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 무릉계곡과 추암, 그리고 정선의 옛길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5. 10. 28. 23:40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 무릉계곡과 추암, 그리고 정선의 옛길을 걷는다.

 

지난 해 가을이 무르익었을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 연칠성령을 넘고자 갔었지요, 하지만 그 고개길이 너무 멀어 되돌아오면서 그 아름다운 경치에 눈이 멀었었지요.

서해 선유도 기행을 취소하고 다시 한 번 두타산 아래 무릉계곡 길을 걷습니다.

오전에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나지막한 둘레길을 걷고 오후에는 동해의 추암과 삼척의 죽서루 변의 오십천변을 걸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하이원리조트에서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일요일엔 정선 아우라지에서 북평에 이르는 옛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절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자장율사가 이곳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연대라고 한 것이 효시였지만 경문왕 4년에 구산 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중창하여 삼공암이라고 한 때부터 뚜렷한 사적을 갖는다. 일설에는 신라 말에 세 선인이 회의를 하고 그 뒤 품일대사가 불사를 지어 삼불사라고 했다는데 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면서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뜻을 지닌 삼화사라고 이름지어 졌다.

태조 이성계는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에 기록하고, 후사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 하였다. 삼화사는 그 뒤 임진왜란 때 전소 되었고 효종 때 중건 하였으며 몇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적광전 과 약사전 그리고 요사채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이 있다. 현재 국보로 심의 중인 이 철불은 삼화사 창건 설화에 관련된 약사 삼불가운데 맏 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고 대웅전 아래마당에 세워져 있는 삼화사 삼층 석탑(보물 127)은 높이가 4.95m의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 시대의 탑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휴가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을 짓고 거쳐 하였다고 한다.

삼화사의 일주문을 나서서 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무릉반석이 나타난다. 천여 명이 앉아도 너끈할 널찍한 너럭바위를 흐르는 물줄기는 곳곳에 담을 이루고 그 너럭바위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단종 폐위 이후 조선의 산천을 주유했던 매월당 김시습의 글도 있고 조선전기 4대 명필 중 한사람인 양사언의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이라는 달필들 속에 무슨 계 무슨 계 하며 적혀진 같은 계원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이름들 속에 조선 시대 이 산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을 잡기위해 왔었던 수많은 토포사討捕使(조선시대 포도대장)들이 새겨 놓았던 이름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신해 3, 계미 3년 등의 글자들과 함께 토포사 아무개, 토포사 아무개 등의 글씨들의 여미에 그 때 그들이 이 너럭바위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쪼아 댔을 날카로운 정의 끄트머리가 보이고 내리치는 망치의 불꽃들이 스러지는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1981년 시인 김지하는 이곳 너럭바위에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죽어갔을 수천 명의 아우성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어버이를 부르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이상하게 떨리던 여인들의 귀곡성머리를 잡아끌던 보이지 않는 손길들마치 썩어가는 시체처럼 거무칙칙한 절벽에서 빛나는 음산한 햇빛 검은 갈 까마귀들의 울부짖음.

그는 달아나다 시피 파쏘, 비린내골 파소굽이라는 원한 서린 이름들이 남아 떠도는 이 골짜기를 떠났고 구술로서 검은 산 하얀 방의 두타산을 이렇게 표현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이 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나는 이것을 두타산에서 배웠다./개새끼들

너럭바위를 지나 금란정을 지난다. 1910한일합방 이후 향교가 문을 닫자 이 고장의 유림과 선비들이 나라 잃은 수치와 울분을 이기지 못해 금란계를 만들어 기념정각을 세우려 했지만 일제의 반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해방이 된 그 후 그의 자손들이 북편에 있던 이 정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

신정일의 <사찰기행>에서

 

두 산의 힘을 모아 빚어낸 물줄기를 따르는 발품은 언제나 행복하다. 속세를 등지고 청정하게 불도에 전념한다는 두타행(頭陀行)과 어울리는 산길이다. 속세를 벗어난 발길은 어느덧 학소대로 이어진다. 왼쪽은 벼랑이고 오른쪽은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바위 벼랑엔 4단 폭포가 그림처럼 걸려 있고 송림이 그 주변을 감싸듯 우거져 있으니 그대로 한폭의 동양화다.

 

학소대를 지나면 산길 왼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이 깊은 산중의 적막을 깨뜨린다. 두개의 골짜기에서 두줄기 폭포수가 쏟아지는데 음양의 섭리처럼 하나로 만나는 쌍폭포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과 거무튀튀한 암벽에 새하얀 모시를 걸어놓은 듯하다.“

 

쌍폭포 바로 위쪽엔 무릉계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용추폭포가 손짓한다. 청옥산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가 3단으로 하얗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용추폭포는 무릉계곡 미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각 단마다 담()이 형성되어 있는데, 맨 아래 하담은 속을 알지 못할 정도로 깊다.

 

조선시대 삼척부사로 왔던 유한전이 폭포 오른쪽 하단 암벽에 '龍湫(용추)'라는 글을 새기고 제사를 올린 뒤부터 용추폭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릉계곡을 들어선 사람은 반드시 들렀다 가는 곳이고, 쌍폭과 용추폭포를 보지 않으면 비록 무릉반석에서 탁족을 했다 해도 무릉계곡은 다녀온 게 아닌 셈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탐승객들은 폭포수 아래에서 발을 담그고 있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동해의 촛대바위라고 불리는 추암과 삼척의 죽서루, 그리고 아우라지에서 북평에 이르는 정선의 옛길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