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오월 첫 주 어린이날을 맞아 경상도 땅으로 갑니다. 죽령 옛길과, 제비원 석불을 지나, 개목사에서 봉정사에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그날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병산서원에서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던 동재 서재에서 하룻밤 묵고, 하회 마을 가는 길을 걷고서 에천의 회룡포 로 향합니다. 아름다운 물길이 휘감아 도는 풍경이 오월의 신록에 환하게 밫닐 것입니다. 그리고 삼강주막을 지나고 경천대와 낙동나루를 지나서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신록의 계절 오월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과 역사와 국보급 문화유산이 산재한 길을 걷게 될 기행에 참여 바랍니다.
“ 강물이 휘돌아가는 하회마을
이중환이 “하회는 하나의 평평한 언덕이 황강 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향하여 있는 마을인데, 서애의 옛 집이 자리 잡고 있다. 황강 물이 휘돌아 출렁이며 마을 앞에 머무르면서 깊어진다. 수북산(水北山)은 학가산에서 갈라져 와서 강가에 자리 잡았는데, 모두 석벽이며 돌 빛이 온화하면서 수려하여 험한 모양이 전혀 없다. 그 위에 옥연정과 작은 암자가 바위 사이에 점점이 잇달았고, 소나무와 전나무로 덮혀서 참으로 절경이다”고 기록한 하회의 황강은 하회부근을 흐르는 낙동강을 부르는 옛 이름이고 그 일대는 부용대라 칭하는 곳이다.
하회마을은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 이후의 전통적 한옥들이 조성되어 있고 영남의 명기(名基)라는 풍수적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더불어 역사적으로는 하회별신굿과 같은 고려시대의 맥을 이은 민간전승 등이 매우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가져서 그 경관과 함께 정신문화의 보존․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라 안에 최고로 살 만한 곳으로 꼽혔던 하회마을은 풍산유씨(豐山 柳氏)의 동족마을이며, 그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고 도는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상 지형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 혹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부르는데 풍수가인 류종근씨는 하회마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곳의 주산인 화산(花山)은 멀리 태백산에서 달려온 맥이다. 서쪽으로 뻗어온 산맥이 풍산에 이르러 숨은 듯 일어나 화산을 만들고 그 맥이 다시 서쪽으로 돌아와 평야를 이루었다. 그 형국은 물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다. 부용대에서 바라보면 하회마을 뒤쪽에 자리 잡은 남산의 좌우에 벌려선 산봉우리들은 삼천귀인(三千貴人: 유학자들이 쓰던 정자관 모양의 세 봉우리)을 이루어 극귀현덕(極貴賢德)을 표상하고 있고 동쪽에서 흘러온 낙동강물은 하회마을을 감싸고 돌아 서쪽으로 빠져 나가니 이름하여 하회라. 동, 남, 북이 높고 서방은 낮은 대신 광활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원지산(遠志山)이 문필봉으로 허함을 막고 있으니 그 아니 좋은 곳인가.
그러나 그는, 마을의 집들이 북향이고 서쪽이 허하므로 큰 부자는 나기 어렵겠지만 낙동강이 지현만곡(之玄彎曲)하여 먹고 입는 것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풍산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許氏)․안씨(安氏)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635년(인조 13)의 『동원록(洞員錄)』에도 삼성(三姓)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기반은 중흥조 유운룡․유성룡 형제 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유운룡은 시조에서 풍산유씨 14대의 종손이며 유성룡은 지손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와 서애파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유서 깊고 규모가 갖추어진 가옥으로서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들은 모두 풍산유씨의 소유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 중추를 이루고 있어 유씨 동족마을의 형성시기와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화천(花川)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주변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서북쪽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하회별신굿과 강상유화
백사장이 펼쳐진 강 건너에는 층암절벽이 펼쳐지고 그 위에 여러 누정이 자리 잡고 있어 승경(勝景)으로서의 면모도 잘 갖추고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용대(芙蓉臺) 절벽과 옥연정(玉淵亭), 화천서당이 그리고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나가는 부근에는 겸암정(謙菴亭)과 상봉정(翔鳳亭)이 있다. 이곳 하회 부근에서 낙동강의 최대 너비는 대략 300m이며 최대수심은 5m에 이른다. 강 건너 인근과의 교통수단은 나룻배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관광객들을 위해서 나룻배를 운행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필자가 의견을 구하자, 하회 주민들의 말은 안동시에서 검토하고 있지만 “사고를 염려해 기관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데 과연 그런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와서 뱃사공 노릇을 하겠느냐?”고 배를 띄우지 못함을 아쉬워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진정에 의해서인지 2004년 여름에 다시 가보자 부용대로 오고 가는 배가 매어 있었다.(신정일의 신 택리지)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하고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거나 후진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으나 갈수록 향촌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사림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림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그들의 결속을 다졌고 세력을 키운 뒤 중앙 정계로 진출할 기반을 다졌던 곳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유씨(柳氏)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에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성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입교당(立敎堂)․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장판각(藏板閣)․동재(東齋)․서재(西齋)․만대루(睌對樓)․복례문(復禮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존덕사에는 유성룡을 주벽(主壁)으로 유진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특히 기단 앞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 놓은 대석(臺石)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 한다. 강당인 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기와집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樑)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祭官)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향사시 제수를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각각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문루(門樓)인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고자(庫子)가 개좌와 파좌를 외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팔작기와집에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中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되어 있다.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홍준 선생은 병산서원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 병산서원은 우리 나라 내로라 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환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현히 하나가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정일의 낙동강>
내성천과 금천이 합쳐지는 곳
삼강리(三江里)는 본래 용궁군 남산면(南上面)의 지역으로서 낙동강, 내성천, 금천(錦川)의 세 강이 마을 앞에서 몸을 섞기 때문에 삼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삼강리라 하여 예천군 풍양면에 편입되었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예천의 물줄기는 모두 한 곳에서 만난다. 안동댐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의 큰 흐름이 태백산 자락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을 이곳 풍양면 삼강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내성천(乃城川)은 봉화군 물야면 북쪽 선달산(先達山)과 옥석산(玉石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봉화면 포저리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이어 흐른다. 봉화읍 도촌리에 이르러 부석사가 자리잡은 봉화산 자락에서 발원한 낙화암천 또는 화암천(花岩川)을 합하여 다시 남쪽으로 접어들고 이산면과 상운면을 지나 평은면 천본리에 이르러 동쪽에서 오는 용각천(龍角川)을 합하게 된다. 평은면 금광리에 이르러 서쪽으로 구비도는 내성천은 여러 굽이를 이루고, 북서쪽으로 흘러 문수면 월호리에 이른 뒤 북쪽에서 오는 서천(西川)을 합하게 된다. 남서쪽으로 흐른 내성천은 안동군 북후면의 경계를 돌아 예천군 보문면 옥천동에 이르러 북쪽에서 오는 옥계천(玉溪川)을 합하여 남서로 흐르고 보문면과 호명면의 경계를 이루고 호명면 오천동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여서 원곡동 서울나드리에서 북쪽에서 오는 한천(漢川)을 합하게 된다. 내성천은 다시 서남으로 흘러서 개포면과 지보면의 경계를 이루고 용궁면을 거쳐 문경군 영순면 달지리에 이르고 북서쪽에서 오는 금천(錦川)을 합해 가지고, 남쪽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는 삼강리는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이 북행하는 길에 상주 쪽으로 건너던 큰 길목이었다. 또 삼강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거두어들인 온갖 공물과 화물이 배에 실려올라와 바리짐으로 바뀌고 다시 노새의 등이나 수레에 실려 문경새재를 넘어갔던 물길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으로 연결된다.
원래 오백 미터가 넘었다던 삼강리의 강폭은 안동댐이 건설된 뒤부터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량이 줄자 여름철의 별미였고 오뉴월이면 오이 냄새가 나던 은어가 사라졌고, 그냥 마셔도 되던 맑은 강물이 오염되어 멀리 나가 식수를 구해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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