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2016년 여름 걷기학교 청량산 자락 퇴계 오솔길과 과 소백산 자락 길을 걷다.

산중산담 2016. 7. 18. 20:31

 

2016년 여름 걷기학교 청량산 자락 퇴계 오솔길과 과 소백산 자락 길을 걷다.

 

 

201684(목요일 밤)부터 7(일요일)일까지 여름 걷기 학교를 실시합니다.

경상도 북부지역, 봉화. 안동. 영주 일대에서 실시되는 이번 여정은 아름답고 유서 깊은 경상도 북부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며 골 깊고 산 좋은 길에서 스스로가 자연이 되는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85일 첫날은 진성이씨의 종중산이기도 한 청량산의 외.내 청량사와 구름다리로 이름난 청량산을 답사하고, 가송리에서 단촌리에 이르는 퇴계 오솔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86과 새벽,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벽예불인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새벽예불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7일까지 부석사에서 죽령 옛길에 이르는 소백산 자락길에 산재한 문화유산 (부석사, 소수서원, 순흥 향교, 무섬, 죽령 옛길 )을 답사하며 아름다운 숲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 자녀나, 형제자매, 그리고 좋은 친구끼리 함께 하면 더 좋은 여정이 될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바라고 인원은 45명으로 할 예정이오니 빠른 신청 바랍니다.

 

나무들 사이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그 틈새마다 푸른 소나무들이 암벽들에 뿌리를 내린 채 서 있다. 조선조에 주세붕은 <청량산록>이라는 기행문에서 아름다운 청량산을 이렇게 예찬했다.

해동 여러 산중에 웅장하기는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 금강산이며 기이한 명승지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또한 주세붕보다 여섯 살이 아래고 이곳 예안이 고향인 퇴계 이황은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렇게 노래했다.

 

청량산 옥류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퇴계 이황이 청량산의 내청량사 가는 길 옆에 오산당(吳山堂)’이라는 집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남명 조식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황은 조식과는 달리 벼슬길에 여러 차례 나갔었다.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였기에 임금이 부르면 벼슬길에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몇 차례, 그 동안에 풍기군수와 대사성 부제학과 좌찬성이라는 벼슬에 올랐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귀향한 것이 68세였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이곳에 집을 지어 청량정사라는 이름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바위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벌어져 있고

연화봉 기슭에 자리잡은 내청량사와 금탑봉 기슭에 자리잡은 외청량사는 663년에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지지만 창건연대를 볼 때 당시 의상은 중국에 있었으므로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이후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다가 송광사 16국사의 큰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8)가 중창했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 승당 등 27개의 부속건물을 갖춘 큰 사찰이었다는 것만 전해져올 따름이다. 그러나 이 두 절은 비록 거리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내청량사의 연화봉 아래 유리보전(琉璃寶殿)이라고 쓰여진 법당이 본전이고, 금탑봉 아래 외청량사의 법당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다.

경상 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량사의 유리보전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자그한 건물이다. 유리보전이라는 동방 유리광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유리보전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고 힘이 좋은 유리보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유리보전 앞에는 가지가 세 갈래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봉화군지>에 의하면 명호면 북곡리의 남민이라는 사람의 집에 뿔이 세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힘이 세고 성질이 사나워서 연대사 주지가 데려가 짐을 나르게 했다고 한다. 소는 이 절이 완성되자 힘이 다했는지 죽어 절 앞에 묻혔다. 그 후 무덤에서 가지가 세 개인 소나무가 생겼기 때문에 세 뿔 송아지 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별로 내세울 만한 불교문화재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바위봉우리가 연꽃잎처럼 벌어져 있고 그 가운데 들어앉은 청량사 터는 대단한 명당임이 분명하다 한편 주세붕의 글에 적힌 청량산의 암자 이름들은 중국 화엄의 영산에서 따온 것임을 짐작할 만한 게 만다.

직소봉 아래 백운암만월암원효암몽상암보현암문수암진불암연대암벌실암중대암보문암 등이 있고 경일봉 아래 김생암상대승암하대승암이 있으며, 금탑봉 아래 치원암국일암안증사상청량사하청량사 등 무려 19개의절들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주세붕은 그 당시 지배하던 유교적 입장에서 청량상 12봉우리 이름중 3개를 바꾸었고 6개를 새로 지었다. 중국 태산의 장악을 본떠 의상봉 장인봉이라 지었고, 하청량사의 넓은 바위는 그 자신의 호를 붙여 경유대라 하였다. 그렇지만 현존하는 지도마다 주세붕이 작명한 이름 대신 옛 이름이 올라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을 비롯 고운 최치원과 고려 말 공민왕의 발자취가 남아 전한다.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지는 산

김생굴 2백 미터 길은 가파르다. 촉촉이 비에 젖은 산길을 올랐다. 금탑봉으로 오르는 길과 갈라져서 산허리를 접어 돌면 김생굴이다. 신라 때 명필 김생이 10여 년 동안 수도하며 글씨 공부를 했던 곳이다. 김생굴에 김생의 글 한 구절도, 치원대에 최치원의 시 한 구절도 남아있지 않아 아쉽기만 했다. 오직 주세붕의 글 속에만 그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금탑봉 아래 외청량사 웅진전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이 남아 있고, 자그마한 산신각에 호랑이 그림이 특이했다. 소주 한 잔 준비 못하고 찾아온 무례함을 대신하여 산신각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리고 산길을 내려오며 주세붕의 청량산 예찬을 생각했다.

 

이 산은 둘레가 백 리에 불과하지만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절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또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질 것 같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워 있으면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신선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어서오십시오 선비의 고장 안동입니다- 표지판을 지나서 가송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야트막한 잔등을 넘어서서 바라보는 가송마을의 낙동강은 어느 경치에 비긴다 해도 빠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게 아름답다.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경치는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곳의 경치를 누구나 좋아한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민주적인 것이기 때문에 만인에게 주어진다.” 다비드르 브르통이걷기예찬에서 한 얘기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은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가사와 송오의 이름을 따라 가송리(佳松里)라고 이름지은 가사리의 쏘두들에는 월명소(月明沼)가 있다. 낙동강 물이 을미 절벽에 부딪쳐서 깊은 소를 이루었는데, 한재가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며, 위에 학소대가 있고 냇가에 오학 번식지(烏鶴繁殖地)”의 비가 서있다. 학소대는 월명소 위에 있는 바위인데 높은 바위가 중천에 솟아 있어서 매년 3월에 오학(烏鶴)이 와서 새끼를 쳐 가지고 9월에 돌아갔는데, 1952년 겨울에 바위가 별안간 내려앉았으므로, 그 다음해부터 오학이 벼락소로 옮겨 갔다고 한다. 쏘두들에 외따로 서 있는 산인 올미는 옛날 홍수 때 봉화에서 떠 내려왔다 하는데 수석이 매우 아름답고 쏘두들 앞에 있는 숲인 사평수(詞評藪)는 선조 때 사람 성재(性齋) 금난수(琴蘭秀)가 장례원 사평이 되었을 때 이 땅을 사서 소나무 수백 주를 심었다고 한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사평송(司評松)이라고 이름지었고 현재는 앞에 월명소가 있어서 놀이터로 유명하다. 또한 이 마을에는 성성재라는 이름의 옛집이 있다. 선조 때 금난수가 이곳에 살면서 퇴계 이황에게 배웠는데 퇴계가 그의 높은 깨달음을 칭찬하여 성성재(性性齋)라고 써주었다고 한다. 그 집 둘레에 총춘대, 와경대, 풍호대, 활원당, 동계석문 들이 있어 수석(水石)이 매우 아름답다. 한편 강 건너 가사리, 남쪽 산에 있는 부인당이라는 신당은 400여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자목이 많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정월 14일과 54일에 제사를 지내는 이곳에서 고려 공민왕의 딸이 안동 피란길에 이곳에서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강 건너에 깎아 지른 듯한 단애(斷崖)아래 한가롭게 자리 잡고 있는 고산정(孤山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 선생의 제자인 금난수(琴蘭秀)(15301599)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그는 명종 19(1564)에 이미 예안에서 성재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예안현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이곳 가송협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자라 하였다.

고산정은 앞면 3·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칸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서 안동팔경(安東八景)중의 한 곳으로 알려져 있고, 인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선비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지금도 이 정자에는 퇴계 선생의 시와 금난수 선생의 시 등이 남아있다. “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에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에서 1위를 차지한 소백산 자락 길 말고도 새롭게 이어진 소백산 자락길을 걷고, 마지막 날에는 부석초등학교에서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마구령을 넘어 남대리까지 이어지는 12.5km의 고개를 넘을 예정입니다.

 

영주시 부석면 부석리에 부석사(浮石寺)가 있다. 영주시는 삼국시대에 고구려 땅으로 내기군(奈己郡)이라 불렀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세력다툼을 벌일 때 고구려 편에 서서 끝까지 신라에 항거했다고 한다. “영주사람이 앉았던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렇듯 기질이 굳고 끈질긴 영주사람을 잘 표현해 준다.

신라 파사왕 때에 신라 땅이 된 영주는 1914년 영주풍기순흥의 세 고을이 합쳐져 영주군이 되었고 198041일 영주시가 되었다.

 

서거정의 시에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리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분명히 동남계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깨쳤네하였던 영주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고장이다. 이색이 지은 ?송안시어시서(送安侍御詩序)?, “순흥 안씨는 대대로 죽계 위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에 있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이 지역은 소백산 자락에 있다.

지금은 영주시에 딸려서 하나의 읍으로 남아 있는 이곳 풍기의 풍속을 두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풍속은 강하고 사나움을 숭상한다.”고 하였고 관풍안에는 백성은 경상耕桑을 즐겨한다.”고 하였다.

소백산의 한 봉우리인 봉황산 자락 부석사 부근에 금성단(錦城壇)이 있다.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이고 세조의 동생이었던 금성대군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사건에 연루되었던 금성대군은 여러 곳의 유배지를 떠돌다가 이곳으로 귀양을 오게 된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고 격문을 돌린 후 모의를 준비하다가 밀고로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그때 그들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물들여 40리 아래쪽에 있는 동촌리까지 흘렀기 때문에 그 마을을 피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숙종 37년에야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왕의 윤허를 얻어 금성단을 만들었다.

금성단 바로 근처에 어린시절 어른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던 말의 진원지가 된 청다리가 있다. 그 아랫자락인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풍기군수로 부임했던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인 안향(安珦)을 추모하여 세운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옥녀봉 자락에서부터 비롯된 죽계천변 순흥면 배점리, 초암사에 이르는 계곡을 죽계구곡이라 부른다. 배점리는 선조 때 무쇠쟁이 배순裴純이 국상을 당하자 국망산에서 3년동안 망곡하였으므로 나라에서 무쇠점을 배순에게 주어서 배점裴店이라 하였다. 소백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계곡 곳곳에는 기암괴석이 맑은 물과 어우러져 신비경을 이루고 있는 이곳을 옛날 이황 선생이 이곳의 소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한 노래 소리와 흡사하다고 하여 각 소마다 이에 걸 맞는 이름을 붙여 불렀다. 그 뒤로 죽계구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 1곡은 백운동 취한대(翠寒臺)이고 2곡은 배점 남쪽에 있는 바위로 금성반석(金城盤石)이며 3곡은 금성반석 위쪽에 있는 쏘로 백자담(白子潭)이고 4곡은 초암사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이화동(梨花洞)이다. 5곡은 이화동 위쪽에 있는 소로 목욕담(沐浴潭)이고 6곡은 초암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청련동애(靑連東). 7곡은 청련동애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용추(龍湫)라 부르고 8곡은 용쏘에서 40M쯤 되는 지점에 있는 바위로 금당반석(金堂盤石)이라고 부르며. 9곡은 금당반석의 위쪽에 있는 소로 중봉합류(中峯合流)라고 부른다. 이곳 배점리에 있는 초암사는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300년 전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이전에 이 산에 들어가 초가 암자를 지었기 때문에 초암사草庵寺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초암사 앞 시냇가에 청운대靑雲臺가 있는데 예전에는 백운대白雲臺라고 불렀는데, 이황이 지금의 이름인 청운대라고 바꿨다고 한다.

흐르는 맑은 물이 기기묘묘한 계곡과 폭포를 만들어낸 죽계천은 한번 가본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계곡이다. 한편 순흥읍 읍내리의 일조봉(100M0에는 정희량에 얽힌 일화가 여러 개 남아있다. 정희량이 모반을 꾀하자 누이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자., 그 누이가 치마로 돌을 날라다 성을 쌓았다고 한다. 정희량의 난으로 피해를 입은 영남지방 사람들이 안타까워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이처럼 역사 속에 여러 사연을 간직하고 순흥을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소백산을 두고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서거정徐居正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리百里나 구름속에 꽃혔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끼쳤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