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섬진강 530리 길을 걷는다. 네 번째
나라 안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진강 530리 길 도보답사 중 마지막 부분을 사월 둘째 주에 걷습니다. 매화 산수유꽃이 진자리에 벚꽃과 진달래, 조팝꽃이 무리지어 핀 섬진강 길과 역사와 문화가 서린 흔적을 찾아가는 기행이 이번 네 번째 여정입니다.
진안 백운 데미샘에서부터 비롯된 섬진강 네 번째 여정이자 마지막 여정을 봄꽃이 가장 만발한 때에 맞추기 위해 두 번째 주말로 바꾸었으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모든 산의 으뜸인 지리산
유몽인은 지리산을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다”하였고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한다면 오직 지리산만이 편히 은거할만한 곳이다”라고 하였으며, 양성지梁誠之는 “지리산은 창창蒼蒼하게 반공半空에 솟아 있으니 천암만학千岩萬壑鶴에 물방울이 뿌리도다. 동중洞中의 청학靑鶴이 어찌하여 절의 종소리를 듣지 않는가 하고 조롱하리라.” 하였다.
화개장터를 지나가다
여정은 드디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에 접어든다.
“전라도와......”라고 조영남이가 노래 부르기 전부터 화개는 화개장터다. 소설 속에서 옛 시절의 화개 장터는 이러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이 만나던 화개장터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 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있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아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전라도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준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높이고 그립게 하는지도 몰랐다.”
(김동리 <역마(驛馬)>)
화개를 가장 화개답게 표현한 김동리의 역마가 아니라도 화개는 옛 시절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만나 흥정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 옛날 화려했던 화개장터의 옛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다리 건너에 새로 만들어진 초가집도 아니고 콘크리트 집도 아닌 화개장터가 지나는 길손들을 손짓할 뿐이다.
월선네가 주막을 열었던 그곳은 어디쯤일까. 그 월선네가 장이 서는 아침마다 용이를 기다렸던 화개장터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매천은 <오하기문>에서 화개동을 스쳐간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은 어둠 때문에 추격하지 못하였으며, 날이 밝자 무리를 수습하여 부 안으로 들어와 민포를 모두 죽이겠다고 떠들면서 10여 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부 안에다 도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을 약탈하였다. 화개동에 들어가서는 제일 먼저 민포가 일어난 곳이라며 특별히 미워하여 연달아 5백여 채의 민가를 불태우고, 베틀과 물레, 나막신까지 약탈하여 바리바리 실어 나르느라 사오일 간 광양, 순천으로 통하는 길이 막힐 정도 였다. 민포 중에 앞뒤로 사로 잡혀 죽은 사람은 10여명 정도였다. 적은 계속해서 대엿새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고 그 중에 흉포한 자들은 인배를 따라 진주로 갔다.”
불태워 버렸다는 오백여 채의 민가는 어느 곳에 있었을까. 옛 기억들을 회상할 길은 없고 푸른 대숲과 차나무와 푸른 섬진강물만 눈에 띄었다.
를 탔던 목넘이나루는 한적하다.
쌍계사 4km 화개천의 물길은 맑디맑고 그 물길을 올라가면 화개 골짜기에 이른다. 조선 인조 5년(1632)에 나온 진양지 불우조에는 화개면 일대의 암자와 절이 53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 ‘진주목’편 ‘산천’ 조에는 시내를 따라 의신 신흥 쌍계의 세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 20리 지점에 칠불사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다 기록할 수 없다. 아주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절은 모두 나무 판자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는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 두 사람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이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았던 절들과 스님들이 현재에는 쌍계사와 칠불암을 비롯한 몇몇 절들만 남아있을 뿐이고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 벛꽃 길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소설가 김동리가 그의 단편 소설 <역마>에서 표현한 것처럼 꽃피는 봄날 쌍계사 가는 길은 그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이 정상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을 일컬음)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을 옥천사라 하였다.
옛이름이 옥천사인 쌍계사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었으며, 인조 10년(1632) 벽암스님에 의해 중건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합쳐지므로 절 이름을 쌍계사로 지은 이 절의 초입에는 고운 최치원의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는 쌍계와 석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절도 역시 대다수의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고 오늘날에 남아있는 건물들은 그 뒤 하나씩 새운 것들이다. 대웅전, 화엄전, 명부전, 칠성각, 설선당, 팔영루, 일주문 등이 그것들인데 쌍계사의 대웅전은 광해군 12년(1620에 세워진 것으로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기둥이 높은 아름다운 건물로서 보물 제4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계사 여러 문화유산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보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비,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더불어 최치원의 사산비문중 하나인 이 비는 쌍계사를 세운 스님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당왕 2년(887)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3.63m이고 폭이 1m인 검은 대리석비 이다. 당대의 문장이었던 최치원이 짓고 쓴 이 비는 특히 그 글씨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토지의 무대 평사리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도 하기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 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떼들아!”
소설가 박경리씨는 그가 묘사한 평사리를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1960년 대말 토지를 구상할 무렵 지금 김지하 시인의 아내가 된 김영주 씨와 함께 이곳을 스쳐 지나갔던 그가 평사리를 무대로 설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성장한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만석꾼’의 토지란 전라도 땅에나 있었고, 경상도 안에서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정했다.“
강 건너에 매화마을에서 매화축제가 오늘부터 내일까지 이틀 동안에 걸쳐 열린다고 잔치판을 벌린 매화마을은 멀리서 보아도 북적거리고 섬진나루에는 여나 믄 척의 배들이 떠있다.
날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매화꽃 향기는 내 가슴을 파고들고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지형이 꽃 속처럼 생겼기 때문에 화심리라고 이름 지은 화심리에서 광양시 다압면 섬진나루로 건너던 돌티미나루터가 있었다. 서나무가 있어서 서나무끼리, 돌 사이는 길이 나있어 돌티미, 가재가 많아 가자골이라 부르던 옛 이름은 변함이 없는지 알 수는 없고 오직 흐드러진 매화꽃만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멀리 하동대교가 보이고 하동은 희미한 운무 속에 잠들어 있다. 하동대교 아래 섬진강변민 매화축제 행사장을 알리는 에드벌룬이 몇 개 떠있고 판소리 한 대목이 구성지게 흘러나온다.
저 건너 푸른 소나무 밭이 이 하동 송림이다. 흰모래와 푸른 소나무 밭이 어우러져 백사청송의 고장이라 불리 우는 하동은 아침 햇살에 졸고 있다. 정예鄭怈가 지은 시에 “일변은 넓디 넓은 창해에 연했고, 삼면은 높고 높은 벽산碧山이 솟아 있다”고 노래한 저 하동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
갑오년 당시 경상도 하동과 광양 지방의 큰 전투는 금오산과 광양의 섬거역 그리고 고성산전투를 들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면 죽은 혼령들이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고성산을 고시랑산이라고 불렀을까.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영호대접주 김인배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월 초하루. 금구의 적 김인배가 광양, 순천지방의 적과 합세하여 하동을 함락하였다. 이 무렵 하동지방의 적 가운데 광양에 숨어있던 자들은 처지가 궁핍하여 돌아갈 곳이 없었으므로 매우 분하고 원통해하며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마침내 인배를 끌어들이고 여러 포들에게 8월 그믐 무렵에 하동에 모이라고 하였다.
섬진강이 짧기는 혀도 볼 것 다 봤네
정여립 사건으로 한 집안이 쑥대밭이 된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은 이곳 광양을 두고 “하늘이 개니 산은 달을 토하고, 바다가 어두우니 물이 구름을 연했네.”라고 하였고, 최수崔修는 “어두운 안개 자욱한 옛 싸움터, 지금은 요순堯舜의 해를 맞아 한창 낮이로세. 변방 봉화烽火 일지 않아 백성들 편안히 자니, 소금 가마 고기잡이집 바다에 연해 있네.”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다른 곳에 비해 살만했던 곳이 이곳 광양이었다. 망덕 못 미쳐 선소리는 배를 만들던 관청이었던 선소가 있었기 때문에 선소라 부르게 되었고 선소 동쪽에는 무적석이라는 섬이 있었는데 군량미를 쌓아 두었었다고도 하고 망덕산의 꽃밭 등과 마주보기 때문에 꽃밭 등의 꽃을 보고 나비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시새워 했음인지 바닷바람은 드세게 불고 망덕포구 진일횟집에 마음을 풀어놓은 나는 바닷가 시멘트 기둥에 앉아 출렁이는 물결들을 바라다본다. 점심으로 재첩국을 먹으면서 유재열 소장은 “50년 100년 후에도 섬진강 재첩국을 먹을 수만 있다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 유재열씨의 말처럼 오랜 세월 후에도 섬진강 맑은 물에서 잡은 재첩국을 이렇게 먹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파괴를 지속하는 한 섬진강이고 지리산이고 그대로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라켈 카슨이 소리 없는 봄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매일 아침 당신과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던 비둘기, 여치, 굴뚝새 그리고 그 밖의 수십 마리 새들의 새벽합창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침묵만이 밭에 흐르고 숲에 쌓이고 연못에 널려있다. 닭은 알을 품고 있어도 부화되지 않는다. 사과 꽃은 피었는데 벌은 꽃나비는 날지 않는다. 그래서 꽃가루가 옮겨지지 않고 열매도 맺어지지 않는다.”라는 시절이 머지않아 도래할 지도 모른다.
“섬진강이 짧아도 볼 것 다 봤네”라고 말하며 “이 바람이 강 바람이디야 바닷바람이디야 이 다리가 강다리냐 바다다리냐”하고 혼잣말처럼 늘어놓은 유소장의 뒷모습으로 배알섬은 푸르게 떠있다. 이 망덕포구에 3~4월 벚꽃이 필 무렵 가장 많이 나고 맛이 좋은 벚 굴이 있다. 일반 양식 굴보다 30~40배 가량 큰 벚 굴 맛은 담백하고 시원해서 언제 목구멍을 넘어갔는지 모른다는데 산소통을 맨 사람들이 망덕 포구 일대에 바다에서 따가지고 나온다고 한다.
강 건너 하동군 금남면 고포리의 용포나루에 배들은 매어있고 전라도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절 대압박산은 여기서 보면 그냥 산일 뿐이다.
‘가장 낮게 흐르는 물이 가장 유용하게 쓰이더라.’ 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들의 삶도 역시 흘러가는 강물과 같지 않은가. 나는 섬진강과 남해바다가 몸을 섞는 늦은 오후에 산타야나가 <회의와 동물적 신앙>이라는 글 속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나는 불멸하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들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마치 바다가 하나, 하나의 작은 물결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세계의 영혼이며 에네르기이다. 그러나 이 영혼은 우리를 거쳐서 우리가 아무리 소리를 치더라도 앞으로,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우리의 특전은 이것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이제 섬진강의 하구에 이렇게 멍한 채 서 있다가 다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가서 내가 흘러왔던 그 강줄기를 다시 떠올리고 다시 그 길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맹자에 나오는 구절에 보면 강물에 마음이 홀린 사람이 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유(流)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연(連)이라고 할때 나는 유도 아니고 연도 아닌 그저 나일 것이다.
언제 다시 한 번 그 길을 걸어보리란 우리들의 소망은 소망으로만 끝날지도 모르는데 망덕포구의 바다는 봄바람에 저렇게 자꾸만 출렁거리고 하늘에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나는 것을 보자 문득 왕유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발길이 물 다한 곳에 이르러
앉아서 구름 피어나는 것을 바라본다.
구름이 피어나고 바다가 잔잔하게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돌아가기 위해 이렇듯 둘러보고 또 둘러볼 따름이다. 오백 삼십 리 섬진강 물길은 첫날 보았던 대로 지금도 푸르지만 그 푸른 물이 여기선 사람의 인체 내에 있는 피의 농도와 같다는 짜디짠 바닷물일 따름이다. 하지만 온갖 질곡의 세월과 모진 풍파를 헤쳐 오면서도 기어이 바다에 와 닿은 섬진강은 그 어떤 고난의 세월이 다시 온다고 할지라도 저렇게 푸르게 흘러올 것임을 나는 믿는다.
(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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