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네 번째로 걷는다.
2016년 한국의 강 기행 ‘금강 따라 천리 길“이 네 번째로 8월 네 번 째 주인 26일부터 일부터 28일 까지 천리 길 금강 중 가장 아름다운 옥천군 동이면에서 청마리 거쳐 신탄진까지 이어집니다.
기린골에서 강으로 내려가는 길은 숲이 우거져 앞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길 역시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라서 못 갈리는 없다. 한참을 내려가자 드디어 강이다. 200여 미터 걸었을까? 옥천 정수장이 나타나고 그 아랫녘 칠방리에는 그림 같은 별장이 지어져 있다. 길은 없고 그 별장 안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별장에는 한 사람의 젊은 남자와 예닐곱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담소를 즐기다가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금강을 따라 걷는 연유를 한 번 더 얘기해야했고 그 집을 벗어나자 또 한 채의 별장이 나타났다.
강이 좋아서 강변에 별장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지만 글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길은 강물이 불어 강물 속으로 숨어들고 강물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간다.
옥천 학생 야영장에서 해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류근영 중령과 합류하며 일행은 9명으로 불어났다. 평촌 야영장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잠시 쉬며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여정은 옥천군 동이면으로 이어진다. 적하리는 적령리와 하리를 병합하여 만든 행정구역이고 그곳에는 용소마을, 대밭마을이 오순도순 펼쳐져 있다. 물이 좋아서인지 고기가 많아서인지 매운탕 집이 여러 개 있고 그 유리창마다에 메기구이 1만원, 모래무지 조림 등 다른 강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메뉴가 쓰여져 있다.
학사고개는 가파르지 않다. 양쪽에 있는 산의 모양이 학이 나는 것처럼 생겼다 해서 학사골인 학사골에서 우리가 점심을 먹기로 한 솔밭골까지는 멀지 않다. 멀리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고 차들은 점점 히 어디론가. 오가고 있고 강은 흙탕진 채 서둘러 흐른다.
흐른다는 것, 떠돈다는 것, 바람이 분다는 것, 부는 바람을 따라 흔들린다는 것, 나의 삶이 오늘 이 순간뿐만 아니라 훗날까지 그러하리라 믿지만 그 흔들림도 가끔은 고요 속에서 새로운 흔들림을 모색하는 것이리라. 금암리 압구정 가든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세조때 사람 한명회가 한강 남쪽에 지었던 압구정과 같은 이름인 압구정은 고려 말에 전송로라는 사람이 용암말 동쪽에 지은 정자 이름이다(...)
지형이 계추형이라 하여 벌 말인 우산리 지나 밤나무 밑에서 쉬며 토실토실한 알밤 몇 알을 줍고 난 뒤 내 마음은 부자나 다름없다. 금강 4교 홍보관을 지나며 바라보는 금강 4교는 거대한 괴물처럼 하늘에 걸쳐있고 갯대봉 중턱에 일명 높은 메루라고 불리 우는 고현(高峴)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임진왜란 당시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으로 난리를 피해와 함지박을 만들면서 마을을 일궜다고 한다. 고현리와 원당리를 합해서 만든 고당리 고현마을은 높은 지대인 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논도 없고 밭 몇 뙈기뿐이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산 너머에 전답을 사두고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른 새벽 고개를 넘어 갔다가 어둠 짙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이 마을 사람들은 ‘이이들 얼굴도 잘 몰라“라는 말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크고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농사지어서 키운 자식들이 대처로 나가고 지금은 나이든 부모들만 남아 있고 어쩌다 별장을 짓고 살고자 오는 젊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을까? 그것을 궁금해 하는 나는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흘러 왔을까?
이 금강 변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 갔듯이 강 역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유유히 흘렀으리라 그러나 이 강은 숨죽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분노하고 포효하며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듯 그렇게 소리치며 흘렀으리라. 거침없이 탁류가 되어 흐르는 저 강물이여! 금강이여! 나는 이제 가을 늦은 햇살 받으며 포장도로를 걸으며 이미 흘러가 버린 강물과 저렇듯 구비 치며 흐르는 강물 그리고 곧이어 뒤따라올 강물들을 기다리면서 ‘끊임없이 흐르라’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산은 깊고 물은 흐른다
산은 깊고 물은 흐른다. 골짜기에 내려가 물을 마시고 얼굴을 씻는다. 강 건너 조령리는 조선시대 중엽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터전을 잡을 때 고개가 험준하고 하도 깊어서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곳”이라는 뜻으로 새재로 지었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조령리(鳥嶺里)로 바뀌고 만 것이다. 이곳 금강유원지 일대는 여울 낚시와 루어 낚시터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지만 물이 불어선지 어쩌다 보일 뿐이다. 100KM 대청호 물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벌말 마을에서는 나무를 태우는지 한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을 앞 강변 길에는 태극기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강촌마을은 강 씨들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강촌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고 입구에는 몇 그루 봉숭아꽃이 피어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마을이 제법 그럴 듯 했을 법 하지만 지금은 옻 한방오리, 옻 닭들을 파는 ‘강촌역’이라는 음식점이 있을 뿐이다. 사라져 가고 있는 강촌마을을 나오며 안남, 안내, 청성으로 가는 575번 길을 만난다.
여기까지 180km 이곳에서 금강은 보청천과 합류하게 된다. (...)
청마리에는 날아오르는 마한의 솟대가
솟대는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하늘과 인간세상, 땅 속을 꿰뚫는 우주의 축이자 신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이래 농경문화에 통합되면서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농업수호신이 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솟대를 세운 장대에 숯검정과 황토로 선을 나란히 그려 검은 용과 누런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을 나타냈는데 이것 역시 우순풍조를 빌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1978년에 장대에다 두용을 나란히 그리지 않고 X자로 꼬이게 그렸더니 여름에 홍수가 나서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말티마을의 탑과 장승, 솟대는 이러한 개별적인 의미를 모두 지니면서 한데 뭉뚱그려져 마을로 들어오는 못된 귀신이나 역병, 도적 등 액을 막아 마을을 지키고 풍년을 비는 마을신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이 마을 탑신제당은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섣달에 생기복덕을 가려 제주를 뽑고 정월 초순에 날을 잡아 산신제를 지내며 대보름날 아침에 유교식으로 탑신제를 지낸다. 제주는 제사를 지내기 전에 냉수로 목욕하고 부정한 일을 한 사람을 접하지 않는 등 금기를 지키며 몸을 청결히 한다. 산신제를 지내는 나무는 60여 년 전까지 만해는 어른 여섯 명이 손을 맞잡아 두를 만큼 큰 소나무가 있었으나 그 나무가 죽고 말았다. 그 후 그 다음으로 큰 나무를 신체로 삼고 있다. 탑신제는 탑, 솟대, 장승의 순서로 지내는데 솟대와 장승의 경우는 따로 제물을 마련하지 않고 탑제 때 쓴 제물을 나눠서 지낸다. 장승과 솟대는 4년마다 오는 윤년에 새로 세우고 예전 것은 잘 썩도록 옆에 뉘어 놓는다. 특히 솟대를 오리보다는 새쪽에 가깝다고 보는 청주대 김영진 교수는 “이 솟대는 마한馬韓땅인 충청남도忠淸南道와 전라도全羅道에 남아 있고, 그나마도 원형대로 보존된 게 이 말티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든 제사과정이 훨씬 더 복잡하고 엄격했지만 근래에는 많이 생략한 채 지내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선 솟대와 장승으로 쓰일 나무를 베어올 때 고사를 지내고 “이 나무는 산주와 협의해 빌었으니 산신님도 그런 줄 아시오”하고 아뢴 후 제주가 도끼로 한 번 찍으면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모셔가세 모셔가세. 천하장군 모셔가세. 모셔가세 모셔가세. 지하장군 모셔가세. 모든 악귀 물리치실 추악신을 모셔가세. 영신신령 주신 선물 조산들로 모셔가세…”하는 노래를 부르며 마을로 날라 왔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냥 곧고 긴 나무를 가져다 세운다.”고 한다. 그 분들은 서둘러 나락을 베러 간다고 가시고 나는 가게 마루에 퍼버리고 앉아 가게주인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곳에 온지 한 십 구 년쯤 됐어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고기를 잡아서 팔지를 않으니 고기가 많았지요. 애 아빠가 간지 육 년쯤 됐어요. 딸내미가 벌써 대학 4학년이니까 딸 넷 데리고 이곳에 와서 무진 고생했어요. 큰딸이 이번 10월에 시집가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여기 와서 고기 잡아 생활했어요. 그러다 조금 살만하니까. 애 아빠가 죽었어요.” 그래 러시아의 속담처럼 ‘사람은 내일을 기다리다 그 내일엔 묘지로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네 부모 어느 사람인들 굴곡 없는 삶들이 어디가 있으랴. 아침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허름한 가게 앞에 앉아 나는 흐르는 금강 물과 햇살이 퍼지는 저 건너 말티마을을 건너다본다.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아무 것도 모르고 애들 아빠에게 걸려들어 가지고 이곳까지 따라와서 고생만 짤짤이 허고 살았어요. 원래 축구선수였어요. 그래 가지고 어디 나 혼자 아무 데도 못 가게 해서 가본 디가 없어요. 그러다가 애 아빠 가시고 지금은 산악회 따라서 산에도 가고, 놀러도 가고 옥천에 있는 딸들하고 살다 가끔씩 이곳에 와요”
강물처럼 삶은 떠나가는 것
나는 마음씨가 좋기 때문에 더 힘든 세월을 살아서 그런지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이영순(50세)씨의 신산했던 세월들을 들으며 니이체가「이 사람을 보라」에서 말했던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나의 공식은 운명애(amoffati)이다..... 필연적인 것은 감내할 뿐만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김지하 시인의 시 한 편을 생각했다.(...)
중촌마을 서남쪽에 있는 독락정(獨樂亭)은 조선 선조 때 주몽득(周夢得)이란 사람이 지었다고 하고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청정리에 이른 다음 연주천에서 금강으로 흘러드는 연주천의 발원지 도농리에 중봉 조헌의 묘가 있다. 명종 22년에 문과에 급제 스물 두 살 때부터 벼슬길에 오른 조헌은 보은 현감, 전라감사를 거쳤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성격으로 바른말을 잘해 벼슬길에서 여러 차례 물러나길 거듭했다. 정여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 이곳에 와 터를 잡았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전에도 일본에서 온 사신을 없애고 왜구의 침략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춧돌에 머리를 부딪쳐서 피를 흘리며 안타까워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어나 싸우자”하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았다.
조헌은 승병을 이끌고 있던 영규대사와 뜻을 같이해 왜구에게 빼앗겼던 청주성으로 쳐들어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금산성 싸움에서 “자리를 피하라”는 부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내가 순절할 땅이다. 장부는 죽을지언정 난리를 당하여 구차하게 모면해서는 안된다.”며 기둥을 잡고 끝까지 싸움을 독려했지만 패하여 그를 따르던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숨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 살이었다.
그 뒤 그의 영혼을 불러들여 이곳에 안치했다. 독락정 뒤편 둔주봉에는 그 옛날 봉수대가 있었고 그 아래 연주리 일대에 ‘장군 대 좌형’의 명혈이 있다고 하지만 어디 명당이 제구실을 하는 시대인가. 동이면으로 건너던 피실나루도 사라지고 배는 빠른 속도로 구비구비 돌아간다.
신정일의 <금강 역사 문화탐사> 중에서
금강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에 흠뻑 취하고 싶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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