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전봉준의 자취를 따라 입암산성을 넘어 피노리를 가다

산중산담 2016. 3. 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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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의 자취를 따라 입암산성을 넘어 피노리를 가다.

 

 

 

320(일요일) 하루 정읍에 있는 입암산을 넘어 백양사와 전봉준이 붙잡힌 피노리를 답사합니다. 1894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이 마감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은 그때만큼이나 절박한 국내외의 상황을 인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그 길 한 걸음 한 걸음에 배인 역사의 절절함을 느끼고자 걷는 그 ,모퉁이마다 봄꽃들이 피어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줄 것입니다.

 

태인에서 해산한 전봉준이 하룻밤을 보낸 집은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잇는 차치구의 집이었다. 이곳은 동학의 십대 접주 중의 한 사람이었고, 원평 태인전투 이후 그의 아들 경석이를 데리고 전봉준을 따라 순창 피노리까지 동행했던 차치구의 주 무대가 있던 곳이었다. 차치구는 평민두령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차경석은 훗날 증산사상을 기반으로 민족종교 보천교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흥덕에서 관군에게 붙잡힌 차치구는 그 앞산에서 포살되었고 그때 15살이었던 차경석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어다가 대흥리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흥리는 입암산과 갈재를 그윽히 바라보며 고창군 신림면으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조용한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1920년대에서 30년대 중반까지 이 나라의 경성 다음에 중요한 곳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보천교 신도수가 조선총독부 집계로 무려 백칠십만 명을 웃돌았고, 보천교의 집계로는 7백에서 8백만을 넘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 걸 보면 그 무렵의 보천교의 교세가 어떠했는가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증산의 제자였고 보천교를 일으킨 차경석은 자기가 거처하던 입암면 대흥리를 오선위기五星歸垣名穴이라고 했다. 즉 내장산은 五行火星에 속하고, 입암산은 土星으로 火生土가 되고 노령산맥으로 이어지는 한쪽자리에 자리잡은 방장산은 金星이니 土生金이 되며, 순창 쌍치의 회문산은 水星이라 金生水가 되고, 두승산은 木星으로 水生木이 되니 완전한 五行相生의 형국을 이룬다고 풀이한 바 있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선생에 의하면 그러한 땅은 원래 풍수가에서 지고지귀한 땅으로 하늘이 내려주어야 얻을 수 있다고 인식하는 天下大地라고 했다.

보천교 중앙본부라고 쓰여진 낡은 소슬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옆문으로 들어선 그집은 눈이 내려도 쓸쓸했다. 마당에는 금새 내린 눈이 소복하고 인기척에 문을 열고 주인장께서 나오셨다. 차용남옹 올해 나이 74세인 그 노인이 동학의 십대접주 차치구의 손자였고, 차경석의 큰 아들이었다. 차용남옹은 듬직한 풍채답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린 시절 유복했던 환경 덕분에 한학을 공부했던 덕에 주역과 한학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주역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가라고 한다. 대전에 있는 과학기술원에서 주역을 특강한다는 차용남옹의 집에는 눈이 내리는 겨울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새배를 오는 사람, 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나서 온 사람들 그리고 보천교도들 속에서 우리 일행 몇 사람만 딴 뜻을 가지고 온듯 했다. “오늘이 할아버지 기일이지요.” 그러면서 차용남옹은 상 한 상 봐오게.” 젊은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정갈하게 한 상 내오신 그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들은 잔잔하지만 가슴 떨리는 그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지. 보천교 간부들을 총독부 관리들이 이간질시켰고, 조만식 선생이 이곳에서 체포되었어. 그때 이 곳에 대성전이라는 십일전 건물을 지었는데 십일전의 대들보를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에서 가져온 재목을 썼었다네. 이 나라 반 만년 역사상 어느 왕조도 쓴 일이 없는 누른 기와를 올린 것은 중국의 천자궁을 그대로 본 뜬 존대의식이었다네. 그 십일전 건물이 얼마나 컸었는지 2층까지 합하면 백 86간이 되었다니 지금 경복궁 근정전의 두배 쯤이 되었을 것이네. 저 남쪽에 있는 입암산을 바라보고 지은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세운 오좌지형이었다고 하니 이러한 좌향은 현세는 선천시대와 달리 운수가 뒤집혀 좌향도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나중에야 들었네. 삼국시대이후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십일전이 아버님(차경석) 선화하신 19365월 이후 일본 사람들에 의해 500원에 경매 당하여, 서울에 있는 조계사의 대웅전이 되고 말았지. 지금은 없어져 버린 전주 역사가 이곳에서 뜯어다 지은 건물이었다고 하니, 그 교세가 어떠 했겠는가. 신도들이 수저 하나씩을 모아 1만 팔천근의 대종을 만을었는데 직경이 8척에 높이가 십이척이었다네. 그 대종을 동정각에 걸어 놓고 아침, 점심, 저녁에 세번 각기 72번씩 타종을 하면 먼 지평선 너머 이리 시내까지 들렸다고도 전해지는데, 그 커다란 종은 해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지. 아버님은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으셨고, 신출귀몰하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아버님을 못잡으니까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쥐가 되어 도망갔다고 총독부 관리들이 거짓보고를 했다지.”

조만식과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고, 아버지와 그들이 한방에서 며칠씩 쉬어가곤 했다는 그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입암산성笠岩山城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가르는 입암산 정상에 있는 석성이다. 전남북을 잇는 국도와 철도, 그리고 호남고속도로가 이 산 서쪽에 있는 방장산 사이의 골짜기 갈재를 통과한다. 옛부터 교통의 요충지였고 서해안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입암산성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한시대부터 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한 요새지로 삼았다고 전한다.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고종 43년 몽고군의 6차침입 때에 송고비 장군이 입암산성에서 몽고군을 크게 이겼다고 전한다. 몽고의 난 이후 입암산성은 별로 쓰이지 않고 방치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장성현감 이귀와 윤진이 개축하였다. 정유재란때 소서행장의 예하부대와 산성별장이었던 윤진이 관군과 의병, 승병을 모아 싸우다 장열히 순절하였다. 그 이후 하멜표류기로 널리 알려진 화란사람 하멜이 조선에 온 화란인에서 언급한대로 입암산성을 거쳐갔다고 한다.

성안에 우뚝 솟은 갓바위(입암)와 동서남북에 각각 포루가 있었고 성의 길이가 3.6m에 이르렀다. 7개고을의 군량미를 저장하였던 시설물과 건물들이 언제 폐쇄되고 없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동학농민 혁명당시 태인 전투에서 패하고 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이 수하의 몇사람을 거느리고 순창으로 가던길에 당시 산성별장(이중록)과 친분이 있어 하룻밤을 묵어갔다고 한다. 그일로 별장이 처벌을 받았으며 그 후에 별장을 없앴다는 설만 남아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남문루는 일제말엽에 없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불어제치던 눈보라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잦아들었다. 허물어진 옛집터에 햇살은 천연스레 빛났다. 지금은 억새와 잡목만 우거진 분지같은 이 입암산성에 갱정유도회(일심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살다가 갔다. 혼인전에는 댕기를 길게 땋았다가 혼인후에는 쪽을 찌거나 상투를 틀고서 사서삼경 같은 고전을 읽으며 살았던 그 사람들은 1975년 용인민속촌으로 옮겨 갔었다. 그들은 그들을 보는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길을 배겨나지 못하고 우리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되돌아 왔다가 결국, 지리산 청학동으로 가고 말았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옛 집의 기둥에는 수없이 많은 못들이 녹슨 채 구부러져 있었고, 물을 끌어 올리던 작두는 지금도 마당가운데 힘있게 박혀 있었다. 신기한 듯 그 집들을 기웃거리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나는 장자크 루소를 생각했다. 그가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볼테르에게 보냈다. 그 책에서 루소는 문명, 문학, 학문에 반대하며 미개인이나 동물에서 볼 수 있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라고 설파했다. 그 책을 받고 볼테르는 루소에게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인류의 발전에 반대하는 당신의 새로운 저서를 잘 받았습니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기 위해 귀하처럼 재치있는 노력을 한 분은 일찌기 이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60년 전에 이미 이러한 습관을 버렸으므로, 불행하지만 이 습관의 회복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문명을 비난했던 장자크 루소나 인간은 미개 상태보다 문명상태에서 훨씬 더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볼테르. 그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것이 옳다고 우리들이 단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인간들의 삶터였던 이곳이 세월 속에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문명의 이기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우리들이 단 몇 개월만이라도 원시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들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단지 돌아감을 너무 늦게 깨달을 뿐이다.

갑오년 섣달 초하루 전봉준은 입암산성을 지나 백암산 淸流庵에 도착했다. 그는 흐르는 물에 목을 적시고 암벽에다 부지깽이를 들어 남천감로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이 쫓기던 그가 어떻게 그 글자를 새길 수 있었을 것인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어지고 있다. 전봉준은 청류암을 내려가 백양사에 도착했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여환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정토사라고, 불렸던 이 절은 조선 선조때 백양사라고 개칭되었다. 그것은 환양선사가 천일굴에서 법화경을 독경하고 있는데, 백학봉에서 흰양 한 마리가 그 선사의 독송을 듣고 간 뒤로 양의 무리가 자주 왕래했다는 전설에 의해서 백암산 백암사를 백양산 백양사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들은 해가 뉘엿뉘엿한 저녁 무렵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행정구역상 금성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기 전 차를 세웠다. 제법 크게 쌓은 볏잇가리에 나는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쌍치쪽으로 넘어가는 무너미 고개와 피노리 뒷편에 계룡산, 그리고 저 마을 어디선가 살았을 김경천을 생각했다. 이 피노리에서 눈빛이 유난스레 빛났던 조선의 사내 전봉준의 마지막 잠행이 끝나고 만다. 전봉준은 몇몇의 부하를 거느리고 피노리에 도착했다. 그의 옛 부하였던 김경천을 찾아온 것이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반갑게 맞이하여 길가 주막으로 안내했다. 저녁밥을 잘 대접한 후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全州退校 韓信賢에게 밀고하여 전봉준을 생포케 한 것이다.

주막을 포위하자 그것을 눈치챈 전봉준이 담장을 뛰어넘을 때 다리를 내려친 것이다. 그 때가 섣달 초이틀 밤. 재기를 도모코저 김개남과 만나기로 했던 전봉준이 잡힌 피노리는 김개남이 잡힌 태인 종성리와 불과 20리 거리였다 전봉준은 교도대에 인계되어 순창에서 나주로 송치되었다. 그 때의 상황을 오하기문에서 황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 봉준은 이미 사로잡혀 화중과 함께 나주에 송치되었는데 화중이 민종렬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인이라고 하자, 봉준은 뭐 소인이라고 민종렬을 보고 자신을 소인이라고 하는 너는 진실로 짐승같은 놈이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너 같은 놈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으니 실패 한 것은 당연하다라며 질타하였다. 봉준은 지방관청의 관리들에게 모두 너 또는 자네라고 하면서 꾸짖고 배척하며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압송 도중에는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과 인삼을 구하여 상처를 치료하였고 쌀밥을 먹는 등 행동에 두려움이 없었고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에 거스르면 내 죄는 종사와 관련되어 죽게 되면 진실로 죽을 뿐인데 감히 너희 같은 것들이 이럴 수 있단 말이냐라고 꾸짖었다. 압송하는 사람들은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대하였다.

 

전봉준은 나주에서 뱃길로 전주에 갔다. 이틀간 묵은 전봉준이 공주를 거쳐 서울에 호송된 때는 1월 중순이었다.

전봉준은 을미년 이월 초아흐레 첫 심문을 받았다. “죄인을 일으켜 앉히라.”는 법관의 말에 네 어찌 감히 나를 죄인이라 하느냐.” 되받았다. 다시 법관이 동학당은 나라에서 금하는 바이거늘 감히 도당을 모아 난을 일으켜 군기군량을 빼앗고 양반과 부자들을 욕보이며 종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새나라를 도모코저 하였나니, 이는 곧 대역불괴의 범죄를 범한 것이거늘. 네 어찌 죄인이 아니라 이르느뇨?” 법관이 그의 죄를 낱낱이 들어 따지자, 전봉준은 타는 눈길로 도 없는 우리 나라에 도학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좋건 그르건 남의 나라의 도학만을 추세하고 의뢰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냐? 외방으로부터 들어온 유,, , 도나 서학에서 대해서는 오히려 말이 없고 우리나라에서 주창하는 동학만을 유독 배척함은 네 무슨 뜻이냐? 동학은 자국의 소산이라 싫다는 것이냐? 동학은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니 그 뜻이 싫다고 금하는 것이냐?” 그러면서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자고 하는 것이니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라 죄로 될 수 없으며 조상의 뼈다귀를 울쿼 행각을 하며 백성의 고혈을 빨아 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어찌 하여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자기나라를 해하는 무리니 그 죄가 자못 크거늘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하느냐?” 고 되물으며 그를 심문한 법관을 나무랐다.

그러자 법관은 국태공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를 물었다. 전봉준은 크게 웃으며 네 감히 어리석고나. 대원군은 유세한 자다. 유세한 자가 어찌 하향 백성을 위하여 동정이 있었겠느냐!

법관이 그래도 악형을 가하며 심문을 계속했다. 전봉준은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것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며 의연하게 답변했다.

또한 전봉준에게 일본인이 찾아와 국사범이기는 하나 사형에까지 이르지 않으니 살려달라고 요청하라고 하자.“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활로를 구함은 본의가 아니다. 그런 비열한 마음을 가리고 내가 어찌 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그는 그들의 말을 거절하였다. 드디어 전봉준은 법무아문으로부터 <군복기마로 관문에 작변한 자는 곧바로 참한다>는 판결문을 받았다. 전봉준은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말하였다.

을미년 삼월 스무아흐레 봄비가 주절주절 내리는 가운데, 전봉준은 그의 동지였던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법관이 전봉준에게 마지막 할 말을 하라고 묻자

나는 다른 할말은 없다. 너희는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 이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인의 굳센 기개를 잃지 않았던 전봉준을 그 당시 집행총순을 맡았던 사람은 훗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 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의 행동을 잘 살펴 보았다.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돋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 만인의 특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청수한 얼굴과 정채있는 미목으로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는 세상을 한번 놀랠 만한 대위인, 대영걸이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표적으로 대창작으로 한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라도 그의 뜻을 굴치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 라고 하였다.(오지영, 동학사)

어지러운 세상 수난의 땅 남녘에서 태어났던 의로웠던 영웅 전봉준은 가슴에 사무치는 유시 한편과 새야 새야 파랑새야만 남기고 그렇게 갔다. 그의 나이 마흔 한 살이었다.(....)

 

아직 포장이 끝나지 않은 비포장도로에 내 마음은 덩다라 흔들렸다. 나는 김개남이 잡힌 산내면 종성리 돌아 전주로 갈 것이다. 아이들은 피곤이 깊지 않은지 떠들썩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라 말 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 혼자만 침묵할 뿐이다.

내 마음 속에 하나씩, 둘씩 살아나는 그리운 이름들 있다. 내 가슴 속에 울컥 되살아나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지금은 잊었다고 고개 흔들어도 그날의 그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두손 들고 거부해도 내 마음 속에 시퍼렇게 살아 달려오는 아름다운 이름, 아름다운 얼굴들이 있다. 형체도 없이 분해되고 해체되어 사라져갔던 그들이 갑오년의 그 역사가 다시금 이 땅에 저렇게 선명하게 되살아오는 그것들은 무엇인가.

곧 이어 이 땅에 봄이 오고 내가 가는 이길 모퉁이마다 연분홍의 진달래꽃이 피어나고 저 섬진강변 구석진 곳 어디에서고 버들강아지는 피어나리라.

그러나, 아직도 이 땅은 두 동강이로 갈라진 땅이고, 사람과 사람들이 사람이 만든 이념으로 쓰잘 데 없는 욕심으로 만나고 합하지 못하는 땅이다. 나는 물었다. 사람이 한울인 나라 미륵의 나라 그리운 나라여! 당신은 어디쯤에 있고 우리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의문속에 도착한 종성리에서 나는 여기가 원래의 종성이냐고 물었고 사람들은 누구를 찾아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봉두난발의 조선 사내 김개남이 이곳에 왔었느냐고, 그리고 어디로 갔느냐고 묻지 못하고 원종성이 정말로 맞느냐고만 다시 물었다. 목이 메었다.

신정일의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의 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