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섬진강 530리 길을 걷는다. 세 번째.
나라 안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진강 530리 길 도보답사 중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에 매화, 산수유꽃, 진달래 꽃이 흐드러지게 펼쳐지는 아름답고 고적한 길을 세 번째로 걷습니다.
남원시 대강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곡성에 접어들고 요천을 받아들인 섬진강이 범실나루터, 가정, 압록, 구례구을 지나 오산 아래를 지납니다. 지리산과 오산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은 간척을 지나 연곡사를 품에 안은 피아골 자락을 지나는데, 이 벙 여정이 그처럼 보석같은 여정입니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으스스 손이 시리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으스스 손이 시리고 마지막 한 시간 남았다. 들판 가운데라 그런지 강바람은 드세다. 모두 다 모자를 쓰고 한발 한발 내딛는다. 강은 휘감아 돌고 제방뚝에 억새와 갈대숲이 우거져 있고 이름 모를 풀들 또한 저희들끼리 흐드러져 있다. 금지 1km 남원 22k, 멀지 않다. 햇살은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들고 바람은 이제 잦아들었다. 모두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우리들이 몸을 누이고 하룻밤을 지 샐 그 집은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있을 것이다. 강가에는 희디흰 몸매를 드러낸 미루나무들이 마지막 겨울을 견디느라 바람 앞에 흔들리고 바로 아래에는 돌로만 쌓은 보가 보인다. 저렇게 보를 막아야 되는데 시멘트로 보를 만들고 있으니 흐르는 여울물 소리가 폭포소리처럼 내 가슴을 뒤흔드는데 바로 아래에는 냉장고가 10여대 버려져 있다. 필요에 의해서 쓰다가 아무렇게나 버리는 저 심사는 어인 심사일까?
헤맨들 또랑에는 또랑물이 흐르고
헤맨다. 얼마나 헤맸으면 헤맨들이라 불렀을까?
고리봉 북쪽에 있는 산은 소매 같이 생겼기 때문에 수두산이라고 부른다. 붉은 매화가 많이 피었다하여 홍화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에 지금도 홍매화는 피어났을까?
금곡교를 지나며 길은 제방둑길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 강은 아스라이 멀고 바로 앞에서 요천蓼川과 섬진강이 합류한다.
전북 장수군과 남원시를 흐르는 하천인 요천은 길이가 60.030km이고 유역면적은 485.70㎢이다.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의 경계에 있는 백운산(白雲山:1,278m)에서 발원하여 장수군 번암면 죽산리에서 흘러온 물을 받아들이고 죽림에서 다시 백운천을 합하게 된다. 남쪽으로 꺽여서 흐른 물길이 요천이 되고 남원 산동면을 지난 요천은 백암천을 합한다. 남원 선원사 앞 동림교 부근에서 지류인 용담천을 합하게 된다. 요천은 시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며 앞과 남원 관광단지 사이를 지나 주천면 신촌리에서 원천을 합하고 지당리에서 옥률천을 송동면 신평리에서 손내천을 받아들인다. 요천은 금지면과 송동면의 경계에서 수지면 관내를 흘러온 수지천을 만나고 곡성읍 동산리 앞을 흐르는 적성강이라고도 부르는 섬진강과 몸을 합하는 것이다. 이곳 요천과 적성강 그리고 수지천의 세 갈래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을 순자강鶉子江이라 부르며, 예로부터 뱃놀이 장소로 유명하다.
두메산골에서 호랑이가 살았으므로 범실 또는 호곡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는 골짜기가 많다. 큰영골 서남쪽에는 각시골이었고 밥매골, 서쪽은 감남골, 밤범실 동쪽에는 개미골이 있다. 이외에도 하느재 동쪽에 지방 애골이 있고 묵은 장이 동쪽에는 부처골이었고 서방골, 살골, 좁은골, 코심 마무골, 큰 엉골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공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살았다는 둔터로 넘어가는 삐딧재에는 비룡등천형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강 건너 오곡면 침곡리로 건너가는 범실 나루터에는 배 한척이 매어있고 이대원씨를 비롯한 일행들은 배 한번 타고가자고 한다. 그래 어쩌겠는가. 매어 있는 빈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저 건너편까지 갔다 온다고 배가 닳아지겠는가. 갈 테면 갔다 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 뱃사공도 없는 배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가. 한참 실갱이를 벌린 후에야 배는 강에 뜨고 우리들은 짧은 이별이지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발길은 어느새 살골 나루터에 이른다. 조선조 초기 이곳에서 살을 막은 후 메기를 잡아 조정에 바쳤다는데 살은 사라지고 나루터에 배는 자갈 위에 올라앉아 있다.
고개가 가파른가 싶더니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이 고개가 뺑덕어미 고개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심청이의 고향이 이 곡성 어디쯤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심술궂은 뺑덕어미를 이 고개에다 차용해 붙인 것이리라. 이 고개 마루에서 유재열 소장은 “신소장님 저 강물이 섬진강 재첩국 같은데요” 그래 그 말을 듣고 바라보니 흐르는 강물이 재첩국이다. 다슬기 국물처럼 푸르고 푸르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저 강물이 재첩국 같다고 할까. 좌측으로 나있는 길에는 만민교회 수양관이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한때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만민교회가 저 만민교회일까? 대나무 정자에 잠시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다가 다시 걷는다.
오곡면 송정리로 건너가는 두계나루터에는 한 척의 배가 매어있고 저만치 두가교가 보인다. 두계와 가정리를 합쳐서 두가리라고 이름 지은 두가리 가정마을에는 옛날 정자나무가 많았다는데 흔적이 없지만 한때 섬진강 물길 층에 가장 아름다운 두가교가 있다.
지금은 양옆을 가로막아 건널 수 없는 다리가 되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오고가던 다리였다. 이 다리가 세워진 것은 1979년 6월 29일 두가리에서 송정리로 건너가는 나룻배가 뒤집어지며 두가리 사람 3명과 이웃마을 사람 2명 외지사람 2명 등 일곱 명이 빠져죽는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도지사는 그 소식을 듣고 이 다리를 급하게 세웠다.
기차가 지나가는 압록
구례 석곡으로 갈라지는 압록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옛 시절 이 지역을 지나가던 관리들과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압록원鴨綠院에서 석곡까지의 길은 어린 날의 추억이 남아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열서너 살 무렵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빈둥거리던 내 또래 아이들과 함께 첫 번째 가출을 했다 그 때 갔던 곳이 전남 곡성군 압록에서 한참동안을 보성강 줄기를 걸어가야 되는 석곡면의 어느 마을이었다. 몇 날 며칠을 걸어갔는지는 몰라도 임실 산서를 지나 남원. 금지를 거쳐 섬진강을 건너 곡성에 닿고 압록으로 해서 갔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왕 가출(도망이라고 했다)을 하고자 했으면 수많은 가능성이 있는 서울로 가지 않고, 하필이면 그 외진 섬진강을 따라서 석곡까지 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압록에서 석곡으로 가던 풍경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흙먼지 날리던 그 시골길에서 강물로 내려서면 그 맑은 강물에 고기가 지천이었고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여기 저기 보이던 제첩 같던 조개무리, 그곳에서 바라본 강은 이미 유년 시절에 보았던 그 골짜기를 흐르던 물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다시 고향으로 한발 한발 걸어서 돌아오던 몇 백리 길, 가끔씩 떠나는 나의 대책 없는 방랑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마치 흐르는 강물이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간 어느 시절에 그 섬진강으로 내가 다가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린 시절을 강가에서 보낸 그 시절처럼 다시 외롭고 쓸쓸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강변에 나아가 강 길을 따라 걸으며 여울져 흐르는 강물이게 또는 흐름도 잊은 듯 영원을 흐르는 강물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고 있으니,
섬진강 물 맑은 유곡나루에
옛날부터 느릅나무가 많아서 유곡리라고 불리는 이곳 섬진강변에 곡성면 죽곡면 하한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있었다. 우리들의 삶이 어려웠을 때 일본인 관광객들이 신간선 왕복 기차값만 가지고도 삼박사일 조선관광을 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을 시인 곽재구는 “유곡나루”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유곡나루
곽재구
육만엔이란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버스 타고
부산 거쳐 순천 지나 섬진강 물 맑은 유곡나루
아이스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 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삼박사일 풀코스에 육만엔이란다.
초가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아침햇살
선선하게 터지는 박꽃넝쿨 바라보며
니빠나 모노데스네 니빠나 모노데스네
가스 불에 은어 소금구이 살살 혀 굴리면서
신산선 왕복 기차 값이면 조선 관광 다 끝난단다.
육만엔이란다. 낚시대 접고 고무장화 벗고
순천 특급호텔 사우나에서 몸 풀고 나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 가시내들 서비스 한 번 볼만 한데
나이 예순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아이스박스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맑은 몸값이 육만엔이란다.
그 끝에다 정태춘은 곽재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좆돼 부렸네”를 추가했다.
한편 오산 아래 이 지점을 잔수진潺水津(사성암이 있는 구례 오산 아래의 섬진강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 섬진강에 원효대사의 전설이 남아 있다.
원효대사가 오산의 사성암에서 불도를 닦고 있는데,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 그가 지성으로 어머니의 쾌차를 빌며 불공을 드리는데, 어느 날 꿈에 천도天桃를 구해 드리면 나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계시를 들었다. 그는 아우인 혜공에게 천국에 가서 천도를 구해 오도록 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 병이 나은 어머니가 어느 날 잠에서 깬 뒤, 강물 소리가 시끄러워 깊은 잠을 일루 수 없다고 짜증을 냈다. 그래서 원효대사가 섬진강가에 가서 기도하자, 강물 소리가 한 곳으로 모여 들었다. 원효대사가 모아진 물소리를 오산 밑에 가두었기 때문에 섬진강 물은 잠자듯 조용해졌다. 그 뒤부터 이곳을 잔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봉준의 자취를 따라 입암산성을 넘어 피노리를 가다 (0) | 2016.03.03 |
---|---|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섬진강 530리 길을 걷는다. 네 번째. (0) | 2016.03.03 |
역사와 시의 고장 강화 석모도를 걷다. (0) | 2016.03.03 |
한국의 섬 기행,여수의 끝자락 거문도, 백도를 가다 (0) | 2016.03.03 |
선운산을 넘어 선운사에 이르다. (0) | 2016.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