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겨울에 빛나는 남해바다에 떠 있는 보물섬을 걷다.

산중산담 2016. 3. 3. 00:16

 

겨울에 빛나는 남해바다에 떠 있는 보물섬을 걷다

 

 

201512월 둘째 주말인 1211()에서 13일까지 남해를 찾아갑니다. 한국의 남단에 자리 잡은 섬 남해는 예로부터 그 아름다움이 마치 보석 같은 섬입니다. 남해에서 개발한 남해 바래 길그 길에는 포구와 포구, 이순신과 김만중의 자취가 서려 있고,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남해금산과 창선대교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산재한 곳입니다.

그 길을 걸으며 남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으신 분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하동 동쪽에 자리 잡은 남해는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중략)

이 고을은 하늘 남쪽에 있는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海産의 풍족함과 토산土産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필수必須되는 것이야.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또한 기대할 수 있다.“ 고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도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모든 물산이 풍부해서, 왜구의 침략만만 없다면 사람들이 살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해로 건너가는 노량바다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진 것은 1598년이었다. 1119일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 나아가 손수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려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날 그가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함대 150여 척은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바다 밑에 잠기게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구의 유탄에 맞아 쓰러져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이순신의 나이 쉰넷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며칠 동안 모셔졌다가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갈 때까지 석 달가량 노량나루(지금의 충렬사)에 가매장되었다. 그때부터 관음포는 이충무공의 목숨이 이곳에서 떨어졌다하여 이락포(李落浦)라고 불렀고 그 뒷산도 이락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이 묻혔던 자리에 빈 봉분을 짓고 충렬사(忠烈祠)를 지었으며, 1973년 사적 233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이곳 남해(南海)는 고려 때부터 유배지로 알려져 왔다. 조선 전기에 안평대군, 한석봉, 양사언과 함께 4대 서예가로 알려진 자암(自菴) 김구(金絿)는 기묘사화로 유배를 와서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남해의 옛이름>을 남겼고 조선 영조때 사람인 유의양(柳義養)1년 남짓한 유배기간에 한글로 남해풍물을 묘사한 <남해견문록(南海見聞錄)>을 남겼다. 그리고 남해에서 1킬로미터쯤 배를 타고 건너면 닿는 자그마한 섬 노도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사람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익겸(益謙)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만중은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이 되고 헌납(獻納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고, 이때 <서포만필西浦漫筆>을 지었다.

사람의 마음은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절주節奏를 가지면 문학작품이 된다.”고 하면서 조선 사대부들의 중국문화 추종과 한문학 모방을 질타했다.

 

우리나라 시문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므로 설사 십분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하는 짓이다. 일반 백성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아아하면서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 하지만, 만일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른바 시, 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그는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김만중은 많은 시문과 잡록,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구운몽·사씨남정기등 의 소설을 지었다.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씌어 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한편 노도와 가까운 양아리의 두모와 두모티 사이에 있는 바위를 서시제徐市題라고 부른다. 앞면에 화상문자畵象文字라고 전하는 글을 새겨 놓았는데, 전설에 진시황으로부터 삼신산三神山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도록 명령을 받은 서복徐福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거느리고 가던 중, 이곳 명지를 지나다가 자기의 자취를 후세에 알리고자 이곳에 기록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시조 신무천황神武天皇이 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화상문자라고 하여 고고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73년에 남해군 설천면 모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노량해협을 잇는 남해대교가 생기면서 남해군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남해군에 자리 잡은 남해 금산에 보리암이 있다.

 

푸른 바다와 수많은 돌들이 섞이고 섞여 조화를 이루는 금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사천시에 소속된 삼천포에 이른다. 3번 국도가 시작되는 삼천포는 사람들에게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로 더 알려져 있지만, 한번 가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빠져 다시 가고 또 가는 곳이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싱싱한 회를 맛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이곳 삼천포는 남해를 잇는 다리 개통으로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남해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