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부산에서 펼치는 2016년 <길 위의 인문학, 겨울 걷기학교>

산중산담 2016. 3. 3. 00:13

 

부산에서 펼치는 2016년 <길 위의 인문학, 겨울 걷기학교>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여는 20151231일에 출발하여 201613일까지 여는 겨울 걷기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항구도시인 부산에서 열립니다.

아름다운 가덕도와 부산 갈맷길, 그리고 금정산성과 해운대 해파랑길 용호동 갈맷길. 등 부산의 아름답고 역사적인 곳들을 답사하며 진행될 이번 걷기학교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동래는 옛날의 장산국(萇山國)이었고, 그 동래부 부산면이 부산면으로 개편된 것은 1914년이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기록상에 처음 나타나기는 조선초기였다. “동평현 남쪽 부산포富山浦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고, <해동제국기>에 부산포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 당시의 자는 지금의 즉 가마 부 자가 아니고 넉넉할 의 부산富山이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뀐 것은 대체로 15세 기 경으로 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 아래가 바로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가 있으며 북쪽으로 현까지의 거리는 21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사람들이 부산은 서민들이 살기 좋은 고장이고, 부산 사람들은 억세고 거칠다.”라고 말하는 부산이 오늘날 나라의 제 2도시로 발전을 하기 시작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였고,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민들의 몰려와 부산의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그 동안에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열도를 정복하였는데, 조선의 선조는 김성일과 황윤길 등의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갔다 돌아오자 그들을 불러 일본의 국내 상황과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를 물었다. 서인이었던 황윤길은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하였고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신은 그와 같은 정황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동시에 일본에 다녀온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처럼 서로 달랐다. 다시 선조가 도요토미의 관상이 어떻던가하고 묻자, 황윤길은 그 눈빛이 밝게 빛나 담략과 지혜가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하였고, 김성일은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에게 말을 마치고 나오자 이조판서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이 황윤길과 말이 다른데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하자, 김성일은 내 어찌 왜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현혹되므로 이를 풀어보려는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실록의 사관은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아뢰어서 인심이 요동쳤으나 사리에 어그러진다. 김성일은 황윤길 등이 그쪽에 도착해서 겁을 집어먹고 체통을 잃은 것을 통분하게 여겼기 때문에 말끝마다 이처럼 서로 어긋났다. 그때에 조헌이 힘써 일본과 화의를 반대하면서 왜적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임금이 황윤길의 말은 실세한 서인이 인심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이라고 여겨 배척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감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결국 1592413일 오전 8시에 일본군 선발군 18,700명이 대마도를 출발하여 5시 무렵에 부산포에 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전함 세 채를 거느리고 바다에 나아갔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대적할 길이 없자 성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군사와 백성을 모아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밀려든 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정발을 비롯한 무수한 백성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동래온천과 금정산성

 

?신증동국여지승람?금정산(金井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자이며, 깊이는 7치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이렇게 그 산을 이름 지었고, 인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梵魚寺)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정산 아래의 동래는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아, “온천은 현의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는 정도이며, 병을 지닌 사람이 목욕만 하면 곧 낫는다. 신라 때에 왕이 여러 번 오시어 돌을 쌓고 네 모퉁이에 구리기둥을 세웠는데, 그 구멍이 아직껏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온천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동래온천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신라 때 온정은 현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온천물의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는 정도이고,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곧 낫는다. 왕이 여러 번 여기에 오고는 하여 돌을 쌓고 네 모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그 구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적혀있다.

부산의 어제와 오늘

 

부산은 몰라도 자갈치 시장은 안다고 하는 자갈치시장은 1930년대 말에 두 차례에 걸친 바다와 자갈밭 매립으로 마련된 터전이다. 매립하기 전에 워낙 자갈밭이 많았던 곳이어서 자갈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태종대와 해운대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부산항이 강화도조약으로 개방된 것은 1876이다. 일본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식민지 항구도시 부산이 개항되었을 때의 인구는 3,300여 명 남짓되었다고 한다. 현재 부산의 중심지구인 남포동광복동중앙동대교동 일대가 그 당시에는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1875년의 부산을 지켜보았던 일본 거류민단의 마지막 단장이었던 오오이께 가다스께(大池紡助)192611월에 쓴 ?부산 개항 50주년 회고록?에서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875년의 부산의 모습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대창동남포동 일대는 그 뒤에 매축한 곳으로 그때는 모두 바다였다. 번화가로 알려진 광복동 같은 곳도 그때는 한복판에 도랑이 있고 풀만 무성하여 여우라도 나올 듯했다.”

 

또한 그 무렵 일본인 거류민단을 위해 은행을 설치했던 오오꾸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도 그와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1876년에 내가 첫발을 들여놓은 부산항은 흰 모래와 푸른 솔의 해안에 종일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어촌이었다. 육지에는 한국인들이 쇠뼈와 쇠가죽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을 뿐이다. 배를 매어둘 만한 부두조차 없었다.”

 

한편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1894년과 1895년 중국일본한국을 답사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부산과 낙동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가사키항에서 한국의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1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부산에서 1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입구가 있는 낙동강은 수심 1.5미터의 물을 거슬러 밀양에서 80킬로미터를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고, 수심 1.2미터의 물을 거슬러 정크(junk)선으로 사문까지 160킬로미터를 더 갈 수 있으며, 거기서는 짐을 가벼운 견인 포트에 옮겨 싣고 연안으로부터 274킬로미터 떨어진 상진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이용 가능한 수로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서울-부산간 철도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어렴풋한 전망과 더불어 부산은 상업의 중요한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부산을 포함하고 있는 경상도 지방은 8개의 지방(현재는 13)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또 경상도 지방은 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번창하고 있는, 비옥한 지방임이 확실하다. 나는 증기선 갑판의 먼 거리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보았다. 한국인들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이지만, 부피가 큰 흰 옷 때문에 키는 더욱 커 보인다. 또 벗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는 높다란 관 모양의 모자 때문에도 키는 더 커 보인다.”

 

그러한 부산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면서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발달한 것이다.

 

부산을 두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제목으로 부산답게 노래한 가수가 조용필(趙容弼)이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釜山港)에 갈매기만 슬피 울어

오륙도(五六島) 돌아가는 연락선(連絡船)마다

목 메여 불러보는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그 오륙도가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오륙도五六島, 관아의 남쪽 30리 절영도 동쪽에 있다. 깎아지른 듯한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바다 가운데 줄지어 서 있는데, 동쪽에서 바라보면 여섯 봉우리로 보이고, 서쪽에서 바라보면 다섯 봉우리로 보이기 때문에 오륙도라고 하였다. 그 첫째 봉우리에 중국 장수 만세덕萬世德의 비석이 있다고 한다.“

 

오륙도보다 더 이름난 곳이 바로 여름철이면 하루에 수백만씩의 피서 인파가 몰리는 해운대海雲臺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해운대의 모습을 보자.

 

해운대,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의 절벽이 바다 속에 빠져 있어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와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두충杜冲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덮혀 있어, 싱싱하고 푸르러 한결 사철 같다. 이른 봄철이면 동백꽃 잎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말굽에 채고 밟히는 것이 3.4치나 되며,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바라보인다.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대를 쌓고 놀았다고 하는데,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어떤 말에는 최치원이 자를 해운이라고 하였다.“ 한다.

정포는 이 해운대를 두고 노래한 사람이 정포鄭誧.

 

석양에 스님 만나 이야기하고, 춘교春郊에 말()놓아 가니 연기 사라지고, 마을 골목이 멀리 보이고, 바람 부드러우니 해파海波가 잔잔하다. 고목은 바위에 기대섰고, 장송長松은 길을 끼고 마중하네.“

이렇게 한가했던 부산이 개화바람을 타고 세계열강의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는데,

그래도 부산의 모습이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오륙도에서 출발하여 농바우와 전망대가 있는 이기대를 거쳐 광안리 해수욕장을 지나고 해운대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바닷가 길입니다. 오륙도가 손에 잡힐듯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이기대 길은 바다와 도시가 함께 하는 길이며, 이기대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두 명의 기생이 적장을 껴안고 뛰어내렸다 하여 붙여졌습니다. 치마바위와 농바위 등의 절경을 만날 수 있고, 광안리 해수욕장과 부산의 명물 해운대 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