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겨울 남한산성과 천진암을 가다

산중산담 2017. 4. 10. 13:01

 

 

겨울 남한산성과 천진암을 가다.

 

 

2017년 신년 초, 첫 번째 기행을 조금은 무겁지만 오늘의 이 시대에 필요한 역사의 현장을 걷습니다.

미증유의 국난인 병자호란의 역사가 서린 남한산성과 천주교의 성지인 천진암, 그리고 허균의 누나이자 조선의 걸출한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의 묘소를 찾아가는 기행을 마련합니다.

신년을 여는 답사에 참여바랍니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南漢山)은 서울분지를 끼고 동쪽의 지맥인 수락산(水落山)불암산(佛巖山)과 동남으로 이어지며, 서울 북쪽의 북한산과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성남시 북동쪽에 있는 이 산에 조선시대의 산성인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등 서울을 지키는 4대 외곽중 동쪽에 있던 성이 남한산성이었고, 사적 제 57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한 뒤에 서기전 6(온조왕 13)에 이곳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였다고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지만 홍경모(洪敬謀)남한지 南漢志에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때 온조가 도읍한 성은 광주고읍(廣州古邑)인 지금의 금단산(丹山) 아래에 있었다고 하며 즉, 온조고성은 이성산성(二聖山城)이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 일장산성(日長山城)672(문무왕 12)에 새로 축성한 주장산상(晝長山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성이 남한산성이다.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축을 한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인조 2)이었다.

이때 각성대사를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옥정사 외에 국청사동림사개원사천주사 등 7개의 사찰을 추가로 건립하여 모두 9개의 사찰에 승군들을 머물게 하면서 훈련과 수도방위에 만전을 기했다. 산성이 축조된 다음(인조 171639) 처음으로 실시되었던 기동훈련에 참가한 인원이 13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1914년까지만 해도 산성 안에 5백 가구쯤이 살았다고 한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가장 완벽한 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산성을 쌓았던 목적이 뚜렷했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73칸반, 하궐(下闕)154칸 도합 227칸이었다.

 

치욕적인 병자호란을 추억하며

길이 미끄러운데도 산성을 찾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르내리고. 남한산성의 산중 가장 높은 산인 일장산(日長山 453m)에 도착한다. 남한산성의 산중 낮이 가장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이 일장산에 일명 서장대(西將臺)라 불리는 수어장대가 있다. 인조 2(1624)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동서남북에 세운 4개 장대 중 제일가는 장대였으며 그때 세운 장대 중 남아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이 장대는 성곽을 따라 멀리 내다보며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워진 목조건물 2층집이다.

이 장대에 서서 바라보면 성안이 환하게 내려다보이고 멀리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의 풍경들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이곳 수어장대는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45일을 머물면서 직접 군사를 지휘 격려하며 청군에게 항전을 펼치다가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을 했던 치욕적인 현장이다. 삼전도의 치욕은 거슬러 올라가면 인조반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일어났던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현실적인 청나라와의 외교 그리고 폐모론을 명분으로 일으킨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이들은 광해군이 표방했던 명과 중립 외교노선을 반정노선으로 바꾸고 말았다. 청나라와 조선을 형제로 보고 서로 예우(禮遇)하고자했던 청 태종은 크게 분노하여 정묘년인 16271월에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김상용이 유도대장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소현세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후금이나 조선 두 나라 양측 모두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협상에 들어갔다. 그때 청나라 측은 조선 측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을 침략하게 된 이유 7가지를 말하고 세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조선의 만주 영토를 청나라에 내놓을 것,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조선군사 3만을 지원할 것, 최명길이 강화회담에 나서서 청과 형제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합의시키자 청나라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1636년 청나라는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롭게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 청한다. 조선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팔도에 선전교서를 내렸다. 그 선전교서에는 조선 백성보다 향명대의(向明大義 : 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가 더 큰 목소리로 주창되어 있었다.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선전교서였던 것이다. 결국 1636121일 청 태종은 군사 12만 명을 이끌고 조선침략에 나섰고 그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인조는 1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진을 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때 성안에는 양곡 14300(), () 220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일을 견디어낼 수 있는 식량에 불과하였다. 청군의 선봉부대는 12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하여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으며, 청 태종은 다음해 1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 안을 굽어보며 대치하였다. 큰 싸움은 없었지만 40여일이 지나자 성 안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외세의 침략을 죽음으로 막아내자는 척화파의 화()() 양론이 팽팽이 맞서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주화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때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임진강 북녘은 되놈의 씨가 배에 가득 찼고 굶주린 백성이 서로 잡아먹었던그 치욕을 임금이나 고관대작들은 그 알량한 사대주의 명분 때문에 알고도 모른 체했던 것이다.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가득한 산성을 뒤로 하고 삼전도(三田渡)에 내려가 항복하고 만다. “천은이 망극하오이다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치욕이 어디 그것뿐이랴. 결국 청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그리고 봉림대군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남한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병자호란의 후유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청군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 문제 또한 심각했다. 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싼 경우가 1인당 25내지 30냥이었고 대개는 150내지 250냥이었으며 비싼 경우는 1500냥에 이르기 때문에 대부분 끌려간 사람들이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내고 찾아올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되돌아온 환향녀還鄕女(그 뒤부터 남의 남자와 잠을 잔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했고, 그 때 낳은 아이들을 애비 없는 호로 자식이라고 했다)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비록 한 달 반 남짓한 짧은 전쟁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미증유의 국난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이어갔다면 두 번에 걸친 전란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중국과 맺어왔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형제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적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수어장대의 계단에 서서 남한산성의 지난했던 역사를 떠올려보며 그 시절을 살다간 민초들의 거친 숨결을 느끼고 싶지만 바람도 없이 햇살만 내려쬘 뿐이다.

수어장대는 단층 누각이었던 것을 영조의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지었으며 바깥쪽 편액을 수어장대(守禦將臺), 안쪽 편액을 무망루(無忘樓)라고 하였다. 무망루는 볼모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 효종이 원한에 찬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영조와 정조는 여주 영릉의 효종 능묘를 참배하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이곳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역사를 되새겼다고 한다.

남한산성 올라가 이화 문전 바라보니 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떴다 보아라 저 중달새로 시작되는 전라도 민요 속의 남한산성에 지금 수진이 날진이는 보이지 않고 갈까마귀 한 마리만 까악 까악 우짖고 있다.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