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에서 합천 해인사 까지 2016년 가을 걷기 학교.
2016년 9월 30일(금요일)부터 월요일(개천절)까지 청도 반시가 익어가는 가을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운문사에서 밀양을 거쳐 창녕과 고령, 그리고 합천의 해인사 소리 길을 걷는 <길 위의 인문학> 가을 걷기 학교를 엽니다.
아름다운 절집들과 그윽한 산길, 물길을 걸으며 무르익은 가을을 맛보게 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비구니 승가대학과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름난 운문사560년(진흥왕 21)는 한 신승(神僧)이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591년(진평왕 13) 원광(圓光)이 크게 중건하였다.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가슬갑사(嘉瑟岬寺)에서 귀산(貴山) 등에게 주었다고 전한다.
937년(태조 20)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으며, 이 때 왕이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쌀 50석을 하사하고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고 불렀다.
1076년(문종 30)에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이 중창했으며, 1105년(숙종 10)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운 뒤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90년(숙종 16)에 설송(雪松)이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운문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93호로 지정된 금당 앞 석등을 비롯하여 보물 제316호로 지정된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678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보물 제208호로 지정된 동호(銅壺) 등이 있으며, 오백나한전 안의 나한상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2기의 3층석탑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행주형(行舟形: 전복되기 쉬운 배 모양)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서 양쪽에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만세루는 조선 초기의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건물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입구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있다.
부속 암자로 절의 동쪽에 청신암(淸神庵)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內院庵), 북쪽에 북대암(北臺庵), 동남쪽에 사리암(舍利庵), 서쪽에 호거암(虎踞庵)이 있다. 이 절은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선정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도 유명하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옥천마을을 지나면 고려말의 신돈(辛旽)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란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사 되었으니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 역사 속에 요승으로 간승으로 기록된 신돈은 이곳 옥천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영산(영산)이고 승명은 편조 자는 요공이며 왕이 내린 법호는 청한거사였다.
당시 고려는 국내외적으로 어지러웠다. 공민왕은 새로운 인물을 불러들여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전작시키려 하던 차에 신돈을 만났다. 그는 “도를 얻고 욕심이 없으며 또 천미하여 친당이 없으니 대사에게 맡기면 반드시 뜻대로 행하여 거리낌이 없으리라” 하고 생각하여 등용하기로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조정에 들어왔고, 왕의사부(왕의 고문직)가 되어 오랜 폐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때 그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신돈은「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면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전국에 발표 하고서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었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켰다. “성인이 나타났다”라는 농민들과 빈민들의 찬양의 뒤편에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기득권 세력과 공민왕의 배반으로 1371년 7월 신돈은 수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때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일어났던 특이한 정치 상황이었고 신돈의 집권기간은 6년이었다. 신돈의 개혁사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만큼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과 민중고의 해결에 관심을 둔 사람이 얼마나 있었으며, 신돈에 비길 만큼 중상구제를 위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실제로 시행에 옮긴 권력가가 있었던가? 그의 등장과 그의 실패 이후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등 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신진 문인 세력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신돈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이 우리 성씨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 신돈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아직까지도 신돈은 역사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태어난 옥천사터는 향토문화재5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신라 8대 종찰의 하나였던 관룡사
불우했던 한 시대의 희생양이며 혁명가였던 신돈의 자취어린 옥천사터를 지나 관룡사로 가는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돌장승 한 쌍이 길손을 맞는다. 커다란 왕방울 눈에 주먹코가 인상적인 관룡사 돌장승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대나무 숲 뒤편의 관룡사에 이른다.
관룡산(739m) 중턱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26대 진평왕 5년에 증법국사가 창건하였고 원효대사가 천 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장을 이룩하여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채운이 영롱한 가운데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놀라서 원효대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화왕산 마루의 월영삼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고, 절의 뒷산 이름을 구룡산 또는 관룡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절은 그 후 경덕왕 7년에 추담선사가 중건하였고 몇 번에 걸쳐서 중수를 거듭하다가 1704년 가을의 대 홍수 때 약사전만 남기고 금당, 부도 등이 유실되었으며 이 절의 스님 20여명이 익사하는 큰 재난을 당하였다.
그 뒤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는데, (보룰:212호)인 관룡사의 대웅전은 앞면 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보물 146호인 약사전은 규모는 작지만 그 모습이 고풍스럽고 균형미가 빼어난 건물로서 맛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집이다. 언뜻보면 부석사 조사당을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사방1칸의 맞배지붕의 와가에 삼중대들보가 특이한 우리나라 조선 초기의 건물로 송광사의 국사당과 함께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표본으로 꼽힌다.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은 집체와 지붕의 구성 비례를 볼 수 있다. 기둥사이의 간격에 비하여 지붕의 폭이 두배 가까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서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매우 균형 잡힌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약사전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 519호)이 안치되어 있고 문밖에는 작고 아담한 석탑이 서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관룡사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용선대의 석가여래좌상에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요사채의 담 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분쯤 오르면 커다람 암벽위에 부처님 한분이 날렵하게 앉아있다. 대좌의 높이가 1.17㎡에 불상의 높이가 1.81㎡인 이 석불좌상은 높은 팔각연화대좌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결과부좌하고 앉아있는데 어느 때 사라졌는지 광배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석불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옛 사람들의 지혜와 부처에 대한 경이를 안고 배바위에 올랐다.
반야 용선을 타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눈보라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들린다. 저 바람소리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들의 모든 흐르는 시냇물 소리들을 불러 모아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미세한 떨림 들을 한데모아 이곳으로 불어오는지도 모른다. 또한 저 바람 소리는 세상의 온갖 고난 세상의 온갖 슬픔들을 다 거두어 요원의 불길로 타오를 날을 기다리는 화왕산의 억새밭을 향해 달려오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앉아있는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보물295호)아래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분화구처럼 펼쳐진 세상을 바라본다. 관룡산을 병풍삼아 눈 쌓인 작은 산들이 물결치듯 펼쳐나가고 영산의 진산 영취산을 돌아 계성, 옥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점점 히 나타난다. 누군가의 기원이고 간절한 소망인지도 모르는 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꺼진 촛불아래 눈보라 맞으며 젖어 있고, 여기저기 던져진 동전들이 을씨년스럽다.
어쩌면 우리나라 부처님 중에 이보다 더 외롭게 혹은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고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역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는 산길엔 눈이 가득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 남기며 간다. 우뚝우뚝 솟은 관룡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엷은 구름 속에 잠기고 희미하게 보이는 청룡암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야호, 우리 역시 그 소리의 여운을 따라 산 속으로 구름의 산정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멀리 산자락들이 올라갈수록 희미해지고 가파른 산길을 시나브로 시나브로 올라서니 정상이다. 헬기장으로 사용되었을 관룡산 정상에는 발목까지 눈이 쌓여있고 우리는 그 위에 앉았다. 구름 속에 얼핏 화왕산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북쪽 의 저편에 있을 일연스님의 자취어린 비슬산은 보이지 않는다.
신정일의 <사찰기행>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고 실려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 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신라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천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전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산속에는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죽어서 염을 한 뒤에, 다시 깨어나니 명부의 관원에게 약속한 발원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구입해서 배에 싣고 왔다. 목판에다 새긴 뒤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한 다음, 장경각藏經閣을 120칸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지금 일천여 년이 되었지만 판이 새로 새긴 것 같다. 날아가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기와지붕에 앉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儒家의 경전은 비록 내부의 깊은 궐내에 있다고 하여도 날아가는 새가 집 위를 지나가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불교 경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해인사 서북쪽이 가야산 상봉이다. 사면의 돌이 깎아지른 듯 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산 위에는 평탄한 곳이 있을 것 같지만 알 수가 없다. 그 위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서려 있으며, 초동과 목동들은 가끔씩 산봉우리 위에서 풍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또한 절에 있는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짙은 안개가 덮이면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鄭逑)는 『가야산 기행』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겨준다.’고 느낌을 표현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연유로 세 절을 각각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 사찰로 꼽는데, 법보사찰인 해인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애장왕3년(802)이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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