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사월 넷째 주인 27일에서 29일까지의 여정을 청송과 영양에의 '외씨 버선길'에서 삼보사찰과 소나무 숲으로 이름난 경남 합천군 해인사 일대로 옮깁니다.
합천 해인사의 천년 옛길과 매화산 자락의 청량사, 그리고 들목의 월광사와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홍유동 계곡을 걷게 될 이번 도보답사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택리지』에 ‘임진왜란 당시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군이 들어오는 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과 소백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거창군과 경상북도의 성주군과 고령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봉인 상왕봉(1,430m), 두리봉(1,133m), 남산(1,113m), 단지봉(1,028m), 남산제1봉(1,010m), 매화산(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매화산 자락에 청량사 및 그 부속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에 있는 치인리 골짜기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 계곡을 이루고, 동남방을 흘러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이외에도 우두산․설산․삼왕산․중향산․지달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는데, 가야산에 있는 가야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에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시왕, 뇌질청에는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했다. 따라서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고 실려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 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신라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천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전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산속에는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죽어서 염을 한 뒤에, 다시 깨어나니 명부의 관원에게 약속한 발원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구입해서 배에 싣고 왔다. 목판에다 새긴 뒤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한 다음, 장경각藏經閣을 120칸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지금 일천여 년이 되었지만 판이 새로 새긴 것 같다. 날아가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기와지붕에 앉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儒家의 경전은 비록 내부의 깊은 궐내에 있다고 하여도 날아가는 새가 집 위를 지나가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불교 경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해인사 서북쪽이 가야산 상봉이다. 사면의 돌이 깎아지른 듯 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산 위에는 평탄한 곳이 있을 것 같지만 알 수가 없다. 그 위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서려 있으며, 초동과 목동들은 가끔씩 산봉우리 위에서 풍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또한 절에 있는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짙은 안개가 덮이면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鄭逑)는 『가야산 기행』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겨준다.’고 느낌을 표현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연유로 세 절을 각각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 사찰로 꼽는데, 법보사찰인 해인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애장왕3년(802)이었다. 고운 최치원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에서 해인사의 창건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사인 순응대덕은 신림대사에게서 공부하였고, 대력(766~779) 초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나무 쪽에 의지하여 몸을 잊고 고승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가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탐구하고 선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 정원18년(802) 10월 16일에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 이때 성목왕 태후께서 천하에 국모로 계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양육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집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의 방침을 취하여 건물을 새롭게 하니 구름이 솟아오르듯 노을이 퍼지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아졌다. 이에 가야산의 빼어난 경치는 도를 성취하는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사의 귀한 보배는 더욱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되었다.’
순응스님은 이 절을 세운 뒤 그의 증조스님인 의상의 화엄종지(華嚴宗旨)에 따라서 해인사라고 지었는데, 해인(海印)은 ‘세계 일체가 바다에 그림자로 찍히는 삼매’를 말하는 불교의 화엄정신을 나타낸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 곧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로, 이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라고 할 수 있다. 온갖 것에 물들지 않은 진실과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인데, 일심법계에는 물질적 유기세계, 중생들의 세계, 바른 깨달음에 의한 지혜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세차게 불던 바람에 드높던 파도가 어느새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수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 이러한 경지를 해인삼매라고 한다. 해인삼매는 부처가 이룩한 깨달음의 내용이며, 일체의 것들이 돌아가야 하는 근원이며, 본래의 모습이다. ‘해인사’라는 절 이름은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우리 산하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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