수淸水 한 그릇만 사용하라. 물은 그 성질이 맑고 움직이는 것이며, 또 어느 곳에나 있지 않은 곳이 없는지라 참으로 만물의 근원이라 이를 것이니 내 이로서 의식의 표준물로 정하노라.“<천도교서天道敎書>

 

“사람 안에 하늘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 해월은 하늘과 사람을 같은 것이라고 보았으며 하느님의 영기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았다.

 

 

“우리 사람이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영기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요, 우리 사람이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기를 모시고 사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사람만이 홀로 하늘을 모셨다 이르리오. 천지만물이 다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 <천도교 백년약사>

 

최시형은 “하늘, 즉 도道를 아는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 밥 한 그릇을 먹는데 있다.萬事知는 食一碗이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치는 하나로서 만물의 본성이며,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하늘을 떠날 수 없고, 하늘은 사람을 떠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의 한 호흡, 한 동정, 한 의식도 서로 화하는 기틀이니 잠깐이라도 멀어지지 못한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둘러보는 해월 선생의 묘소 뒤편에 진달래꽃 무리들이 무수히 꽃망울을 머금고 있었다. 봄이면 봄마다 진달래꽃이 피어나면 이 묘역에 정지상鄭知常의 <두견화杜鵑花>시 한 편이 바람결에 흐르지 않을까?

 

 

“두견화 우는 소리 애끓으니 산대나무 찢어지고

통곡하여 흘린 피로 들꽃이 붉더라.“ (聲催山中裂 血染野花紅)

 

 

임진년 사월 초아흐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